제1장. 다 같은 마음이었다 (1)
라커룸의 분위기는 방학 날의 교실 같았다.
흥분한 기예르모가 무둔바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며 정지우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다.
서브 선수답게 먼저 벤치로 움직이기 위해서였다.
“행운을 빌어!”
“고맙습니다!”
꽈악!
기예르모와 손을 잡아 준 정지우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준 후에 선수들과 손을 마주치며 라커룸을 나섰다.
승리로 마감할 경우, 후반 적당한 시간에 교체하겠다는 마틴의 언질이 있었다.
리그 마지막 경기의 골대를 정지우에게 맡기겠다는 의미였다. 정지우를 배려하는 것도 있지만, 홈 관중들에 대한 일종의 팬 서비스 같은 느낌이어서 딱히 반대할 것은 없었다.
서브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뒤엉켜 벤치로 향했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짝.
홈 관중들이 서브 선수들에게 보내 주는 박수를 받으며 정지우는 벤치로 걸었다.
위쪽으로 시선을 들었을 때, 박용근과 그 옆에서 손을 흔들어 주는 전은주와 유정호가 보였다.
고개를 숙여 인사한 정지우는 벤치에 앉았다.
김문호는 지친 얼굴로 송인수와 마주 앉아 있었다.
“박 감독과 전화 통화 한 번만 하게 해 주시오.”
“송 위원님.”
“딱 한 번이면 됩니다. 더는 귀찮게 안 할 겁니다.”
김문호가 눈을 갸름하게 뜨며 송인수를 바라보았다.
이 양반이 뭔가 있는데?
통화만 하면 박용근을 꼬드길 한 수를 감추고 있는 눈치인데?
송인수가 소주병을 들어서 김문호의 잔을 채워 주었다.
김문호의 집 앞에 있는 저렴한 횟집이었다.
“오늘 리그 경기가 끝나면 시간도 맞을 것 아닙니까? 이대로 나랑 같이 술이나 하다가, 경기 끝나면 전화 한 번만 해 줍시다.”
이제는 얼굴을 제법 봐서 그런지 말을 어렵게 하지 않았다.
“송 위원님, 솔직히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그러시죠.”
곱상하게 생긴 송인수는 소주를 한 병 반이나 마시고도 멀쩡한 얼굴이었다.
“박 감독에게 무슨 조건을 걸려고 그러십니까?”
“조건이 어디 있습니까? 그저 그동안 협회가 잘못했다는 거 사죄하고 도와달라고 싹싹 빌어 보려는 거지요.”
술이 불콰하게 올라온 얼굴로 김문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지 마시고 솔직히 털어놔 보세요. 들어 보고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면 내가 욕먹는 한이 있더라도 전화 한번 해 볼 테니까요.”
송인수가 김문호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솔직히 우리 대표팀 감독을 맡는다는 것 자체가 그냥 독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요.”
“거기에 지금껏 협회에 온갖 불이익을 받으며 당하던 박 감독이라면 더더욱 이걸 맡을 이유가 없지요.”
“맞습니다.”
김문호가 궁금한 얼굴로 소주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잘게 썰어진 오징어 회가 아직 반이나 남아 있었다.
“단 두 게임입니다. 기존의 선수들이 통제되지 않을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박 감독이 키워 낸, 소위 박용근 키즈를 선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도대체 뭐라는 거지?
박용근이 감독을 맡지 않겠다는데 무슨 놈의 박용근 키즈를 선발한다는 말을?
멍하니 바라보는 김문호를 향해 송인수가 심정을 짐작한다는 듯 입을 열었다.
“박용근 감독이 덜렁덜렁해 보여도 꼼꼼하기가 바늘 꽂을 자리 없는 분입니다.”
송인수가 잔을 들어 반쯤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그동안 협회가 몹쓸 짓을 했습니다. 그 바람에 선수 한 명이 밖으로 돌았고, 박 감독님이 틈틈이 연락을 했었던 것으로 압니다.”
“상민이 말씀이십니까?”
“알고 계셨나요?”
질문이 연달아 오간 다음이었다. 화가 난 것처럼 김문수가 소주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그 녀석까지 파악했으면 먼저 길을 열어 주셨어야지요! 그 녀석 때문에 박 감독이 얼마나 마음 앓이를 했는데, 그걸 미끼로!”
“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박상민이가 박 감독님이 아니라면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고 버팁니다.”
송인수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것처럼 멀쩡한 얼굴이었다.
“두 경기입니다. 그 경기에 상관없이 난 외국인 감독을 모셔 올 겁니다. 본선에 나가면 나가는 대로, 떨어지면 떨어지는 대로 월드컵을 제대로 준비할 테니까요. 대신 두 경기만큼은 누군가 희생해 줘야 합니다.”
김문호의 잔이 비었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꼼짝도 않고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김 감독님께 매달리고도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김 감독님은 박용근 키즈처럼 확실한 제자분이 없으셔서, 자칫하면 이름만 망가지고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꼴이 됩니다.”
“현재 직책이 없는 분들도 있잖습니까?”
“감각이 떨어지셨죠. 거기에 비상시국입니다. 두 경기라고 해서 설렁설렁할 것 같았다면 벌써 그분들 찾아뵈었을 겁니다. 선수 장악력도 생각해야 합니다. 기존의 선수들 제외하고 팀을 이끌 분이 누가 있다고 보십니까?”
김문호는 이제야 왜 송인수가 이토록 끈질기게 박용근을 원하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기존 선수를 제외하고도 따르는 국가대표 수준의 선수가 있으며, 국제적인 감각이 살아 있는 감독?
김문호가 생각해도 당장 박용근만 한 인물은 없었다.
“후우.”
“도와주십시오. 내가 사심이 있었다면 이러지 않았을 겁니다. 한국 축구, 응원해 주는 우리 국민들, 한 번만 도전해 주십시오. 아쉬울지언정 후회는 남지 않게요.”
“실패했을 경우에 박 감독과 선수들이 받아야 하는 질책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협회에서 모시는 모양을 갖춰 보겠습니다. 모든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김 감독님께선 박 감독과 연결만 한번 해 주십시오.”
김문호가 나직하게 숨을 내쉴 때 송인수는 술병을 들었다.
오징어 회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 어떤 분을 모셔 오든 이전의 대표팀 선수들은 태업할 게 뻔합니다. 기대할 유일한 선수들이 박용근 키즈밖에 없는데, 박상민 선수 같은 경우에도 본인이 싫답니다. 아예 박 감독님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겠답니다.”
“그것참!”
“여기에 어느 분을 감독님으로 모시겠습니까? 기존의 선수들은 문광국 감독에 얽매였고, 유일한 대안인 박용근 키즈는 박 감독님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겠답니다.”
송인수가 진지한 눈빛으로 김문호를 바라보았다.
“지겹습니다. 솔직히 다 내다 버리고 나도 이거 안 하고 싶습니다. 징글징글한 인물들이 해먹는 협회? 나 역시 그냥 지금처럼 강의만 하면서 조용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비꼬거나 빈정대는 것이 아닌 진심에서 나온 김문호의 대꾸였다.
“우리 축구입니다. 마당이 더러워지면 우선 치우고 봐야지, 다 함께 나가 버리면 우리 앞마당을 과연 누가 치워 주겠습니까? 김문호 감독님 아래에서 축구를 배우던 그 아이들이 뛰어야 할 우리의 그라운드입니다.”
김문호가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으며 소주잔을 들었을 때였다.
“김 감독님, 사고 한번 치세요.”
송인수가 날카롭게 눈빛을 빛내며 말을 건넸다.
정지우는 무거운 눈빛으로 경기를 바라보았다.
짜임새 있는 유니온 시티와 저돌적인 입스위치 FC의 대결이었다.
패스를 이용해 공을 소유한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조금씩 경기를 주도할수록 입스위치 선수들은 다급하게 달려들었다.
예상대로 진행된 경기이고, 빤히 실력 차이가 보이는 대결이었는데, 정지우는 그라운드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프리미어리그에 올라간 유니온 시티를 보는 느낌 때문이었다.
한 수 위였던 리버풀, 코너킥의 정석처럼 공을 차 대던 아스널, 그리고 궤는 다르지만 환상적인 몸놀림으로 공을 다루던 브라질 국가대표팀도 떠올랐다.
강등당하고 싶은 팀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입스위치 선수들만 하더라도 당장 눈앞에서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는 거였다.
저들도 이전 경기에서 분명 승점은 건졌던 팀이다.
오늘 경기에서 승리해 승점 3점만 건진다면 챔피언십에 잔류할 수도 있다.
“우-!”
그러나 원정 응원단의 탄식이 그들의 수준을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기습을 하다가도 부정확한 패스 탓에 공을 빼앗기고, 수비수는 레믹의 발재간에 우왕좌왕한다.
2선으로 튕겨 나온 공을 한 번쯤은 잡을 만한데, 입스위치 선수들은 포지션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툭툭!
레믹이 또다시 드리블로 입스위치의 왼편을 파고들었다.
투욱!
그는 맥슨에게 공을 건네주고는 곧바로 골대를 향해 치고 달렸다.
입스위치의 수비수들이 레믹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
투우욱!
맥슨은 반대편에서 달려드는 브라운을 향해 공을 낮게 깔아 주었다.
“우와아아아아-!”
퍼어어엉!
브라운이 정말이지 멋진 슈팅을 날렸다.
“우-!”
그러나 커다랗게 휜 공은 골대를 1미터쯤 벗어났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브라운이 맥슨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좋아 보인다. 문제없다.
그런데 만약 상대팀이 리버풀 정도라면?
과연 저런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저렇게 기가 막힌 슈팅 찬스에서 골을 얻어 내지 못하고도 승점을 얻을 수 있을까?
정지우는 물러나는 선수들을 빠르게 돌아보았다.
기예르모와 무둔바가 서 있는 동선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다음으로 중앙을 맡고 있는 유니온 시티의 2선을 보았다. 모든 것이 아쉬웠다.
막말로 입스위치니까 이렇게 상대할 수 있는 거지, 리버풀만 해도 이 정도면 벌써 저 틈을 파고들고 남았을 만큼 허술한 라인과 포메이션이었다.
박용근이 뒤에 있다.
솔직히 그의 곁에 앉아서 지금 궁금한 것들을 묻고 보완할 방법과 전술, 그 외에 프리미어리그 팀들을 상대해야 할 때 궁금한 것들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다.
“우와아아아-!”
홈 관중들이 또다시 함성을 질렀다.
짝짝짝짝짝짝짝짝짝!
그리고 연이어 커다랗게 손뼉을 쳐 주었다.
중앙에서 공을 잡은 꼼빠니가 달려드는 입스위치 선수 둘을 제치고 멋진 패스를 찔러 주었기 때문이다.
공을 받은 브라운은 오른쪽 터치라인 근처를 움직이다가 다시 공을 뒤로 빼 주었다.
꼼빠니가 받았고, 카알에게, 카알이 데이빗에게, 데이빗이 다시 왼편의 맥슨에게 건네주었다.
공격 시에 수비팀의 선수들을 좌우로 흔드는 것은 물론 훌륭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동네 산책하듯 공을 빼서는 곤란하다.
또 있다.
전반 내내 유니온 시티의 공격은 왼편에서 맥슨이 파고들어 레믹에게 연결하는 단순한 그림을 연출하고 있었다.
잘하는 공격을 펼쳐서 상대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마침내 결정적인 한 방에 골을 만드는 것, 그리고 대비하던 공격 루트를 한순간에 바꿔 승부를 결정짓는 일은 축구뿐만이 아니라 모든 스포츠에 적용된다.
“우와아아아-!”
그러나 정지우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입스위치 정도라면 지금쯤 벌써 두 골을 넣었어야 맞다.
투욱!
레믹은 맥슨에게 다시 공을 연결하고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날려!’
맥슨은 슈팅을 했어야 한다. 그래서 흘러나오는 공을 레믹이 주워 먹을 기회를 주어야 했다.
투우욱!
타이밍을 빼앗긴 맥슨이 얼른 공을 뒤로 돌렸다.
보기엔 멋지고 일방적인데 효율이 정말 안 나오는 공격, 유니온 시티의 전반전은 그랬다.
삐이이익! 삐익!
주심이 휘슬을 불어 전반전 종료를 알리자 홈 관중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마틴은 전반 내내 테크니컬 지역에 서서 무언가를 고민하는 눈치였고, 슬쩍 고개를 돌려 본 곳에서 박용근은 고개를 숙인 채 메모를 하느라 바빴다.
프리미어리그는 이렇게 가서는 곤란하다.
미안한 말이지만 퇴장 제조기 스웰던, 굼뜬 무둔바, 기복이 심한 레믹, 거기에 하루만 투자하면 공격 루트가 빤히 보이는 미드필더진으로는 38게임을 감당하기 어려운 거다.
정지우는 벤치에서 일어나 그라운드로 걸어 나갔다.
필드 선수들은 감독의 지시가 없더라도 통상 25분이 지난 시점에 터치라인 바깥에서 몸을 푼다.
경기 중에 터치라인을 따라 조끼 입은 선수들이 줄줄이 달리는 이유가 바로 그런 거다.
그러나 골키퍼는 대개 자리를 지킨다.
45분을 멍하니 앉아 있으면 가장 먼저 다리와 허리가 굳기 때문에 정지우는 서브 선수들과 함께 그라운드로 나섰다.
천천히 다리를 뒤로 잡아서 몸을 풀어 주고, 일정한 공간을 왕복해서 달린다.
라커룸으로 들어가 선수들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직접 뛴 필드 플레이어들의 느낌을 듣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딱히 문제가 없는 경기에서 지나친 개입은 좋지 않은 거였다. 당장 골을 넣고 싶지 않아서 안 넣는 선수는 없을 테니까.
거기에 데이빗이나 마틴이 다른 말을 하지 않아서 공연히 나설 이유도 없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10분에 걸쳐 몸을 푸는 동안 유니온 시티 관중들은 쉬지 않고 응원가를 펼쳐 내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철강 노동자들의 도시 유니온 시티.
정지우는 왼쪽 다리를 앞으로 내밀어 구부린 자세로 관중석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저들을 미친 듯이 흥분하게 만들고 싶다.
프리미어리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