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알겠나? 숙녀분들? (1)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젓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종편은 전반에 나왔던 정지우의 활약상을 그 짧은 순간에 5분짜리로 편집해서 내보냈다.
『페널티킥을 막은 것은 정지우 선수가 골을 넣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앞에 슈퍼 세이브까지 계산하면 전반에 두 골 이상을 넣었다고 봐도 됩니다.』
화면이 정지우의 활약상을 다시 보여 주었다.
『영국 FA컵 결승전에서 동양인 골키퍼가 선발로 나선 최초 경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프리미어리그 동양인 최초 선발 골키퍼의 기록도 무난하게 세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해설자의 말을 끝으로 화면에 광고가 떠올랐다.
퇴장당한 선수는 벤치에 앉을 수 없다. 그래서 정지우가 동료들과 라커룸으로 들어섰을 때 스웰던은 복잡한 표정으로 라커룸 안쪽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아직 유니폼을 벗지 않고 있었다.
툭하면 부수자, 짓이기자, 혹은 ‘맡겨 두라고!’ 하던 그가 코를 쑥 빼고 앉아 있는 거였다.
결승전이 주는 중압감이 아직 동료들에게 남아 있다는 의미와 같았다.
“Oh-O! When you walk through a storm!”
폭풍을 헤쳐 나아갈 때!
“Keep your head up high!”
고개를 높이 들어라!
리버풀의 응원가가 라커룸을 계속해서 파고들며 유니온 시티 선수들의 사기를 끌어내리려 애쓰고 있었다.
털썩.
자리에 앉은 정지우는 장갑을 벗어서 옆에 놓았다.
페널티킥을 막았을 때의 환호는 한 명이 퇴장당한 채 뛰어야 하는 후반의 부담감에 짓눌려 있었다.
“어쩌면 코치가 무둔바를 교체로 넣고, 쓰리백으로 전환할 거야.”
무둔바는 그라운드에서 몸을 풀고 있어서 라커룸에 없었다.
“And don't be afraid of the dark!”
그리고 어둠을 두려워하지 마라!
응원가를 부르는 사람들은 정말 지치는 법이 없는 걸까?
정지우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밀어붙이자.”
데이빗이 힐끔 시선을 주었고, 레믹이 ‘어떻게?’ 하는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리버풀은 공을 잡으면 긴 패스를 이용하거든. 그리고 저쪽이 우리보다 패스 성공률이 높아서 전반이 불리했던 거잖아.”
다들 아는 이야기였다.
방법이 없어서 문제인 거지.
“꼼빠니가 아무리 패스를 찔러 넣어 주더라도 리버풀은 그 길을 전부 읽고 있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레믹!”
레믹이 이번엔 ‘뭐?’ 하는 표정으로 정지우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너 잘하는 거 있잖아. 드리블. 페널티 에어리어를 그걸로 파고들어. 그런 다음 수비가 흔들린다 싶을 때 뒤나 옆으로 넘겨줘. 맥슨, 꼼빠니에게.”
“그래서?”
레믹이 도전적으로 질문을 던진 다음이었다.
“슈팅이지. 너는 그때 튀어나온 공을 노려.”
“우리가 한 명 부족한 건 알고 있지?”
레믹의 말에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승이어서 두려운 거야? 아니면 리버풀이 두려운 거야?”
그리고 자존심이 상할 법한 질문을 던졌다.
“레믹, 넌 평소보다 느리고, 꼼빠니는 공을 잡으면 자꾸 주춤거리고, 맥슨은 달려들다가 몸싸움에 밀리고 있잖아. 뭐가 문제야?”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리버풀의 응원가가 끝나자 이어서 유니온 시티의 응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부딪쳐 주자고! 우리 관중들이 리버풀 응원단을 상대로 저렇게 싸우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경기를 못하고 있잖아! 투박하고 거칠지만, 힘 있는 축구!”
정지우는 데이빗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언제 퇴장 무서워했어? 내가 이마 찢어지는 거 겁내? 맥슨! 레믹! 꼼빠니! 포그이! 몸싸움하다가 A보드까지 날아가던 그 근성 다 어디에 날려 버린 거야?”
시선을 돌린 정지우는 선수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아스널과의 32강전을 떠올려 봐. 내가 볼 땐 리버풀이 그들보다 강하다고는 말 못하겠는데? 그런데 왜 자꾸 움츠려? 골을 먹는 건 내 책임! 인정한다!”
“골을 못 넣는 건 내 책임이라는 거야?”
레믹이 자존심이 확 상한 듯한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마음먹는다고 다 넣으면 네가 나랑 있겠냐?”
“골을 먹는 건 네 책임이라면서? 페널티킥까지 막았는데, 골을 못 넣는다고 비난하는 거 아냐?”
하여간 이놈은 정말 종잡기 어려운 부류인 거다.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레믹을 보았다.
“지는 건 내 책임이라니까. 대신 남은 45분은 후련하게나 해 보자! 들이받고, 악착같이 매달리고, 물고 늘어지자고! 옐로카드? 레드카드? 그런 거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 관중들이 원하는 경기를 하자고!”
정지우의 말이 막 끝났을 때였다.
문이 열리고 마틴이 들어섰다.
“후반에는 멜스와 무둔바를 교체한다. 라파엘? 자네가 왼쪽을 맡아 주고, 카알! 자네가 오른쪽. 무둔바를 센터에 세워서 쓰리백으로 바꿔.”
정지우의 예상과 똑같은 지시였다. 그래서 마틴의 말이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선수들이 정지우를 힐끔거렸다.
“브라운.”
“예, 코치.”
“자네는 중앙으로 내려와. 3-5-1의 포메이션이라고 생각하고 허리에서 집중적으로 싸운다.”
“알겠습니다.”
마틴은 다시 시선을 레믹에게 주었다.
“레믹, 자네는 좀 더 파고들어. 파울을 얻으면 좋고, 아니어도 리버풀이 함부로 우리 진영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슈팅으로 마무리해!”
레믹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후반은 허리에서 밀리지 마라. 데이빗, 자네가 라인을 이끌어. 질 때 지더라도 밀어붙인다.”
이것 또한 정지우가 말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이었다.
“경기를 뛰는 건 선수 몫, 그렇게 만드는 건 코치인 내가 할 바다. 하지만 준결승까지 그토록 맹렬하게 달리던 너희가 오늘은 숙녀처럼 곱상하게 뛰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마틴이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오늘 경기에서 지는 걸 원망하거나 비난하지는 않겠다. 대신 우리의 힘과 용기를 보여 줘! 알겠나? 숙녀분들?”
“퇴장당해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게 내가 아는 유니온 시티의 선수들이라고!”
데이빗이 뱉어 낸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마틴이 냉큼 받았다. 그리고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준 후에 라커룸을 나섰다.
“우리가 전반에 그렇게 얌전했었나?”
“어느 정도는.”
데이빗의 질문에 정지우가 답을 했다.
“수비는 좀 됐었던 것 같은데?”
“허리 싸움에서 계속 밀렸지.”
데이빗이 인정한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말할 것 같았던 데이빗이 침묵하는 바람에 라커룸의 분위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이런 건 정말 좋지 않다.
마틴이 숙녀라는 표현을 써 가며 자극했던 것도 선수들이 더 열심히 뛰라는 의미였지, 이렇게 기가 꺾이란 뜻은 아니었을 거다.
“늘 이런 경기를 상상했었어. 결승전. 내가 부모님처럼 생각하는 감독님과 사모님을 모신 경기.”
정지우는 레믹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쉬움은 남을지언정 후회는 없는 경기를 하고 싶다. 전반에 골을 못 넣었다고 자존심 상해하던 리버풀을 당황하게 만들어 주라.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랬던 것처럼.”
단순한 놈.
레믹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났다.
“미드필더 라인이 다섯 명이다. 라파엘과 카알, 무둔바와 내가 수비를 책임진다. 중앙에서 함부로 넘어오지만 못하게 막아 줘. 그리고 레믹이 저쪽 페널티 에어리어를 헤집고 다니게 해 줘.”
정지우는 장갑을 들어서 왼손을 먼저 끼웠다.
“다음 시즌에서 계속 상대할 팀들이잖아. 리버풀과 이 경기를 지켜볼 프리미어리그 팀들에게 경고해 주자고. 우리를 우습게 생각하지 못하도록.”
정지우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얌전하긴 했었네.”
데이빗이 기가 막힌 것처럼 웃으며 말을 뱉어 냈다.
“왜 그랬었지?”
“결승이니까. 그리고 그만큼 강한 팀을 상대하고 있으니까.”
“빌어먹을! 최악이라고 해 봐야 지는 것 말고 없는 건데! 네가 페널티킥 못 막았다면 어차피 밀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건데, 왜 그렇게 움츠러들어서! 좋아! 나도 결승전에서 한번 퇴장당해 볼까?”
데이빗이 스웰던에게 시선을 주었다.
“기다리고 있어. 바로 올 거 같으니까.”
“얼마든지!”
스웰던이 갱단 두목쯤 되는 듯한 음성으로 답을 했다.
전반의 주요 장면이 나온 직후였다.
『우와아아아-!』
함성과 함께 화면이 그라운드를 비춰 주었다.
『양 팀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나오고 있습니다. 유니온 시티는 23번 멜스와 무둔바 선수를 교체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둔바 선수를 중앙에 놓고, 라파엘을 왼쪽, 카알을 오른쪽으로 놓는 쓰리백으로 전환한다는 의미인 것 같네요. 전에도 이런 방식을 썼었거든요.』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또다시 어깨를 마주 잡고 상체를 숙인 채 무언가를 다짐하고 있었다.
『유니온 시티는 아무래도 스웰던 선수가 퇴장당해서 수적 열세에 있거든요. 수비에 치중하면서 역습을 노릴 것으로 보이는데, 그 점은 어떻게 보시나요?』
『그렇죠. 전반에도 사실 유니온 시티가 많이 밀리는 경기였거든요. 그런데 한 명이 부족한 상황에 놓이면 뭐라고 해도 수비에 치중할 수밖에 없거든요.』
정지우가 골포스트를 걷는 모습이 나왔다.
『정지우 선수가 보입니다. 전반에는 믿기지 않는 활약을 해 주었는데, 후반에도 멋진 선방 펼쳐 주기를 기대합니다.』
투욱!
정지우가 크로스바를 건드리는 순간이었다.
『우와아아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TV를 통해 전해졌다.
『저 동작을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기대하는 모양입니다.』
『사실 전반에 보인 슈퍼 세이브로도 정지우 선수는 오늘 제 몫을 다 했다고 평가할 수 있어요.』
『삐이이익!』
『유니온 시티의 선공으로 후반이 시작되었습니다.』
데이빗이 포그이에게 넘겨주었던 공을 다시 받았다.
투욱!
그리고 그는 곧바로 레믹에게 공을 밀어 주었다.
투욱! 툭! 툭!
레믹은 작정한 것처럼 페널티 에어리어를 파고들었다.
당황한 리버풀의 수비수들이 달려드는 순간이었다.
투욱!
레믹은 왼편으로 공을 밀어 주었다.
“우와아아- 아!”
맥슨이었다.
그가 빠르게 달려가 공을 발바닥으로 굴리며 3번 엔리코와 맞섰다.
놀라운 변화였다.
수비를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데이빗과 포그이, 꼼빠니가 페널티 에어리어 앞으로 달려들었고, 레믹은 앞을 막아서는 수비수들을 몸으로 밀어 댔다.
투욱!
맥슨이 골라인을 향해 공을 툭 차고서 있는 힘껏 달린 직후였다.
퍼어엉!
당황한 리버풀의 수비수들을 제치고 맥슨이 골대 앞으로 길게 공을 날렸다.
휘이익!
데이빗과 포그이, 브라운이 동시에 뛰어올랐고, 레믹은 페널티 에어리어 뒤로 물러났다.
터엉!
17번 사코가 머리로 공을 걷어 낸 다음이었다.
와라락!
레믹이 뛰어들어 그 공을 가로채서 다시 페널티 에어리어를 파고들었다.
“우와- 아아아아!”
데이빗과 포그이, 브라운이 주변에 있었고, 왼쪽에서 맥슨이 공을 달라고 손을 높이 들었다.
리버풀의 수비수들이 흔들리는 순간,
투우욱!
레믹은 발뒤꿈치를 이용해 공을 뒤로 보냈다.
“우와아-!”
흘러나온 공을 향해 꼼빠니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퍼어어엉!
그리고 강력한 슈팅을 날렸다.
“우-!”
그러나 공은 왼쪽 골포스트를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가고 말았다.
『후반 시작과 동시에 오히려 유니온 시티가 리버풀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지금도 약속된 플레이였던 것 같은데요?』
『그렇네요!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멋진 슈팅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볼까요? 리버풀 수비수들이 맥슨과 데이빗에게 쏠리게 만들고, 그 틈을 이용해 레믹이 꼼빠니에게 공을 빼 주었어요.』
꼼빠니가 날린 슈팅이 골포스트를 빗나간 직후에 골대 뒤편의 관중들이 머리를 감싸 안는 모습이 화면에 가득 나왔다.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중앙선 부근에서 강하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완전히 예상을 빗나가는 모습입니다.』
『전반을 많이 뛰지는 않았거든요. 이렇게 되면 오늘 승부 모릅니다. 보세요! 리버풀 선수들이 분명 당황하고 있거든요!』
『우와아아아-!』
포그이가 길게 넘겨준 공이 리버풀의 오른쪽 코너를 향해 굴러갔고, 브라운이 달려들고 있었다.
『넘겨야죠! 바로 넘겨줘야죠!』
해설자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브라운은 곧바로 골대 앞으로 공을 날려 주었다.
소매와 상의를 움켜쥔 선수들이 뒤엉킨 틈에서 꼼빠니가 헤더를 따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