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그러니까 내일 출발하자. (3)
“이런 식으로 만든 유니온 시티 영상도 있냐?”
“예. 여기 있을 거예요.”
정지우는 팀 스태프들이 따로 녹화한 영상들을 찾아냈다.
“이건 선수별로 있는 거구요, 이건 전체 영상이구요. 어느 거 먼저 보실래요?”
“전체 영상 먼저 한 번 보자. 지난번 웨스트 브로미치전 경기가 있으면 그게 좋겠다.”
정지우는 웨스트 브로미치 경기 DVD를 기계에 집어넣었다.
경기장 위쪽에서 선수 전체의 움직임을 담은 영상인데, 포지션별 활동을 X 자로 표시한 서면 자료도 있어서 그것 역시 박용근 앞에 놓아 주었다.
최근 정지우가 활약한 세 경기를 모두 본 박용근은 다시 꼼빠니와 데이빗, 라파엘의 개별적 영상을 보았다. 빠르게 조작하다가 박용근이 원하는 장면에서 멈추곤 했는데, 다 보는 데 2시간 조금 넘게 걸렸다.
영상과 자료를 검색하는 탓에 점심이 조금 늦어졌다.
그리고 그때 맛있는 냄새가 코를 간질였다.
홀리는 것처럼 강렬한 유혹이었다.
정지우가 상체를 들어 주방을 보았을 때, 전은주가 웃으며 와 보라는 투로 눈짓을 했다.
저걸 마다해?
“잠시만요.”
주방으로 움직인 정지우의 눈에 가지런히 놓인 김밥이 보였다. 참기름을 발라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양쪽 끝에 단무지, 시금치, 달걀 등등이 삐죽삐죽 나온 그 김밥 말이다.
“아! 해 봐.”
김밥의 끝 부분을 큼지막하게 썬 전은주가 손으로 그걸 집어 입에 넣어 주었다.
맛있다. 미칠 것처럼 맛있는데…….
왜 이러지? 갑자기? 맛있는 김밥을 물고서?
정지우는 고개를 숙인 채 급하게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머니가 계셨다면, 병원에서 힘겹게 지내더라도 살아만 있었다면, 이런 걸 싸 들고 달려갈 수 있는 곳에 어머니가 있다면…….
그 흔한 김밥집을 수없이 지나치면서 한 번도 마음 놓고 사 먹지 못했던 김밥이라서 그런가.
한 줄에 천 몇백 원 하는 김밥?
하나쯤은 사 먹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외롭고 힘겹게 병실에 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며 애써 외면했었다.
왜 그런지 한 번 생각이 달려가자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입에서 느껴지는 김밥의 맛이 강렬할수록, 이런 집은 상상조차 못한 채 안타까운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던 어머니의 마지막 눈길이 자꾸만 떠올랐다.
뭐가 그렇게 미안해, 엄마.
‘어머니, 나 이제 이런 집에서 이렇게 맛있는 김밥 먹어요. 나만……. 어머니한테 한 번도 못 사 드린 건데…….’
엄마,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전은주는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김밥을 싸던 비닐을 벗은 그녀가 조리대를 돌아와 정지우를 안고 다독였다.
“괜찮아, 지우야.”
박용근과 유정호가 못 본 척 움직이지 않는 것이 고마웠다.
TV에서 들려오는 경기 소리와 전은주의 다독이는 말을 들으며 잠시 시간이 흘렀다.
“죄송해요.”
“얘는. 미안할 게 뭐 있니?”
빨갛게 변한 전은주의 눈을 바라보며 둘이 어색하게 웃었다.
언젠간 이 김밥을 웃으며 먹을 날이 있을 거다. 어머니도 그걸 바랄 테니까.
“여보! 얼른 와! 여기서 이렇게 먹자.”
“어? 그럴까?”
전은주만큼이나 어색한 얼굴로 박용근과 유정호가 다가왔다.
뜨거운 사골 국물과 함께 김치를 앞에 두고 먹는 김밥이라니. 어제 점심까지 상상도 못하던 메뉴였다.
띵동! 띵동!
어딜 너희만!
마치 그런 느낌으로 벨이 울렸고, 유정호가 열어 준 문을 통해 마틴과 바튼이 들어섰다.
“이쪽으로 오세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에요.”
“우린 식사했네.”
“그래도 한번 도전해 보세요. 맛은 제가 장담합니다.”
마틴과 바튼이 최소한의 예의라는 투로 다가와 포크로 김밥을 찍어 입에 가져갔다.
“오!”
점심을 먹기는 먹었나?
마틴이 세 줄, 바튼은 네 줄 반이나 김밥을 해치웠다.
“이 수프는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이군. 이걸 뭐라고 부르나? 영국에서 이런 메뉴를 판매한다면 나는 매일 이걸 사 먹을 거라고 확신하네.”
마틴이 사골 국물 위에 띄운 파를 입에 넣으며 던진 질문이었다.
“Spring onion인데, 영국에서 재배한 건 조금 다른 맛이 납니다.”
결국, 마틴은 사골 국 한 그릇을 수저로 다 떠먹었다.
다 같이 만족한 가운데 소파에 앉았다.
배가 불러서 그런지,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자료를 검토 중이었습니다.”
“그렇군. 그렇지 않아도 다음 주에 있을 경기 때문에 자네와 의논할 것이 있어서 잠시 들렀는데…….”
마틴이 박용근을 슬쩍 보며 그와 함께 보았냐는 투의 시선을 던졌다.
“감독님도 보셨어요.”
“그렇다면 혹시 조언을 들을 수가 있을까?”
정지우는 마틴 감독의 의견을 박용근에게 그대로 전해 주었다.
솔직히 마틴의 표정에 ‘너의 스승이라는 분의 실력을 보자.’라는 느낌이 담긴 것 같아서 기분은 별로였다.
서양인들 특유의 사고방식이라서 사실 트집 잡을 건 아니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인정,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확인되지 않은 주변 사람을 함께 인정해 주지는 않는다는 거다.
“한 번 본 내가 뭘 알겠냐?”
박용근은 넉넉한 대꾸와 웃음으로 마틴의 청을 받았다.
“그렇지만 뉴캐슬이 힘으로 나올 거라는 것과,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포메이션으로는 이기기 어렵다는 것 정도는 알 것 같다.”
바튼까지 시선을 집중하며 지켜보는 앞이었다.
정지우가 말을 전달하자 마틴은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바란다고 전해 주겠나?’라고 청했다.
“이런 영상들을 상대 팀도 다 가지고 있겠지요?”
“그렇소.”
“그렇다면 유니온 시티가 지금처럼 수비 라인을 극단적으로 올릴 거라는 것과 중심에 선 두 선수, 데이빗? 그리고 꼼빠니를 중심으로 패스를 풀어낼 거라는 걸 상대 팀도 알겠지요?”
“그야 그렇지요.”
정지우가 말을 전하는 딱 그만큼 거실의 분위기는 진지해지고 있었다.
“유니온 시티는 그 두 선수가 막힐 때 풀어낼 다른 선수가 없어 보입니다. 내가 뉴캐슬의 감독이라면 무싸 씨소코와 심데종 저 두 선수를 선발로 내세울 겁니다.”
“이유는요?”
“무싸가 데이빗을 묶고, 심데종이 꼼빠니를 붙들면 유니온 시티는 공을 제대로 뿌리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렇다고 레믹이라는 선수가 뉴캐슬의 수비수들과의 몸싸움을 이기기도 어려워 보이고.”
“흐음!”
마틴이 짙게 한숨을 내쉬어서 분위기가 짙게 가라앉았다.
“미안한 표현이지만, 앞의 세 경기는 골키퍼의 활약이 절대적인 경기였습니다. 그러니 지우가 빠진 뉴캐슬전은 그만큼 승률이 떨어지게 되지요.”
낯간지러운 말이었지만, 박용근의 의견이었다. 정지우는 진지한 얼굴로 마틴에게 박용근의 말을 전해 주었다.
“짧은 순간이었는데 대단한 분석이었다고 전해 주게. 솔직히 나의 예상과 같아서 놀랐다는 점과, 혹시 떠오르는 전술이 있다면 듣고 싶다고도 말해 주고.”
정지우의 말을 들은 박용근이 어색하게 웃었다.
“나 같으면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하겠는데.”
그러면서 그는 고개를 갸웃한 뒤에 말을 이었다.
“우선 버스를 골대 앞에 세우고.”
극단적인 수비 전술을 빗대는 말이었다.
골키퍼를 제외한 선수 10명이 모두 골대 앞에 몰려 있는 것이, 골대를 버스로 막아 놓은 것과 같다고 해서 생긴 표현이었다.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쓰리백을 사용하겠다.”
“쓰리백이요?”
정지우의 반문 덕분에 마틴과 버튼도 바로 쓰리백이란 용어를 알아들은 눈치였다.
“마지막 경기에서 뛰었던 덩치 큰 흑인 수비수를 중심에 세우고.”
무둔바를 말한 게 분명한 박용근이 탁자에 놓인 자료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기, 라파엘! 이 친구가 왼편을 맡고, 오른편을 카알이 맡는 거지.”
“그 앞은 어떻게 세울지도 물어봐 주게.”
말을 전해 들은 마틴이 정지우를 재촉하는 것처럼 바람을 전했다.
“왼편 미드필더로 스웰던? 이 거친 친구를 세우고, 중앙에 데이빗, 꼼빠니를 바로 붙여 세워. 그리고 두 명을 그 옆으로 더 세워 주면 전체적으로 고전적인 3-5-2 포메이션이 나온다. 이 정도면 해 볼 만할 거다.”
“흐흠.”
마틴이 다시 고민 가득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판 승부에는 변수가 많다. 이변이 많이 일어나지. 스웰던이 몸싸움으로 데이빗을 지켜 주는 거야. 뒤에서는 무둔바? 이 친구가 몸싸움을 버텨 주고.”
“세 가지라고 하신 것 중에 나머지 한 가지는 뭐냐고 묻는데요?”
정지우가 마틴과 이야기를 마친 뒤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네가 서브로 있다가 후반 중간에 몸을 푸는 척 나가는 거다.”
“예?”
정지우와 유정호가 놀라는 것을 본 마틴이 얼른 전달해 줄 것을 재촉하는 듯 시선을 던졌다.
“무승부라면 아쉬운 쪽은 아무래도 뉴캐슬이 되겠지. 유니온 시티야 어차피 승격이 확정되었으니 급할 게 없는데, 저쪽은 리그 성적을 계산해야 하니까. 게다가 FA컵에 목을 맨 분위기인데 무승부라면 피곤한 일이잖냐.”
박용근의 말을 전해 들은 마틴이 놀라는 눈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후반까지 0 대 0을 유지할 때 네가 몸을 풀면 유니온 시티가 비기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는 의미가 되지. 저들이 좀 더 공격적으로 나올 때 뒤를 노린다.”
“감독님, 힘과 속도에서 밀리는데 라인을 올리지 않은 상태에서 밀어붙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변하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어설프게 공격하겠다고 나섰다가 얻어맞으면 내내 버텨서 비기느니만 못한 꼴이 된다.
정지우는 말을 전하기 전에 먼저 질문을 던졌다.
고개를 끄덕인 박용근이 마틴을 힐끔 본 뒤에 입을 열었다.
“3-5-2 포메이션은 요즘은 잘 쓰지 않는다. 이유는 양쪽 측면 공격을 하기 불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변형된 전술을 사용하려고 할 때 굉장히 불리하지.”
박용근이 볼펜으로 전술지에 X 자 표시를 하며 포메이션을 설명했다.
“대신 뉴캐슬이 패스 미스가 잦다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면 어떨까 싶다. 미드필더에서 견디고, 저들의 패스 미스를 이용해 최대한 빠르게 기습을 노리는 정도?”
박용근이 3-2-4-1과 3-2-5의 두 가지 포메이션을 전술판에 그렸다.
“이런 식으로 빠르게 변화하면 데이빗과 꼼빠니가 잡혀도 충분히 공격해 볼 만하지. 대신 공격에 실패하더라도 반드시 슈팅을 날려서 공을 아웃시킬 수 있어야 하지.”
박용근의 설명을 들으며 마틴은 전술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3-2-5일 때 2의 자리에 누가 남는 게 좋은지 물어봐 주게.”
“뉴캐슬이 데이빗과 꼼빠니를 잡으려 들면 스웰던과 멜스가 올라가고, 만약 그 둘을 놓는다면 당연히 그 둘이 올라가야지.”
“그 판단은?”
“주장인 데이빗이 지휘하는 게 중요한데, 아무튼 일주일 만에 선수들이 이 포메이션을 얼마나 익숙하게 몸에 익힐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지우가 바쁘게 두 사람의 대화를 이어 준 다음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마틴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박 감독님이 코칭 라이센스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봐 주겠나? 실례가 될지 모르니 미리 양해를 구해 주게.”
질문을 들은 박용근이 넉넉한 표정으로 답을 했다.
“1급 지도자 라인센스다. 우리나라 1급은 AFC 공인 자격이고, 국가대표 감독 자격이 있는 거지.”
답을 들은 마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내일부터 이틀간 있을 전술 훈련에 조언을 해 줄 수 있는지를 부탁해 주게. 물론 방문 비자이고, 협회에 등록이 되지 않아서 관중석에서 봐주셔야 하지.”
“코치, 그런 요구는 감독님께 결례인 것 같은데요?”
“그렇게 되나?”
마틴의 아쉽고 곤란해하는 표정을 본 박용근이 대화 내용을 물었다.
“괜찮다.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전해 다오.”
박용근의 말을 들은 마틴이 감격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고맙다는 영어를 직접 건넸다.
“내일 오전 10시에 레드 블레이트에서 뵙는 것으로 하지. 바튼이 모시면 되겠지?”
대강 이야기가 끝났다.
마틴이 일어나 전은주에게까지 인사를 전하고 돌아갔다. 김밥과 사골 국이 어지간히 맛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지우는 박용근, 유정호와 함께 자료를 좀 더 검토했다.
경기 영상과 서면 자료들을 확인하는 박용근은 분명 생기 넘치는 눈빛과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축구와 함께 있고 싶은 양반을 어린이 축구 교실에서조차 밀어낸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분했다.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 박용근은 소파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사이 전은주는 비닐 팩에 담긴 보약을 정지우에게 건네주었다.
“감독님은요?”
“어! 난 살쪄서 안 돼. 얼른 마셔.”
입맛을 다시는 유정호에게 미안했지만, 전은주에게 더 달라기도 그랬다.
약을 마신 정지우가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할 때였다. 전은주가 홍삼 진액이 담긴 기다란 봉지 4개를 꺼냈다.
만족한 유정호와 신기한 얼굴인 바튼, 그리고 정지우와 박용근이 사탕을 먹는 아이들처럼 그걸 입에 물고 먹었다.
하루를 보내며 몇 번이고 신기하다는 느낌이 드는 날이었다. 심지어 내일 함께 레드 블레이트로 가기로 한 것까지.
그것도 전술 훈련을 돕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