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그러니까 내일 출발하자. (2)
달칵.
문을 열었을 때 현관 앞에 네 사람이 서 있었다.
가장 앞에 바튼, 그 뒤로 유정호, 그다음으로 마틴과 클락.
“좋은 아침이야.”
좋은 아침? 웃음이 피식 나오는 아침이다.
“들어오세요.”
정지우는 문을 열고 몸을 한쪽으로 비켜섰다.
서양 놈들은 어지간한 사이에서는 들어오라고 해야 들어오고, 앉으라고 해야 앉는다.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클락은 사과 상자 반만 한 크기의 종이 박스를 들고 있었다.
“앉으시죠.”
정지우가 소파를 가리키는 동안 유정호가 거실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Ji, 커피? 홍차?”
“나는 물 마실게.”
바튼의 질문에 답을 한 정지우가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마틴은 홍차, 유정호와 클락은 커피를 선택했다.
“형은 어떻게 된 거야?”
“그게 아무래도 당한 느낌인데?”
한국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정호가 눈짓으로 마틴과 클락을 가리키기까지 했다.
한국말로 주고받은 대화의 뜻을 눈치챈 것처럼 마틴이 화제를 바꾸었다.
“집은 마음에 드나?”
“지내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어쩌면 건방진 답일 수도 있는데 마틴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이었다.
“일단 여기 자료들을 좀 보게.”
그러면서 그는 위쪽이 벌려져 있는 종이 박스를 가리켰다.
“프리미어리그 소속팀의 경기 영상들과 이번에 FA컵 준결승과 결승에서 상대해야 할 팀들의 분석 자료들이다.”
정지우가 박스 안을 바라보았을 때 바튼이 머그잔 3개와 홍차 잔 하나, 그리고 물병 하나를 가져왔다.
고작 자료를 좀 더 일찍 주기 위해서 유정호까지 동반해서 새벽같이 나타나지는 않았을 거다. 정지우는 일단 물을 마시며 누구든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자네의 스승인 박용근 감독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네.”
그러자 홍차로 입을 적신 마틴은 어제 쥬피터와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있는 대로 전해 주었다. 클락과 바튼이 있는데도 말이다.
“박 감독 부부의 인적 사항이 필요해서 내가 미스터 유에게 부탁했다. 계획했던 것이 있어서 미스터 유에게는 아침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
그랬구나 하는 표정으로 유정호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이었다.
“미스터 유, 비밀로 한 점과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선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Ji에게 서프라이즈 파티를 해 주려고 했는데, 미스터 유가 아침 일찍 달려오는 것을 보고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뭔 놈의 서프라이즈 파티가 아침 일찍 자는 놈을 깨워서는 말로 다 하는 건지.
아무튼, 놀라긴 했다.
“그럼 감독님은요?”
“오늘 오후 3시에 도착하는 비행기 안에 계실 거다. 에스코트를 위해 간 직원이 알려 주었다.”
어이가 없어서인지 웃음이 나왔다.
정지우는 시선을 다시 유정호에게 돌렸다.
“형은 코치와 어떻게 만난 거야?”
“여기 주소를 몰라서 구단에 연락했지.”
“그러네.”
그건 또 그렇다.
“Ji, 내가 너무 독단적이었다. 그 점에 대해 정식으로 사과한다.”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야, 인마! 내가 너 좋으라고 한 거지, 나 덕 보려고 한 거냐!’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차피 오후 3시에 도착할 마당에 다른 말을 해서 뭐하겠나.
“괜찮습니다. 좋은 의도에서 해 주신 일인데요.”
“이해해 줘서 고맙네.”
아침 일찍 들이닥칠 수밖에 없던 사연이 밝혀지며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괜찮다면 다 함께 먹을 수 있도록 아침을 준비할까 합니다.”
“그런 것도 해?”
“전담 매니저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바튼이 웃으며 식탁으로 움직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 씻고 나올게요.”
“자네 집에 우리가 무례하게 들이닥친 걸세. 편한 대로 해.”
홑이불을 들고 침실로 향하는 정지우를 따라 유정호가 쪼르르 침실로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그는 거실을 볼 때처럼 침실을 두리번거렸다.
“부상 때문에 2주 아웃 판정받고, 그다음 날 이렇게 된 거야. 밖에 바튼도 그렇고. 안 그래도 오늘쯤 형에게 전화하려고 했었어.”
“그랬구나.”
“형에게 바로 연락 못해서 미안해.”
“나쁜 일 아니면 됐어.”
유정호가 어딘가 서운해하는 느낌이었는데, 이런 건 살면서 풀린다.
“얼른 씻고 나와.”
“그럴게.”
유정호가 밖으로 나간 후, 정지우는 샤워실로 들어갔다.
감독님과 사모님이 오신다고?
마음이 이상하게 급해졌다.
몸은 편안한데 마음이 불편한 비행.
박용근과 전은주의 영국행이 꼭 그랬다.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음식을 준비한 전은주와 옆에서 거든 박용근은 6시간 정도를 푹 자고 일어났다.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
승무원이 상냥한 웃음과 함께 두 사람의 식사를 챙겨 주었는데, 상상하던 비행과 너무 달라서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정지우의 입지가 이렇게나 올라갔다는 건지, 아니라면 다른 뜻이 있는 건지는 알기 어려웠는데, 아무튼 비행은 그랬다.
11시간이 조금 넘는 비행이 런던에 도착하며 끝났다.
언제 또 일등석을 타 보겠나?
이런 고급스러운 자리에 조금 더 있고 싶은 묘한 욕심과 빨리 정지우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하는 도착이었다.
키가 커다란 영국인이 짐을 찾아 카트에 실어 주었는데, 박용근의 몸집만 한 가방만 2개였다.
하나는 음식, 다른 하나는 급하게 준비한 보약과 근육과 뼈에 좋다는 사골을 드라이아이스에 잔뜩 담았다.
사골 때문에 통관에 꽤 시간이 걸렸는데, 함께 온 영국 직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박용근과 전은주는 절대 통과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This way please.”
안내원을 보내려면 적어도 한국말을 좀 할 줄 아는 사람을 보내는 게 예의가 아닐까?
어색한 표정의 박용근이 전은주와 함께 안내원이 가리킨 방향으로 움직였다.
문을 통과해 입국장으로 나섰을 때였다.
“감독님!”
정지우가 손을 높이 들며 박용근을 불렀다.
저 녀석이 어떻게?
어떻게 저렇게 반가운 얼굴로 이곳에 서 있는 거지?
박용근은 마술 피리에 끌려가는 아이처럼 정지우를 향해 걸었다.
전은주 역시 비슷한 얼굴로 그 뒤를 걷고 있었다.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하는 정지우다.
“먼 길 오셨어요.”
“자네는 언제 도착했어?”
옆에서 함께 고개를 숙이는 유정호에게 간단하게 답례를 한 박용근은 가장 먼저 제자의 얼굴부터 다리까지를 살폈다.
“사모님, 많이 힘드셨죠?”
“지우야?”
정지우는 손을 뻗어 전은주의 손을 잡았다.
꽃집을 해서 거칠고 투박한 손이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손이기도 했다.
“몸은?”
“와 주신다는 말씀 들은 후부터 완전히 좋아졌어요.”
전은주의 질문에 답을 한 직후였다.
“무리하면 안 돼.”
“정말 괜찮아요, 감독님. 참! 그리고 여기 인사하세요. 이분이 유니온 시티 마틴 감독님이세요.”
정지우는 박용근에게 마틴을 소개했다.
“안뇽하세요?”
“아, 예. 안녕하세요?”
마틴이 어색한 한국말로 박용근, 전은주와 인사를 나눴고, 다음으로 바튼이 인사를 마치고 나서 일행은 공항을 빠져나왔다.
박용근은 정지우가 걷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감독님, 저 정말 괜찮아요.”
“정말이지?”
“예. 제 상태를 오해해서 정호 형에게 연락했고, 감독님께도 연락드렸던 모양이에요. 솔직히 한국 다녀와서 두 분 뵙고 싶어서 좀 우울했던 것도 있구요.”
“이 녀석아, 그럼 전화를 하지. 굳이 이렇게가 아니더라도 왔었을 텐데.”
“죄송해요.”
주차장까지 걷는 동안, 박용근은 확실히 마음이 놓이는 얼굴이었다.
2시간쯤 걸려서 정지우의 새로운 집에 도착했다.
짐을 안으로 내려놓았고, 다 함께 둘러앉았다.
마틴은 걱정을 끼친 점에 대해 박용근에게 정중하게 사과했고, 쥬피터 회장이 일방적인 인터뷰로 곤란하게 한 점에 대해 사과한다는 말도 전했다.
물론 정지우를 통해서였다.
“쥬피터 회장이 사과하는 자리를 마련한다고 하네요.”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말씀드려.”
“예.”
정지우의 말을 전해 들은 마틴이 쥬피터와 의논하겠다는 답을 다시 전했다.
“레드 블레이트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괜찮으십니까?”
“그런 거라면 제가 부탁드리고 싶었던 일입니다.”
몇 마디를 더 나눈 뒤에 마틴이 먼저 일어났고, 집을 나섰다.
“우선 좀 쉬세요, 감독님.”
“비행기에서 푹 잤다. 여기가 지금 몇 시쯤이냐?”
“오후 5시요.”
“느낌하고 시간이 전혀 안 맞는구나.”
깔끔한 복장이긴 했는데 평소 박용근과 전은주를 아는 정지우가 볼 때, 두 사람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 필요가 있었다. 정지우는 1층에 별도로 있는 방으로 박용근과 전은주를 안내했다.
“뭐가 이렇게 커?”
“저도 어리둥절해요. 자꾸만 제집 같지 않아서 어제는 사실 소파에서 잤어요.”
뒤통수를 만지는 정지우를 보며 박용근과 전은주가 함께 웃었다.
영국에서 이렇게 함께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피곤하시면 한숨 주무셔도 돼요. 그리고 저 문이 욕실이에요.”
“우선 옷 갈아입고 나가마.”
“예.”
정지우는 거실로 나섰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두 사람과 함께 집을 둘러보았다.
그런 다음, 전은주는 커다란 들통을 꺼내 사골을 끓이기 시작했고, 반찬들을 정리했다.
바튼이 딱 붙어서 시중을 들었는데, 유정호가 통역을 맡았다.
정지우는 박용근과 식탁에 앉아 마틴과 전술적인 부분까지 의논하기로 했던 이야기들을 전했다. 주방 앞이라 전은주는 물론이고, 유정호까지 듣는데 문제는 없었다.
“저기 소파 앞에 있는 것들이 그래서 받은 자료들이에요.”
“흠, 네가 그런 면에서는 충분히 능력이 있지.”
박용근의 칭찬을 듣자 어쩐지 뒤통수가 가려운 느낌이었다.
상상이나 했었나?
영국의 새로운 집에서 박용근, 전은주, 유정호와 함께 있는 것 말이다.
들통에서 나는 냄새, 반찬 냄새, 그리고 돼지 불고기 냄새.
바튼이 가끔 냄새에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는데, 영국에 처음 도착해서 음식을 보았던 정지우도 그랬었으니까, 뭐.
“식사하세요.”
돕겠다는 정지우를 꼼짝도 못하게 한 전은주가 사골 국물을 정지우의 옆에 놓아 주었다.
“지우야, 이건 그냥 초벌이라 아직 우러나지 못했어. 내일이면 제대로 될 테니까 지금은 냄새가 좀 나더라도 참고 먹어.”
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잘 먹겠습니다.”
비행에 피곤한 두 사람과 식욕에 불이 당겨진 유정호, 감동한 정지우, 모든 것이 신기한 영국인 바튼, 5명이 식사를 시작했다.
“오우! 굉장히 맵네요! 그렇더라도 정말 환상적이에요!”
빨갛게 무친 돼지 불고기를 먹으며 바튼이 연신 감탄을 쏟아 냈다.
바튼의 표현대로 환상적인 저녁이었다.
정리를 마친 후, 바튼이 돌아가고 넷이서 소파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아침이 훌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편히 주무세요.’와 ‘안녕히 주무셨어요?’라는 인사를 나누는 것, 퉁퉁 부은 박용근의 눈을 보며 전은주와 함께 웃는 것, 그리고 유정호까지 넷이서 밥을 먹는 것이 무척이나 행복했다.
때마침 김문호 감독이 전화를 걸었을 때, 생전 그런 모습이 없던 박용근이 ‘아, 이 녀석이 일등석을 끊어 주는 바람에 안식구랑 지금 영국에 있잖아. 집이 얼마나 큰지 길 잃어버리겠어.’ 하는 말을 할 때는 다 같이 웃음을 참기도 했었다.
바튼이 와서 관광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전은주가 밤새 신경 쓰던 사골을 끓여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정지우는 박용근, 유정호와 함께 소파에 앉았다. 세 사람의 관심이 축구 말고 더 있겠나.
일단 박스를 뒤져서 FA컵 준결승 상대인 뉴캐슬의 영상들을 순서대로 보았다.
화면이 워낙 커서 마치 경기장에 있는 느낌이었다.
“정말 빠르구나.”
“예. 어떨 때는 농구나 핸드볼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요.”
박용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에 집중했다.
“중계방송을 볼 때도 느꼈었지만, 저렇게까지 손을 쓰는데 그걸 몸싸움으로 인정하는 것도 신기하다.”
“주심에 따라 다르긴 한데요, 영국 리그는 힘과 속도를 갖추지 못하면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도 적응하기 어려운 곳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인지 주심 중에 동양인 선수에게 편견을 가진 이들도 좀 있구요.”
박용근이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는 느낌을 담고 정지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동양 선수들은 작은 몸싸움에도 파울을 바라고 쓰러진다는 생각 같은 거예요. 거기에 이곳에선 주심에게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을 말하는 게 자연스럽거든요.”
박용근은 반쯤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억울한 상황에서도 말을 제대로 못하니까 항의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곤 하거든요. 그걸 주심들은 선수가 자신의 판정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으흠.”
박용근은 이제야 완벽하게 이해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항의하는 것에도 차별이 조금은 있어요.”
“그거야 자국 리그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감당해야지.”
“예.”
정지우가 답을 한 직후였다.
“감독님, 말은 이렇게 해도요, 지우는 그냥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유정호가 이르는 것처럼 박용근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누구 제자인데 그냥 물러나?”
“예?”
그러나 박용근의 대꾸에 놀란 얼굴을 했고, 셋이서 함께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