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85화 (85/262)

제6장. Go Wembley! (1)

평소 그리워하던 사람과 한집에서 일어나 아침 인사를 나누는 행복이라니.

레드 블레이트는 차로 고작 20분 거리다. 그런데도 바튼은 오전 8시에 찾아와서는 식탁을 기웃거렸다. 돼지 불고기와 김밥 이후로 확실히 한국 음식에 매료된 것이 분명했다.

“식사 안 했으면 이리 와.”

“고맙습니다.”

배고픈 영국 놈을 포함해 5명이 행복하게 아침을 먹었다. 이어서 보약과 홍삼 진액을 순서대로 먹었다. 홍삼 진액을 먹으며 바튼은 좀 더 행복한 얼굴이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지우야. 다치지 않게 조심해.”

“다녀올게.”

“응, 여보. 수고해.”

전은주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9시 45분쯤 레드 블레이트에 도착한 정지우는 박용근, 유정호와 함께 곧바로 마틴의 사무실로 향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서 오세요.”

마틴은 박용근을 정중하게 맞이했다.

“차를 드시겠습니까?”

“집에서 마시고 왔습니다. 괜찮다면 그라운드를 한번 살펴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물론 정지우의 통역을 통해 나눈 대화였다.

마틴이 앞에 서서 박용근을 안내했다.

터널을 지나 그라운드로 나섰을 때, 선수들이 편안한 복장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Ji!”

멀리서 손을 드는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박용근은 천천히 잔디를 살폈다. 유정호와 바튼은 그라운드 바깥에서 그를 지키는 것처럼 서 있었다.

삐이이익!

마틴이 휘슬을 불어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박용근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마틴이, 왼편에 정지우가 섰고, 그 앞으로 선수들이 둥그렇게 모였다.

“여러분께 굉장한 분을 소개할 수 있게 돼서 기쁘게 생각한다. 이분은 우리의 동료, Ji를 지금의 골키퍼로 성장시킨 스승으로…….”

마틴이 마스터란 표현을 사용하자, 선수들이 놀랐다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 뒤에 다시 박용근에게 시선을 주었다.

“Ji의 표현으로 그에게는 부모와 다를 바 없는 분이라고 한다. 여러분에게 한국에서 어제 오신 Ji의 부모 같은 스승, 박용근 감독을 소개하겠다.”

마틴이 손을 뻗어 박용근을 가리키자,

짝짝짝짝짝짝짝짝짝.

휘이이익!

다들 박수로 박용근을 환영했는데, 손을 모아 휘파람을 부는 레믹 같은 놈도 있었다.

하여간 서양 놈들이 이런 소개 하나는 끝내준다.

박용근이 좌우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만나서 반갑다고 전해 다오.”

정지우가 얼른 박용근의 말을 동료들에게 전한 것으로 대충 인사가 끝났다.

“그럼 저희는 위에서 관람하고 있겠습니다.”

마틴에게 말을 전한 후, 박용근은 정지우와 함께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정지우와 박용근의 좌우로 바튼과 유정호가 함께 자리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라운드의 잔디 상태가 정말 부럽구나.”

“예. 관리도 그렇지만, 경기 외에 다른 행사가 전혀 없어서 잔디가 받는 스트레스가 훨씬 덜해서 그럴 거예요.”

“환경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을 거다.”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마틴은 선수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전술 훈련을 시작했다.

스탠드에 앉은 박용근은 허벅지에 수첩을 올려놓고 참고해야 할 점들을 하나씩 적어 나갔다.

“저 상황에서는 저기 23번 선수가 15번 선수의 뒤로 돌아가는 게 훨씬 효과가 있을 텐데, 왜 안쪽으로 들어가지? 원래 저 선수 속도가 저 정도인 거냐?”

박용근이 멜스를 가리키며 질문을 던졌다.

공격하는 선수가 공을 잡은 선수보다 바깥을 달리면, 상대 수비는 아무래도 간격을 넓히게 된다. 그때 수비수 사이를 찌르는 패스를 넣을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찬스를 잡게 되는 거다.

20분 정도 경기를 뛴 선수들이 그라운드 중앙에 모여서 마틴과 전술에 대해 의논했다.

감독도, 선수도 원하는 바와 궁금한 것들을 묻고 답한다.

이렇게 충분히 의견을 교환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때문에 경기에서 엉뚱한 짓을 한 선수가 감독에게 질책을 받는 것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박용근이 저렇게 가르쳐서 다른 학교도 다 그런 줄 알았었다. 그런데 대회에 나가서 보았던 다른 팀들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하프 타임 때 선수들을 둥글게 세워 놓고 뺨을 때린다.

심지어는 ‘퍽퍽’ 소리가 나도록 주먹으로 볼을 때리는 코치들도 있었다.

웃긴 건 그렇게 맞은 선수들이 후반에는 이를 악물고 뛴다는 거다. 물론 그런 팀이 4강에 든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말이다.

그런 걸 보면, 선수들이 잘하라는 뜻이 아니라 코치들이 한계를 느낄 때마다 폭력으로 해결하려던 걸 거다.

그렇게 맞으면서 축구를 한 선수들이 다시 코치가 되고, 감독이 된다.

세계적인 추세? 전술의 변화? 기술 습득의 중요성?

즐기는 축구를 통한 창의적인 패스와 기술, 슈팅 습득?

쭉 세워 놓고 볼을 주먹으로 때리면 당장 성적이 나오는데, 어떤 코치가 머리 아프고 당장 효과 안 나오는 토론을 하겠나.

선수도 마찬가지다.

엉뚱한 짓을 했다간 바로 볼을 맞는 판국에, 맞을 때 쾌감을 느끼는 놈이 아니고서야 안 하던 기술을 시도할 이유도 없는 거다.

10분쯤 휴식을 취한 선수들이 다시 후반을 시작했다.

“뛰는 라인이 너무 고정되어 있어. 이 정도라면 서너 게임만 지나도 상대 팀은 장단점을 모두 알게 되지. 이럴 때 느닷없이 다른 라인을 사용하면 상당한 효과가 있겠다.”

박용근의 말을 들으며 정지우는 고등학교 시절이 떠올라 입가에 웃음을 그려 냈다.

“너, 학교 다닐 때 애들 많이 때렸었냐?”

“제가요?”

박용근의 질문에 유정호가 상체를 기울이며 관심을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 왜 네 별명이 부천 일 번 개가 돼?”

듣고 있던 유정호가 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박용근의 별명이 떠올라서인 게 분명했다.

“그보다는 동기 애들에게 워낙 뭐라고 해서 그럴 거예요. 그리고 상대 팀 고학년 애들이 우리 애들한테 뭐라고 할 때 맞받아친 것도 있구요.”

박용근이 ‘어쭈?’ 하는 눈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좋았다.

늦은 봄, 맑은 영국 날씨에 함께 스탠드에 앉아서 이렇게 축구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지난날을 돌이켜 본다는 것이 말이다.

후반 전술 훈련이 끝났다.

정지우는 박용근, 유정호, 마틴, 바튼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가 함께 식사를 했다.

데이빗과 동료들이 다가와 박용근과 개별적인 인사를 하느라 식사 시간이 좀 어수선하긴 했는데, 평소에도 어수선한 구석이 있는 놈들이니까.

점심을 먹고 난 후에 마틴의 사무실에서 박용근이 메모한 것들을 바탕으로 전술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당연하게 정지우가 통역을 맡았는데, 간단할 줄 알았던 대화가 3시간이나 걸렸다.

“흠, 내일 한 번 더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지요. 오전 10시면 될까요?”

“고맙습니다, 마스터.”

박용근에게 감사를 표한 마틴이 바로 말을 이었다.

“내일 저녁에 쥬피터 회장이 두 분께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는데, 어떠신지 물어봐 주겠나? 물론 자네도 함께하는 자리다.”

잠시 고민한 박용근은 그러겠다고 답을 했다.

“유 대표와 함께 가도 되는지 확인해 봐라. 혼자 집에서 밥 먹으라면 그것도 좀 그렇다.”

박용근의 요청을 전하자 마틴이 쥬피터와 의논해서 답을 주기로 했다.

다음 날도 오전 일정은 비슷했다.

전술 훈련을 지켜보았고, 함께 점심을 먹었으며, 마틴과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에 집에 돌아온 정지우는 박용근, 전은주, 유정호와 함께 쥬피터가 마련한 저녁 자리에 참석했다.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쥬피터가 꺼낸 화제는 시종일관 정지우에 대한 호감과 박용근의 경력이었다.

‘뭔가 있는데?’

정지우가 보기에 그랬다.

그러나 통역을 해야 했고, 이런 자리가 불편할 박용근과 전은주를 배려하느라 더는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이틀 정도, 영국에 온 이후로 정지우 역시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런던과 주변의 관광지를 돌아다녔다. 완벽하게 가이드 모드로 변신한 바튼이 운전은 물론이고 꼭 보아야 할 곳, 먹어야 할 것들을 추천해 주었다.

“감독님! 사모님과 두 분이 서 보세요.”

“아냐, 지우야. 너도 얼른 와.”

“먼저 한 장 찍구요.”

그렇게 박용근, 전은주와 함께 사진도 찍었다.

이제는 어쩐지 작아진 듯한 박용근과 작지만 늘 의지가 되어 준 전은주 사이에서 말이다.

유정호를 불러서 넷이서, 다시 정지우와 유정호 둘이서, 바튼과 셋이서 돌아가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뭐라고 해도 집이 가장 편하다.

“발은 좀 어떠냐?”

소파에 주저앉은 박용근이 정지우의 다리로 시선을 주었다. 공연히 돌아다니다가 부상이 심해진 것은 아닌지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경기에 나가도 되지 않을까 싶은 정도예요.”

정강이 부위를 만져 보며 정지우는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다행이다. 혹시 뭉친 기색이 있으면 바로 말해라.”

빤히 박용근이 주무르겠다는 의미일 거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병원으로 갈게요. 염려하지 마세요.”

집에 막 돌아온 길이다.

피곤할 만도 하련만, 전은주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보약을 먼저 챙겨 주었다. 다음은 당연하게 다 같이 홍삼 진액을 입에 물었다.

바튼이 돌아갔고, 밤에 긴 통화를 하느라 잠이 부족한 유정호가 먼저 2층으로 올라갔다.

시간이 휙휙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이 큰 집이 꽉 찬 느낌이라면 믿을 수 있을까?

영국의 생활이 불편할 박용근과 전은주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정지우는 두 사람이 아예 이곳에서 함께 살았으면 싶었다.

저녁 8시쯤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전은주가 주방에서 무언가를 만들었다.

이틀을 내내 점심과 저녁을 영국 음식으로 먹은 탓에 그렇지 않아도 매콤한 음식이 당기던 참이었다.

“뭐 하세요?”

“떡볶이.”

사는 것이 이렇게 즐겁고 행복해도 되나 싶었다.

***

장진모는 커피 전문점에서 심각한 얼굴로 주성호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햐! 완전히 개새끼들이네.”

장진모가 덜컥 뱉은 욕이었다. 그런데도 주성호는 쓰다, 달다,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형님, 왜 박 감독이나 정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기사에 못 내게 했습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였잖냐. 다 싫었던 거 같다. 거기에 박 감독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던 참이니까 변명하는 것 같기도 했을 거고.”

장진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박 감독은요?”

“이미 지난 일을 잘못 떠벌였다가 제자 앞길을 막지 않을까 염려했던 거 같다. 청소년 국가대표 감독 내정되었던 게 취소될 만큼 협회에 대들었던 양반인데.”

“박 감독이 그 정도 실력은 되나요?”

“그 양반 옛날 경기 화면 한번 찾아서 봐. 나름 천재 소리 듣던 사람이었으니까. 특히나 공간 창출 능력은… 아후! 정말 발군이었다.”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주성호가 입맛을 다셨다.

“그런 박 감독이 협회 라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밀려난 거지. 그런데 그 양반 제자 중 다시 천재적인 골키퍼가 툭 튀어나온 거다. 위에서 보기에 얼마나 미웠겠냐?”

“아! 감동적이긴 한데 또 화가 나네. 그래서 병원비를 미끼로 정지우를 끌어가려다 일이 꼬인 건데, 정지우가 살아난 걸 보자 옛일이 밝혀지기 전에 최선을 다해 덮겠다, 이거잖습니까?”

주성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커피를 모두 털어 넣었다.

“이 정도면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바보 아닙니까?”

“야, 인마! 네 기사 때문에 박용근의 제자들이 축구판에서 살길이 막막해질 수도 있어. 박 감독은 그런 사람이야.”

“아이, 씨! 뭔 사람이 이렇게 진한 감동을 남겨? 가만, 이참에 영국에 정지우 취재나 하러 가 볼까?”

“무슨 명분으로? 그 회사는 그렇게 툭 가겠다고 하면 보내 주냐?”

장진모가 픽 하고 웃었다.

“FA컵 결승에 진출하면 아마 얼른 보내 줄 것 같습니다.”

“너도 좀 그만 설쳐. 너 때문에 우리 대학 후배들은 절대 기자로 안 받는다는 소문도 있다. 여기저기 적만 그렇게 만들었다가 어쩌려고 그래?”

“기자라는 게 원래 이런 거잖습니까? 형님도 그래서 승진 제대로 못하시면서 뭘 그러세요?”

“그래도 너희 부장보다는 내가 낫다. 우리 회사에는 너 같은 꼴통 후배는 없으니까.”

“듣는 꼴통 서운합니다.”

둘이서 잔잔하게 웃은 다음이었다.

“쿠웨이트에 지면 예선 완전히 끝나는데, 형님 보기에 어떻습니까?”

“어렵지 않겠냐? 자기 새끼들만 꼭 끌어안고 버티는 꼴인데?”

“왜들 그러지?”

장진모의 대꾸에 두 사람이 쓰게 웃었다.

“아무튼, 너니까 말해 준 거야. 지우 동의 없이는 기사 쓰지 않겠다는 약속 꼭 지켜.”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염려 마십시오.”

“그래. 그럼 이만 일어나자.”

주성호의 다짐을 끝으로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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