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51화 (51/262)

제1장. 마음을 비워. (3)

다음 날 점심 무렵, 문광국은 파주 NFC에서 실제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1조 주장 안동주와 2조 주장 신준석을 대동하고 테이블에 앉은 그는 전날 저녁 미팅 룸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기자들에게 전했다.

“2조라고 해도 실제로는 2군의 느낌인데 브라질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이번 평가전은 앞으로 우리 축구를 이어 나갈 2조 선수들에게 중요한 자산으로 남을 겁니다. 보기에 답답하실 수 있겠지만, 2조 선수들은 모두 최선을 다해 훈련했고, 브라질이라는 강팀을 상대로 좋은 경기를 펼칠 거라고 믿습니다.”

기자들이 던진 질문에 물 흐르듯 답을 한 문광국이 말끝에 신준석에게 시선을 주었다.

“감독을 맡고 첫 평가전입니다. 선수들뿐만 아니라 감독이라는 직책에 대한 평가도 이뤄질 텐데 조금은 무리한 결정 아닐까 싶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한 말씀 해 주시지요.”

“우리 선수들이 이번 평가전을 통해 경험을 쌓고, 이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결과에 대한 비판은 모두 제가 감수하겠습니다.”

기자들 사이에 가벼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정지우 선수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브라질전에서는 정지우 선수가 골키퍼 선발로 나오는 겁니까?”

“그럴 예정입니다.”

“새롭게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을 맡은 감독으로 훈련을 통해 본 정지우 선수를 평가해 주십시오.”

“음.”

문광국이 단호한 표정으로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선수 개개인에 대한 평가는 감독이 말할 바가 아니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 팀입니다. 어떤 선수가 잘하고 못해서 이기고 지는 팀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으로 지켜봐 주시고 평가해 주셨으면 싶습니다.”

신준석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는 것 같았는데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가 싶은 정도였다.

“안동주 선수, 주장으로 이번 평가전에 임하는 자세가 어떻습니까?”

“감독님을 중심으로 선수들이 하나로 뭉쳐 한 팀을 만들었습니다. 개개인의 능력이 차이 나긴 하지만, 우리 선수 모두 최선을 다해서 축구 팬 여러분이 만족할 수 있는 경기를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바쁘게 노트북의 자판을 두드리던 기자 중에는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도 있었다.

“1군 주장으로 2군 선수들을 평가한다면 어떻습니까? 아! 개인적인 평이 아니라 2군 전체의 수준이나 뭐 이런 것을 묻는 겁니다.”

안동주가 힐끔 문광국을 보았다가 마이크로 입을 가져갔다.

“브라질전에서 후배들의 결과가 좋지 않다면 유고전에서만큼은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월드컵 예선 성적의 결과가 좋지 않았는데요? 이후에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감독님을 중심으로 우리는 한 팀이 되었습니다. 이후의 경기에서는 분명 달라질 거라고 믿습니다.”

기자회견이 대강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신준석 선수! 2군 주장으로 이번 경기에 임하는 자세를 들려주세요.”

기자 한 명이 신준석을 불러서 빤한 질문을 던졌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자들 사이에 잔잔한 웃음이 나왔다.

“긴장을 많이 한 것 같은데 브라질과 같은 강팀과의 평가전에서 주장을 맡게 된 소감은 어떻습니까?”

“어제 자체 청백전이 있었습니다.”

문광국과 안동주가 불안한 눈빛으로 신준석을 바라본 다음이었다.

“브라질이라고 해도 1조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로 1군이 강했다는 뜻인가요?”

기자들이 대놓고 1군과 2군으로 부르고 있었는데 문광국은 굳이 그 점을 정정하지 않고 있었다.

“브라질전을 대비해 더할 수 없이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평가전에 임하는 각오를 부탁합니다.”

“브라질전에서 선수들끼리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신준석이 기자들 앞에서 긴장한 탓이라고 여기는 눈치여서 다른 질문은 없었다.

공식 기자회견이 끝나서 안동주와 신준석이 먼저 들어가고 나자 문광국은 기자들을 1층의 식당으로 안내했다.

“편하게 식사들 하시고 좋은 기사 부탁합니다.”

문광국이 손을 뻗은 곳에 호텔 뷔페식당 부럽지 않은 음식들이 쭉 놓여 있었다.

“문 감독, 같이 먹지?”

친분이 있는 나이 든 기자들이 아까와는 다르게 문광국을 편하게 대했다.

“전술훈련 때문에 들어가야 합니다. 브라질전은 몰라도 유고전만큼은 후련한 경기 보여 드려야지요.”

“그럽시다. 그래도 문 감독이 나서니까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거 월드컵 예선에서 다른 나라 기자들한테 우리가 얼마나 개망신을 당했는지……. 이번엔 잘 부탁합시다.”

기자가 손을 내밀었고, 문광국이 맞잡았다.

***

“어후! 인간들 무섭더라.”

신준석이 정지우의 방에 들어와 고개를 저어 댔다.

“어쩌면 입에 꿀을 발라 놓은 것처럼 그렇게 달달한 말만 줄줄 내는지, 내가 하수라는 걸 새삼 느꼈다.”

말을 마친 신준석이 주길성을 바라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왕 하는 경기인데 이래도 되나 싶다. 솔직히 그날 입장료 내고 먼 길 와서 응원해 주는 분들을 봐서라도 국가대표를 맡은 감독이나 코치들이 이러면 정말 안 되는 건데.”

신준석이 화가 나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렸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이기고 싶다. 그래서 감독이고, 코치고, 돼먹지 않은 선배들 코를 납작하게 해 주고, 응원 와 준 축구 팬들 속을 뜨겁게 만들고 싶다.”

넋두리 같은 신준석의 말을 들으며 정지우는 문득 유니온 시티의 경기를 응원 오는 관중들을 떠올렸다.

질 것이 뻔한 경기에도 경기가 끝날 때까지 목청껏 응원가를 불러 주던 덩치 커다란 영국 남자와 그의 가족들을 말이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에도 그들은 응원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승리하지 못했더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고 퇴장하는 선수들에게 박수를 쳐 주며 목청껏 응원가를 불러 주었다.

“준석아.”

신준석이 왜 그러느냐는 투로 시선을 주었다.

“어차피 오후에 할 일도 없는데 우리 발 한번 맞춰 볼래?”

“너 혹시……?”

“뭐?”

“제대로 해 볼 생각인 거냐?”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주길성에게 시선을 주었다.

“솔직히 내가 생각이 짧았다. 국가대표를 하고, 안 하고 보다 응원해 주는 축구 팬들을 먼저 생각했어야 하는데 하는 꼴들이 짜증 나서 그러지 못했어.”

“그래! 인마! 어떻게 할까?”

정지우는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주었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넌 우선 코치에게 가서 우리끼리 발맞춰 봐도 되냐고 물어봐. 그냥 얼굴도 익힐 겸 보조 구장에서 우리끼리 살살 공이나 차겠다고 하고, 그다음에 애들 의견 물어봐서 하겠다는 놈만 데리고 나가는 거로 하자.”

“그럴 거 뭐 있어? 그냥 다 나오라고 하면 되지.”

“야! 그렇게 하면 유병조나 우리나 다를 게 뭐가 있냐? 그냥 되지도 않는 짓 하는 거니까 그나마 하겠다는 놈들만 나오라고 해.”

“알았다.”

신준석이 급하게 방을 나섰다.

“브라질을 상대로 되겠습니까?”

내내 조용하던 주길성이 두툼한 코를 앞세우고 정지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너는 어떻게 할래?”

정지우가 운동복과 장갑을 챙기며 던진 질문에 ‘나갑니다.’라고 답을 한 주길성이 벌떡 일어나 침대 옆 가방으로 움직였다.

같은 햇살일 텐데 영국에서와는 다른 느낌의 봄날이었다.

신준석이 문광국에게까지 가서 허락을 받은 후에, 선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의견을 물었는데 뜻밖에도 14명 중 13명이 훈련장에 나왔다.

“어제 무리했으니까 회복 훈련이라고 생각하자.”

정지우의 말에 따라서 다들 아는 스트레칭 동작으로 몸을 풀었다. 그리고 이어서 운동장을 가볍게 3바퀴 돌았다.

“후우.”

벤치 근처에 서서 더워진 몸을 다시 한 번 풀 때였다.

“스트레칭하면서 들어.”

정지우가 선수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어제 훈련 제대로 못한 것은 미안하다.”

신준석이 저놈이 왜 저러나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브라질전에서 엉망으로 깨지는 게 우리 선에서 끝날 일이라면 그건 상관없는데, 우리는 프로 선수잖냐. 최소한 경기를 응원해 주는 관중들에게 엉성한 모습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한쪽 다리를 내민 자세로 몸을 풀던 선수들 서너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브라질을 이기겠다는 생각은 뭐? 준석이가 해트트릭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우니까.”

“야! 난 센터백이야! 수비수라고!”

적당한 웃음도 나왔다.

“역습 상황에서 골을 넣는 연습만 몇 개 하자.”

선수들이 서로 시선을 마주친 다음 다시 정지우를 보았다.

“우리 솔직하자. 어차피 우리가 일방적으로 밀릴 경기야. 그러니까 4-4-2 포메이션이라고 가정할 때 2명은 저기 중앙선 부근에 있으라는 거지.”

정지우가 손으로 중앙선을 가리켰다.

“어제 골 넣을 때 달려갔던 두 사람?”

김오영과 이재범이 손을 들었다.

“중앙선 안쪽에서 달려가는 건 오프사이드에 안 걸리잖아.”

“예.”

“너희 두 사람이 공을 배급해. 좌우 윙이 달려가면 그쪽으로 뿌려 줘도 되고. 대신 공을 받은 사람은 무조건 슈팅으로 마무리하는 거다. 오영아, 공 뿌려 주고 너도 달려가는 거 잊지 말고.”

두 사람이 대답은 했는데 믿음은 안 가는 눈치였다.

“자! 몇 번만 해 보자. 거기 3명, 너희가 브라질 팀이라고 하고 저쪽 골대로 가 봐. 한 명은 골키퍼, 다른 2명은 중앙선 안쪽 5미터쯤 서 있어.”

3명이 오른쪽에 보이는 진영으로 움직였다.

“야! 중앙선 쪽으로 좀 더! 더! 그래! 됐어!”

정지우는 나머지 선수들을 이끌고 반대쪽 진영으로 움직였다.

“오영이하고 재범이는 중앙선 안쪽에 붙어서 있어 봐! 오프사이드 안 걸리게!”

둘이서 일단 시키는 대로 해 본다는 모양으로 중앙선 근처로 움직였다.

“준석아! 수비 라인 잡고! 거기 앞쪽 4명! 라인 만들어 봐!”

거리가 멀어져서 정지우의 음성이 점점 더 커졌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당하는 거야! 미드필더 라인 더 내려와!”

앞쪽에 있던 박영길이 4명과 간격을 맞추며 내려왔다.

“봐! 내가 공을 잡으면 무조건 중앙선 너머로 던지거나, 아니면 여기 준석이가 차 줄 거야! 오영이랑 재범이가 역습의 주인공! 그리고 좌우 윙이 지원!”

정지우가 공을 들고 골키퍼 에어리어 앞쪽 끝으로 달려가며 있는 힘껏 던졌다.

휘이익!

엎어지다시피 던진 공은 거짓말처럼 김오영 앞에 떨어졌다.

“우!”

설마 했던 모양인지 선수들 사이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야! 뭐해! 공격했어야지!”

공을 받았던 김오영이 아차 하는 얼굴로 정지우를 보았다.

“다시!”

정지우가 다시 공을 잡자 조금은 분위기가 살아났다.

휘이이익!

이번엔 이재범을 향해 공이 날아갔다.

투욱!

이재범이 공을 앞으로 흘리며 뛰어가자 수비를 맡았던 선수 2명이 형식적으로 움직였다. 방법은 모두 알았으니까 적당히 하자는 의미처럼 보였다.

“준석아, 저쪽 수비를 너하고 길성이가 하는 거로 하자.”

“그래!”

신준석이 주길성과 함께 건너편 진영으로 달려갔다.

“너희 2명은 저쪽으로 가. 이쪽에서 내가 막을게.”

“이 정도면 방법 다 알았는데 굳이 그럴 필요 있습니까? 이 정도 연습 안 해도 다 하는 거잖습니까?”

반대쪽 수비를 맡았던 선수가 답답하다는 것처럼 작은 불만을 털어놓았다.

“브라질을 상대로 이런 게 효과가 있을 것 같지도 않구요. 이렇게 경기해 본 적 있습니까?”

신준석이 정지우를 힐끔 본 다음 시선을 가져왔다.

“야! 이걸로 우리 전국대회 본선 무실점 우승했었어. 그때 골키퍼가 지우야, 정지우! 그때 결승에서 깨진 게 지금 주전 골키퍼 이진용이고! 이거 우습지? 골 들어갈 때 보면 소름 쭉쭉 끼친다.”

질문을 던졌던 선수가 정말인가 할 때 김오영이 다가왔다.

“나 1학년 때 지우 형 3학년이었거든. 그때 우리는 본선 탈락이었는데 경기 구경하러 갔었어. 이거 제대로 먹히면 브라질 한 방 먹일 수 있을 거다.”

“야! 신준석! 거기서 무슨 잡담을 그렇게 오래 해!”

“알았다! 시작해!”

김오영과 이재범이 공격을 준비하고 신준석과 주길성이 막을 자세를 갖추자 분위기가 조금은 더 바뀌었다.

휘이익!

공이 김오영에게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와락! 투욱!

신준석이 김오영을 막아섰고, 주길성은 이재범을 향해 달려들어서 기껏 패스한 공이 중간에 혼자 데굴데굴 굴러갔다.

“사이드에서 지원해 줘야지!”

정지우의 고함이 울리자 양쪽에 있던 선수 2명이 머리를 긁어 댔다.

“팔 빠지겠다! 좀!”

정지우의 이번 고함은 다분히 농담조였다.

전국대회 무실점 우승의 주역, 그리고 이 기습이 대단했었다는 신준석의 말 덕분인지 분위기가 점점 더 올라오고 있었다.

휘이익!

이번엔 이재범에게 공이 날아갔다.

주길성이 달려드는 순간에,

투욱!

이재범은 반대편에서 달리는 선수 앞으로 공을 차 주었다.

김오영, 이재범이 골대로 달려들자, 공을 받은 선수가 페널티 박스 앞으로 다시 공을 패스해 주었다.

그러나 공이 너무 깊숙하게 들어가는 바람에 골키퍼를 맡았던 선수가 먼저 걷어 내고 말았다.

“잘했어! 일단 그런 식이야! 몇 개만 더 해 보자!”

같은 방식으로 다섯 번인가 더 연습한 뒤였다. 선수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벌써 열 번 가까이 공을 던지는 건데도 정지우는 매번 목표했던 선수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퍼엉! 철렁!

“우아!”

이재범이 첫 번째 골을 터트렸다.

연습을 시작하고 30분이 지난 시간이었다.

선수들이 탄성과 함께 박수를 쳐 주자 이재범이 양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잘했어! 몇 개만 더 하자! 이제 수비 라인 잡아서 골만 안 먹으면 브라질 잡을 수 있겠다!”

정지우가 고함을 질렀고,

“가자!”

신준석이 악을 쓰며 답을 했다.

수비 연습의 분위기는 좀 더 달랐다.

“뛰어! 지금!”

정지우가 공을 잡는 순간 센터백 자리로 돌아와 서 있던 신준석이 악을 썼고, 김오영과 이재범, 그리고 양쪽 사이드의 두 선수가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휘이익!

정지우가 페널티 에어리어 끝에서 엎어지며 던져 준 공이 이재범의 앞으로 날아갔다.

투욱!

이재범은 확실히 센스가 있었다.

2명의 수비수가 김오영을 노리자 오른쪽에서 달리던 선수에게 공을 흘려주었다.

퍼엉! 철렁!

“우와!”

또다시 박수가 나왔다.

“이러다가 이거 이기는 거 아냐?”

“마음을 비우라니까.”

“예, 예.”

신준석이 장난기 가득한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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