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50화 (50/262)

제1장. 마음을 비워. (2)

솔직히 ‘결국 일 터지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보니 죄다 2조 선수들이었다.

“뭐야? 너희 안 씻어?”

“인사하고 씻으려구요.”

처음 보는 짧은 머리의 선수가 뒤통수를 만지며 정지우에게 말을 건넸다.

“프랑스 리그에 있습니다. 김오영이고, 24살입니다. 형은 전국 대회에서 본 적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인사가 정지우가 면 티와 짚업 상의를 입는 동안, 찾아온 11명 모두의 순서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그냥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온 겁니다. 그럼 이만 씻으러 가겠습니다.”

김오영이 말을 마칠 때였다.

“뭐야? 이 씨……!”

상황을 오해한 것처럼 방으로 뛰어든 신준석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녀석은 아직 머리조차 제대로 말리지 않아서 물기가 흥건했다.

잠시 설명을 들은 신준석은 ‘야! 너희 치사하게 지우만 챙겨?’ 하며 눈을 흘겼다. 결국 다들 이름과 나이, 소속팀을 다시 알리며 신준석에게도 인사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얼른 가서 씻어. 몸 상한다.”

정지우가 손으로 나가라는 시늉까지 하자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애꿎은 주길성은 그때까지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로 침대 앞에 서 있었다.

“너도 얼른 들어가서 씻어!”

“예.”

녀석은 처음과 달리 무척이나 공손해졌다.

하여간 남자들은 한 다리 위 선배가 제일 지랄 같은데, 주길성은 제대로 임자를 만난 꼴이었다.

“결국, 미친개가 또 한 건 하는구나!”

신준석이 주길성의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베개 옆에 있는 수건을 들어 젖은 머리를 벅벅 닦았다.

휘익!

머리를 다 닦은 신준석이 수건을 다시 베개 옆으로 던졌다.

“우리 맛 간 거겠지?”

“국가대표에 마음 비웠다면서?”

정지우의 질문에 신준석이 주둥이를 삐죽 내밀었다.

“나야 그런데 노인네들이야 어디 그러냐? 혹시나 하고 기대하시지.”

“그렇긴 하겠다.”

정지우가 적당하게 대꾸한 다음이었다.

“야! 나 좀 영국으로 불러 주라.”

신준석이 은근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게 진담인지, 농담인지 한눈에 알기 어려울 정도로 오묘한 표정이었다.

“와.”

“정말? 어떻게?”

“비행기 타고.”

“야! 이 씨……!”

진심이었구나 싶을 만큼 신준석은 실망한 얼굴이었다.

“포르투갈 지겹다. 향수병 걸릴 것도 같고. 그냥 너 보고 나니까 가까이 아는 놈 있어서 시간 날 때 찾아갈 수 있었으면 싶기도 하고.”

저런 심정은 충분히 이해할 만했다.

향수병은 은근 무섭다.

처음엔 음식에서 시작해서 서양 사람들의 체형에 맞춘 변기 말고 낮게 만들어진 변기가 그리워지는 묘한 경험을 정지우 역시 했었다. 한글로 된 읽을거리를 구하지 못해서 손으로 직접 써서라도 그걸 읽었고, 마트나 시장에 나가 김치 재료나 반찬거리를 구하러 다닌 적도 있었다.

우습게도 선수 파악 노트는 향수병에서 시작된 작업이었다.

“진심이면 에이전트에게 말해 보지 그러냐?”

“관둬라. 이건 뭐 추천해 주는 나라가 죄다 과테말라, 우루과이, 멕시코니 원!”

“괜찮으면 정호 형에게 한 번 말해 볼까?”

“뭐?”

신준석이 반짝하고 눈빛을 빛냈다.

“그 형이 능력은 없는데 끈질긴 건 있으니까 말해 보자. 연락처나 주고 가.”

“그래! 말 난 김에 번호 찍자.”

“나 전화기 없어.”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던 신준석이 기가 막힌다는 것처럼 침대 옆에 놓인 메모지와 볼펜을 가져와 휴대폰 전화번호와 부모님의 번호를 모두 적어 주었다.

달칵.

그때 주길성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녀석은 베개 옆에 던져 둔 수건을 보고 아무런 내색도 없이 들고 나온 빨랫감과 함께 집어 들었다.

“밥 먹으러 가자.”

신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정지우가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너는 안 가?”

“갑니다.”

주길성이 순순히 따라나섰다.

하기야 지금은 공연히 혼자 떨어졌다가 봉변당하기 딱 좋아서 합숙 기간만이라도 정지우와 신준석을 따라다니는 게 현명한 짓이었다.

***

문광국이 굳은 얼굴로 자꾸만 이를 갈아 댔다.

그래 봐야 개망신을 당한 것이 없어지지는 않지만, 앞쪽에 앉아 있는 필드 코치 신동수와 골키퍼 코치 이광호가 눈에 들어오자 수치심에 머리에서 김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후우!”

문광국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걸 어떻게 죽인다?’

마음 같으면 데려다가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가 헤질 때까지 갈겨 주고 싶은데 이곳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문광국은 고개를 저었다.

정지우는 조용하게 엎드리기는커녕, 악을 바락바락 쓰며 대들 놈이었다.

빌어먹을! 국내에 있는 놈이라야 팀에 연락해서 뺑뺑이라도 돌릴 텐데…….

빌어먹을! 빌어먹을 박용근!

애를 키워도 어디서 저런 망종을 주워 가지고 이렇게 속을 썩이는 건지!

“감독님.”

그때 신동수가 불러서 문광국은 시선을 주었다.

“아예 브라질전을 버리시죠.”

“뭐?”

“오늘 2조 놈들에게 브라질전을 줘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내일부터 우리 애들 데리고 유고전 철저하게 준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문광국은 신동수의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어차피 기술 분석이나 비디오 자료도 없는 놈들입니다. 오늘 통제를 따르지 않고 난리를 피웠으니까 제 놈들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라고 주는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 쯧. 그래서 엉망으로 져도 그렇고, 거기에 공연히 말까지 나오면 내가 뭐가 돼?”

“평가전이잖습니까? 내일 간단하게 기자들 불러 모아서 충무, 화랑처럼 1군과 2군으로 나눠서 확실하게 평가를 하겠다고 하십시오. 어차피 2조 놈들은 거의 모두 처음 부른 놈들이라 기자들이나 팬들도 어느 정도는 먹어 줄 것 같은데요?”

문광국이 입을 내밀고 고개를 갸웃했다.

“브라질전만큼이라도 처음 국가대표에 선발된 선수들에게 끝까지 기회를 주고 싶다고 하면 어떻습니까? 비록 지더라도 얻는 것이 있다면 나중에라도 좋은 경험이 될 거다, 평가전에서만이라도 믿어 주고 싶다, 이런 인터뷰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따지면 우리 애들이 브라질을 상대하고, 2조가 유고전을 뛰는 게 맞잖아?”

“현실적인 목표를 잡았다고 하시죠. 1조는 당장 월드컵 예선을 뛰어야 해서 유고야말로 실질적인 국가대표 평가전이 되는 거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잘하면 브라질전의 2군 대패를 1군이 멋지게 유고전으로 복수하는 모양도 나옵니다.”

“음!”

문광국이 입을 길게 내밀며 흥미로운 눈으로 신동수를 바라보았다.

“오늘 체력 훈련을 했으니까 내일 하루 그냥 쉬게 두십쇼. 그리고 사실은 너희에게 브라질전을 주려는 의도에서 이렇게 강하게 굴렸고, 1조 선수들이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던 거다. 이 정도면 놈들도 혹할 것 같습니다.”

“그걸 다 망친 게 정지우와 신준석이다?”

“예. 제가 평가전 후에 기자들에게 그렇게 흘리면 좋은 기삿감이 될 것 같은데요?”

“나쁘지는 않은데…….”

문광국이 턱을 쓸었다. 그러면서도 아직 남은 것이 있는 것처럼 시선을 허공으로 주었다.

신동수와 이광호가 눈치를 살피는 앞이었다. 문광국이 고민하는 얼굴로 전술판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고는 명단을 들어서 전술판에 2조 선수들의 이름을 하나씩 붙여 넣었다.

“일단 저놈들한테는 말을 그렇게 하고, 전반에라도 3골 차가 나면 정지우하고 센터백, 미드필더 이렇게 셋을 바꾸자고. 아니면 공격진을 이렇게 안동주, 황지산, 송학기로 교체하던가.”

신동수 코치가 문광국이 붙여 놓은 선수들의 이름을 재빨리 기록지에 옮겨 적었다.

“3점 차이가 나서 더는 지켜보기 어려웠다가 정답이고, 우리 애들이 들어가서 경기를 뒤집으면 그대로 좋고, 아니라면 어떻게 수습할 상황조차 안 됐다. 알지?”

“예.”

“이렇게 되면 정지우를 부르라는 말이 쏙 들어갈 거야. 어차피 월드컵 예선까지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까 우리는 유고전부터 우리 애들로 천천히 꾸려 가면 돼.”

“알겠습니다.”

“우리 애들은?”

“다들 방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광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2조 놈들은?”

“정지우 방으로 모이는 것까지 봤습니다.”

“언제부터 우리 축구판이 이렇게 위아래 없이 더러워졌는지! 하여간 돼먹지 않은 놈들이 꼭 해외에만 나가면 무슨 커다란 벼슬 한 줄 알고!”

문광국이 다시금 분통을 터트렸다.

“신 코치, 가서 우리 애들 다 이리 불러와.”

“알겠습니다.”

“저놈들 알지 못하게 조용하게 불러.”

신동수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

저녁을 먹는 자리에는 거짓말처럼 2조 선수들만 있었다.

“욕을 먹더니 배가 부른가? 왜들 밥을 안 먹지?”

정지우와 신준석은 오히려 속 편하게 밥을 먹었지만, 다른 선수들은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지우는 과거의 감정과 성격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런 합숙 분위기를 조성해 주어서 과거의 모습을 빨리 찾을 수 있도록 도움 준 것만은 문광국에게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후! 피곤하다.”

“너랑 나는 뛰지도 않았다.”

“지켜보는 게 얼마나 힘들었냐? 나는 간이 녹는 거 같더라.”

신준석이 특유의 넉살을 떨 때였다.

“식사 끝내고 7시까지 미팅 룸으로 모여.”

불쑥 나타난 신동수가 앞뒤 다 자른 지시를 던지고 곧바로 식당을 나섰다.

신준석이 쓰게 웃었는데 정지우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지?”

“끽해야 징벌 주지 않겠냐?”

최악의 상황이라 봐야 이대로 파주 NFC에서 쫓겨나는 것이 전부여서 딱히 아쉬울 것도 없었다.

식사를 마친 정지우는 방까지 따라온 신준식, 주길성과 함게 미팅 룸으로 움직였다.

계단을 올라가 미팅 룸 문을 열었을 때 문광국, 신동수, 이광호가 앞쪽에 있었고, 1조 선수들 전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분위기가 정말이지 칙칙했다.

정지우는 왼편에 비워 둔 자리 중앙에 앉았다.

5분쯤 구정물이 발아래를 흐르는 듯한 시간이 흐르고서야 2조 선수들이 모두 미팅 룸으로 모였다.

“흠!”

문광국은 대놓고 커다랗게 한숨을 내쉰 다음 앉아 있는 선수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오늘 훈련에 대해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간단하게 설명하겠다.”

선수들의 절반 정도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1조와 2조를 나눈 것은 브라질전과 유고전에 두 팀으로 나설 생각에서였다. 나라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선수들 모두 90분 동안 최선을 다할 기회를 주려던 거였는데, 이 점을 설명하지 않은 것은 자칫 들뜰까 봐서였다.”

2조 선수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문광국과 코치 두 사람, 그리고 정지우를 살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만 우리는 예정대로 평가전을 치른다. 우선 내일모레 있을 브라질과의 평가전에 오늘 2조 선수들이 주축으로 나서고.”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놀랐다는 기색이 분명하게 미팅 룸에 앉은 2조 선수 사이를 떠돌았다.

“이틀 뒤에 있을 유고전에는 1조 팀이 나선다.”

말을 마친 문광국이 힐끔 1조 선수들이 앉아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브라질은 1.5군, 유고는 완벽한 1군이니까 그 점을 고려한 결정이다. 아울러 오늘 체력 훈련 뒤에 가진 자체 평가전은 2조가 브라질을 상대할 때를 가정해서 만든 것이니까 더 이상 오해하지 않도록.”

누군가 ‘예.’라고 답을 했다가 바로 입을 다물었는데 그 바람에 어색함만 더욱 짙어졌다.

“오늘 훈련으로 조직력을 가다듬었어야 하는데 일이 이상하게 풀렸다. 그렇더라도 무엇보다 체력을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니까 내일 2조는 휴식을 취하고, 모레 간단하게 전술 훈련을 하는 것으로 하겠다. 질문?”

마지막의 ‘질문?’ 한 직후에 문광국이 대놓고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정지우는 올라오는 웃음을 참으려 애써 굳은 얼굴로 있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서 두 팀으로 나눠서 평가전을 치러?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말을 워낙 뻔뻔한 얼굴로 하니까 ‘정말 그런가?’ 하는 착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실제로도 2조 선수 중에는 문광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멍청이들도 있었다.

“아!”

2조 선수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2조의 주장은 신준석으로 하겠다. 준석이 너는 내일 쉬는 동안 선수들끼리 얼굴이라도 더 익힐 수 있게 시간을 가져. 포메이션과 전술 설명은 모레 하겠다.”

“예.”

신준석이 분명하게 답을 하고 문 쪽으로 걸었다.

미팅 룸을 빠져나오자 신준석이 입맛을 다셨다.

“아예 묻어 버릴 생각인가 보네.”

“뭘?”

“이거 말 잘못 나오면 우리가 항명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주절거릴 게 빤하잖아. 된통 깨지면 결국 2군 선수들은 그것밖에 안 되는 거라고 씹어 댈 거고. 햐! 내 나이 26살에 짧은 국가대표 생활 안녕이네.”

“마음을 비워.”

“예, 예. 그저 영국으로만 불러 주십쇼!”

신준석의 넉살에 정지우는 실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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