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우리 미친 짓 한번 할래? (1)
샤워를 마친 정지우가 옷을 갈아입고 사물함을 닫은 다음이었다.
몸을 일으켰을 때 등 뒤에 레믹이 서 있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아니.”
레믹이 고개로 바깥을 가리켰다.
다른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지우는 레믹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주장 데이빗과 카알, 그리고 클레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는데 굳이 뭐라고 할 말은 없었다.
라커룸을 나온 정지우는 앞서가는 레믹을 따라 복도를 지났고, 다시 그라운드가 보이는 벤치로 움직였다.
잔디도 세심한 관리와 휴식, 그리고 잠이 필요하다.
그라운드 키퍼에게 시선을 준 채로 레믹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프로 선수로 이런 질문이 수치인 것은 알아. 하지만 오늘 클레이가 어떻게 나를 막을 수 있었는지 알려 주었으면 싶다.”
지금은 같은 팀이지만, 언제고 상대 팀으로 만날 수 있는 게 프로 선수다. 그러니 지금 레믹이 하는 요구는 클레이의 기술을 훔쳐 달라는 것과 같은 정말이지 무례하고 엉뚱한 질문이었다.
“그건 클레이에게 물어야지.”
레믹이 정지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클레이가 저렇게 발전한 게 네가 코치해 준 덕분이잖아.”
분명하게 으르렁거리는 말투였다.
레믹은 180이 조금 안 되는 키를 가졌지만, 가슴이 떡 벌어지고 팔뚝이 두꺼운 전형적인 영국 놈의 체형을 지녔다.
병신.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레믹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부탁인지, 협박인지 정확하게 해.”
이런 거?
한국에서 중, 고등학교 때 축구한다는 것이 어떤지 몰라서 하는 짓이다. 거기에 일본 리그와 영국 2부 리그를 6년이나 돈 정지우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짓이고.
둘이서 똑바로 눈을 바라본 채로 잠시 시간이 흘렀다.
이런 놈과 상대하느니 빨리 집에 가서 바나나라도 하나 먹는 게 현명한 거다.
정지우가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거기 서.”
레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또 한 건 하는 건가?
정지우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레믹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차피 두 달 남은 거 화끈한 마무리도 나쁘지 않겠다.
나를 키워 준 감독님 닉네임이 ‘동대문 1번 개’인데 너 따위에 지겠냐?
“Ji,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야. 부탁한다.”
그런데 레믹이 뜻밖의 말을 뱉어서 정지우는 실없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에이그, 이 불쌍한 새끼.
“원하는 게 뭐야?”
“내가 클레이에게 꼼짝 못한 이유.”
“레믹.”
놈은 대답 없이 정지우를 노려보기만 했다.
“내가 오른쪽만 막으면 넌 어떻게 할래?”
놈의 고개가 갸웃한 순간이었다.
“왼편으로 쏘겠지. 그럼 골이 되니까. 죽어라고 드리블만 하는 놈은 간단해. 네가 공을 흘리는 반대편을 막으면 되니까. 특히 너는 왼발로 공을 흘린 다음, 반드시 페인트 모션을 섞거나 오른쪽으로 한 번 치지.”
레믹이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왼발로 공을 흘릴 때 오른쪽에서 걷어 들어가면 무조건 걸려. 그런 걸 못 막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다른 팀과의 시합에서는 통했었어.”
“30번이나 40번에 한 번이지. 그게 정말 잘하는 짓이라고 믿는 거냐? 내가 장담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원투패스를 이용해 골대를 노렸다면 넌 적어도 챔피언십에서 득점왕 후보에 올랐을 거다.”
레믹이 이를 깨물었는지 볼이 씰룩했다.
“속도를 죽이지 마. 너는 드리블이 뛰어나지만, 속도를 죽이는 버릇 때문에 안 돼. 우리 팀에서 가장 골 결정력이 뛰어난 게 너다. 지난번 브리스톨전에서처럼 한 방에 한 골. 그때 공이 어떻게 너에게 갔는지를 생각해.”
“흠, 내 드리블의 약점이 그것뿐이야?”
이놈이 여태 뭘 들은 거지?
정지우는 기가 막힌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질문을 받아 주었다.
“정 드리블을 하고 싶다면 왼발로 공을 흘리고 바로 뛰어드는 연습을 해. 넌 공의 방향을 좌우로 트는 데 시간을 너무 소비해. 내가 너의 상대편이라면 절대로 너에게는 골을 허용하지 않을 거다.”
실제로 오늘 레믹은 한 골도 못 넣었다.
“Ji, 진심으로 묻고 싶은 게 있다.”
여태 질문하던 놈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정지우는 잠자코 있었다.
“클레이처럼 달려드는 수비수를 뚫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이놈도 원래는 좀 모자란 놈이었던 건가?
하긴, 유일하게 내세울 무기인 드리블이 서브 수비수에게 막혀 버렸으니 충격이 크기도 하겠다.
“패스를 이용해. 그럼 수비수는 네가 패스를 할 건지, 드리블을 할 건지를 고민하게 돼. 그리고 공을 받으면 그 공이 흐르는 방향대로 치고 달려. 패스할 타이밍에 치는 드리블은 무섭지만, 패스를 안 하는 선수의 드리블은 안 무서워.”
이건 프로 선수가 아니라 축구를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모두 아는 그냥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러나 레믹처럼 고집스럽게 드리블만 하는 놈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조언이기도 했다.
“그게 프리미어리그에서도 먹힐까?”
“너 정도 실력이라면.”
레믹은 좀 더 강한 확신을 주었으면 하는 표정으로 정지우를 보고 있었다.
이놈은 팀이 승격한다는 가정하에서 보다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지난주에는 클레이가 그러더니, 이젠 소위 1군 선수가 서브 골키퍼에게서 인정받고 싶어 한다.
선수들의 단점을 지적해 주고, 팀을 이끄는 것.
고등학교 때 전국대회 이후로 참 오랜만에 마주하는 상황이었다.
“저녁 함께할까?”
이놈도 참! 느닷없이 뭔 저녁을?
“다음에.”
뜬금없는 청을 거절한 정지우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라파엘과 클레이가 함께 걸어왔다.
“Ji! 저녁 약속 없으면 함께 가자.”
얼굴을 걷어찬 이후로 라파엘은 부쩍 정지우에게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두 달 남았다.
이놈들과 정이 들면 오히려 불편한 시간이 된다.
“오늘은 약속 있어. 즐겁게 지내.”
정지우는 손을 들어 주고는 텅 비어 있을 아파트를 향해 움직였다.
***
꽃집 문을 단단하게 잠근 박용근이 버릇처럼 ‘엇차!’ 하면서 일어섰다.
“소주 한잔 사 주라.”
그러고는 전은주에게 툴툴거리는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어디 갈래?”
“어? 정말 사 주려고?”
“그럼. 세상에서 제일 멋진 우리 서방님이 소주 한잔 사라는데 그걸 싫다고 하겠어?”
“흐흐흐.”
박용근은 만족한 듯 웃었다.
“어디로 갈 거야?”
“삼겹살 먹자.”
“그래. 그럼 저기 삼삼이네로 갈래?”
“그러자.”
‘삼삼이네’는 집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저렴한 삼겹살 가게다. 콩나물 무침과 풋고추, 쌈장을 마음대로 떠 먹을 수 있는 그런 가게.
“감독님! 오랜만에 오셨어요!”
젊은 주인이 박용근을 맞아들였고, ‘이리 오세요!’ 하며 평소에 앉던 자리로 안내했다.
“삼겹살 2인분하고 소주 1병.”
“예!”
박용근이 물을 따르고, 전은주는 수저를 준비했다.
기본 반찬이 왔고, 다음으로 불판과 두툼한 삼겹살이 둥그런 테이블에 놓였다.
치이익.
고기를 올린 박용근은 소주를 따서 전은주에게 먼저 따라 주었다.
“이리 줘.”
평소와 다르게 전은주가 소주병을 받아서 박용근의 잔을 채워 주었다.
“자!”
아직 고기가 익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전은주는 잔을 박용근 앞으로 내밀었다.
틱.
소주를 단숨에 털어 넣은 박용근이 물끄러미 전은주를 보았다.
저 사람은 원래 술을 잘 못해서 늘 서너 번에 걸쳐 꺾어 마시지, 지금처럼 한 번에 마시지는 않는다.
“당신 알고 있었어?”
“뭐? 어린이 축구 교실 그만둔 거?”
전은주가 소주병을 들어서 박용근에게 내밀었다.
일단 술은 받고.
쪼르륵.
잔이 채워지자 박용근이 얼른 병을 받아서 전은주의 잔에도 소주를 따라 주었다.
“문호 씨가 다녀갔었어.”
“그놈 참!”
“미안해.”
“응?”
박용근이 고기를 뒤집던 시선을 들어 전은주를 보았다.
“미안해, 여보.”
“사람. 소주 한 잔 마시고 취한 거냐?”
전은주가 예쁘게 웃었다.
저 웃는 모습에 반해 결혼을 생각했고, 지금껏 감사한 마음으로 함께 살았다.
“오늘 나, 많이 마셔도 되지?”
저래 놓고 마신다는 게 소주 반병이다.
어이가 없어서 박용근은 실없는 사람처럼 웃었다.
나이를 먹어도 저런 깜찍한 모습은 전은주의 웃음만큼이나 늘 예뻐 보인다.
“고기 좀 먹고.”
박용근은 고기를 가지런히 잘라 불판에 올려놓았다.
“이거 먹어 봐.”
“당신도 얼른 들어.”
박용근이 건넸고, 전은주가 권해 주며 둘이서 고기를 먹었다.
“나 내일부터 꽃집 일 같이한다.”
“응.”
시원시원한 답이 나왔다.
“오늘은 소주가 다네. 이래서 당신이 많이 마시는 거랬지?”
그러면서 전은주는 또 잔을 내밀었다.
“흐흐흐.”
저 마음을 모른다면 모를까, 어떻게 잔을 거절하겠나.
박용근은 전은주가 내민 잔에 얼른 잔을 부딪쳤다.
“크흐.”
둘이서 그렇게 한 시간 반쯤, 고기와 소주 2병을 마셨다.
물론 박용근이 한 병 반, 전은주는 반병쯤 마신 거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전은주는 역시나 알딸딸한 얼굴이었다.
“여보, 나 어지러워.”
“그러게, 왜 그렇게 마셔?”
“업어 줘.”
“뭐?”
엉뚱한 소리에 박용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깔렸다고는 하지만, 가게의 불빛들이 길을 훤하게 밝힌 시간이었다.
“업어 주라, 박용근 씨.”
“이 사람이! 여기 동네야. 내일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오늘만!”
기가 막히면 사람이 웃음이 나온다.
나이 오십이 넘은 사람이 30년을 넘게 산 동네에서 마누라를 업고 다녀 봐라.
그러나 박용근은 순순히 자세를 낮추고 등을 내밀었다.
“야! 우리 서방님 등이다!”
“엇차!”
제법 무거워진 전은주를 업은 박용근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보, 미안해.”
“이 사람이 정말.”
“그러니까 어디 가서 아들 하나 낳아 오라고 했잖아.”
“왜 이래! 나랑 같이 살아 준 것만으로도 난 당신에게 한없이 고맙다.”
“정말이지?”
“그럼.”
“고마워, 여보.”
전은주가 박용근의 목을 끌어안고 등에 고개를 묻었다.
함께 걷는 길이다.
정지우와 함께 걸었던 적도 많았다.
특히 전국대회 우승했던 날.
그때도 술에 취한 전은주를 업고 걸었는데, 정지우는 박용근과 전은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었다.
전은주가 계속 ‘우리 아들, 고마워.’라고 떠들어 대서 그랬을까?
됐다.
자식이 없으면 어떠냐?
이런 마누라가 있고,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정지우가 있는데…….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전화가 울렸지만 박용근은 받지 않았다.
급한 연락 올 곳도 없고.
박용근을 알아본 동네 사람들이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지나가는 사이, 몇 번이나 전화벨이 더 울렸다.
그렇지만 사람 팔이 3개가 아닌 거라서 받을 수도 없었다.
박용근이 마침내 빌라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감독님.”
누군가 불쑥 박용근 앞으로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 유정호입니다.”
“누구?”
“유정호요! 정지우 담당 매니지먼트.”
“어? 자네가 어쩐 일이야?”
박용근이 놀란 눈으로 유정호를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