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8화 (18/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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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우리 미친 짓 한번 할래? (2)

유니온 시티의 토요일 상대는 번리(Burnley)였다.

랭커셔 카운티에 자리한 번리의 전용구장 터프 무어로 가는 원정 경기.

금요일은 개인 훈련이란 명목하에 휴식이다.

그래서 목요일 훈련이 끝났을 때 선발 명단이 나왔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선발진이었다.

얀센이 골키퍼인 것까지.

다들 힐끔거리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으나, 정작 정지우는 딱히 서운하지도 않았다.

두 달이다.

기회를 주면 좋은 거고,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거 정도?

박용근과 전은주를 만나겠다고 결심한 이후로 다른 것들은 점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금요일은 영국 날씨치고는 햇볕 좋은 날이었다.

하루를 자고 나면 그만큼 박용근과 전은주를 만날 날이 가까워지는 느낌이라 기분도 괜찮았다.

재능? 실력?

박용근과 전은주가 합숙 훈련비부터 전지 훈련비까지 모든 비용을 대주었고, 배곯지 않게 챙겨 주어서 그나마 지금 프로 선수라고 돌아다니고 있는 거다.

그런 은혜를 저버리고 무슨 선수 생활을.

갈 거다.

지금도 많이 늦긴 했지만, 더 늦기 전에 한국으로 가서 박용근과 전은주를 만날 거고, 잘못을 빌 거다.

선수 생활을 더 하든, 다른 직업을 찾든, 나머지는 그다음의 일이었다.

거실에서 간단하게 운동을 마친 정지우가 점심을 먹을까 할 때였다.

찌르릉! 찌르릉!

벨이 요란하게 울었다.

고개를 갸웃한 정지우는 몸을 움직여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빌이 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Who's that?”

“나다, 유정호.”

무척 지친 음성이어서 정지우는 얼른 버튼을 눌러 주었다.

일주일만 기다리라더니, 이 양반도 정말 바쁘게 산다.

정지우는 아파트의 문을 열며 계단을 향해 섰다.

천천히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걸 들었나?

정지우가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었다.

유정호가 양손에 커다란 가방을 하나씩 들고 낑낑대며 올라오고 있었다.

“뭐야? 무거운 게 있으면 내려오라고 하지?”

정지우는 얼른 움직여서 계단 중간에 있는 유정호에게로 향했다.

통상 이민 가방이라고 부르는, 허리에 닿을 만큼 커다란 녹색 천 가방이 두 개였다.

하나를 받아 들었는데 생각보다 더 무거워서 놀랐다.

“서울 다녀왔어?”

“응? 응.”

유정호가 눈치를 살피는 게 수상했는데 복도에서 뭐랄 것은 아니어서 일단 방으로 들어갔다.

“어후, 팔 빠지는 줄 알았다.”

정지우가 방문을 닫는 동안에 유정호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르륵.

바퀴가 달린 가방을 주방 앞으로 옮길 때였다.

익숙하고 그리웠던 음식 냄새가 풍겼다.

“거기 손잡이에 스카프 묶은 가방에 있는 건 전부 냉장고에 넣어야 돼.”

달칵, 달칵! 지이이익.

정지우는 유정호가 가리킨 가방을 열었다.

김치와 매콤한 양념 냄새가 훅 풍기며, 가지런히 담긴 플라스틱 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배추김치, 열무김치, 깻잎, 그리고…….

네 번째 통을 들었던 정지우가 날카로운 눈으로 유정호를 보았다.

“왜? 얼른 냉장고에 넣어.”

유정호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 한국에? 감독님 댁에 다녀왔어?”

“뭐……?”

정지우는 플라스틱 통을 싱크대에 올리고 유정호에게 몸을 돌렸다.

“돼지 불고기 말이야. 마지막에 파를 저렇게 올리는 건 사모님밖에 없었거든. 사모님이 늘… 선수는 잘 먹어야 하는 거라고 해 주시던 거라서.”

“일단 넣어. 넣고 나서 말하자.”

유정호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야! 내가 다 얘기한다니까. 그렇다고 사모님이 저렇게 만들어 주신 음식 상하게 할래? 비행기 타고 오느라고 시간이 오래 걸렸으니까 얼른 냉장고에 넣고 얘기하자.”

유정호가 일어서는 것을 본 정지우는 말없이 플라스틱 통들을 냉장고에 넣었다.

달칵, 달칵! 지이이이익.

옆에 가방에서는 김, 쥐포, 말린 오징어, 그리고 학공치포, 멸치조림, 콩장 따위의 마른반찬들이 나왔다.

그 외에 믹스 커피가 두 상자나 들었다.

정지우는 학공치포 봉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지우야, 이것 좀 먹어 봐.”

“이게 뭐예요? 어? 맛있네요?”

“그렇지? 학공치를 포로 만든 건데, 이렇게 불에 구워 먹는 거래.”

태어나서 처음 먹어 봤다.

그때 맛있게 먹는 것을 본 전은주는 수시로 정지우에게 학공치포를 구워 주었었다.

냉장고와 선반에 음식들을 정리한 다음이었다.

“믹스 커피 한 잔 할 건데, 마실래?”

유정호가 차라리 홀가분하다는 얼굴로 가스레인지 앞으로 움직였다.

서울에서 바로 온 사람이다.

“앉아 있어. 내가 타 갈게.”

“연달아 밤 비행기 탔더니 죽겠다. 두 봉 타 주라.”

“알았어.”

정지우는 물을 끓인 다음 유정호를 위해 두 봉, 그리고 머그잔에 한 봉을 부어서 두 잔의 커피를 탔다.

달달한 냄새.

부천의 빌라에서 맡았던 바로 그 냄새였다.

지난 6년을 왜 이렇게 바보처럼 살았었을까?

실망이 크셨을 텐데, 화가 많이 나셨을 텐데, 아직 죄송하다고 말씀조차 제대로 드리지 못했는데…….

정지우는 머그잔을 들고 탁자로 움직였다. 그리고 유정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정확하게 하고 싶었다. 여기서 너 한국으로 들어가면 네 축구 인생 끝날 게 뻔하니까.”

유정호가 무거운 얼굴로 말을 꺼냈다.

“감독님께서 너 용서 못하겠다고 하시면 나도 잠자코 들어와서 이번 계약 끝내고 너는 한국으로 들어가라고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지금처럼은 여기 있어 봐야 좋을 것도 없고.”

힐끔 정지우를 바라본 유정호가 뜨거운 커피를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감독님, 화요일부터 사모님 꽃집 일 도우신단다.”

정지우의 시선을 느낀 유정호가 바로 말을 이었다.

“얼마 전까지 어린이 축구 교실 나가셨었는데, 협회에서 그것도 막은 모양이다. 김문호 감독님 알지? 그분이 아주 욕을, 욕을…….”

“형, 나 한국 갈래.”

유정호가 코트 안쪽에 손을 넣더니 편지 한 통을 꺼내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사모님께서 전해 주라고 하신 거다.”

정지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편지를 집었다.

“감독님께선 너 챔피언스리그 우승컵 들기 전에는 볼 생각 없다고 하셨고.”

유정호의 말을 들은 정지우가 봉투를 열었다.

<지우야.>

덤덤했었다.

정말 편지지를 펼칠 때까지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전은주의 글씨를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그동안 찾지 못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제가, 제가 이렇게 숨어 있었어요.

<힘들까 봐, 우리가 가는 게 부담스러울까 봐 그랬어.>

이어지는 내용은 한결같이 걱정하지 말고 건강하게 선수 생활 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네가 하는 경기 보면서 늘 응원할게. 그러니까 절대 포기하지 마.>

한참이나 편지를 들여다보던 정지우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계약하자. 차라리 그 돈 받아서 감독님께 축구 교실 만들어 드리는 게 좋지 않겠냐? 그리고 막말로 이대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정말 프리미어리그 우승컵이라도 들고 가는 게 감독님 보시기에도 좋을 거고.”

유정호가 정지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인정받고 당당하게 감독님 찾아뵙는 거야. 누가 뭐라든 세계적인 선수 돼서, 돈 많이 벌어서, 가장 먼저 감독님 찾아뵙자.”

정지우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며 식탁에 놓인 편지를 보았다.

“내가 이곳에서 계약하면 감독님 축구 교실 만들어 드릴 정도는 돼?”

“지금 유니온 시티가 부른 게 20만 파운드고, 선덜랜드가 부른 게 25만 파운드 거든. 내가 던캐스트까지 약 올리면… 대략 계약금으로 30만 파운드쯤 건질 것 같은데?”

“그걸로 축구 교실 만들 수 있냐고?”

“좀 어렵지.”

유정호가 고개를 갸웃한 다음,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지우가 다시 한 번 편지에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우리 미친 짓 한번 할래?”

유정호가 음흉한 표정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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