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6화 (16/262)

제6장. 미스터 어메이징(Mr. AmaJing) (3)

사무실에 들어선 마틴은 굳이 전화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책상에 두툼한 서류철이 올라와 있어서였다.

궁금하던 참이다.

마틴은 뜨거운 물을 따라 홍차 티백을 넣은 뒤 바로 자리에 앉았다.

일단 돋보기를 먼저 착용하고.

노란 겉장을 넘기자 출력된 서류들이 순서대로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쳤다.

사그락.

“흠.”

서류를 넘긴 마틴은 나직하게 신음을 토해 냈다.

대한민국 청소년 대표까지 지낸 줄은 몰랐다.

각종 대회의 성적도 대단했다.

‘이런 선수가 왜?’

궁금증이 더했다.

사그락.

다음 장을 넘긴 마틴은 고개를 디밀었다.

위의 반 페이지에는 한국 매스컴의 보도가 그대로 출력되어 있었고, 아래에 영문으로 보도 내용을 번역해 놓았다.

마틴은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몇 장을 계속 읽었지만, 역시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를 제대로 설명해 주는 기사는 없었다.

돋보기를 벗은 마틴은 바로 전화기를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잠시 연결음이 들린 다음이었다.

[여보세요?]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마틴일세. 보내 준 서류는 잘 받았어.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서 말이지.”

[일본으로 이적한 내용 때문이지요.]

“그래. 왜 Ji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던데?”

[그 점은 한국 축구계의 구조와 언론을 이해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마틴은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면 설명을 좀 부탁하지.’ 하고 말을 건넸다.

[당시에 Ji의 모친이 희귀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규정에 따라 지역 연고의 프로 팀으로 가야 했는데, 당장 수술과 치료에 필요한 비용을 지원해 주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도대체 필요한 금액이 얼마였기에 그랬지?”

[2만 파운드 정도였습니다.]

“2만 파운드(한화 3천 5백만 원)?”

마틴은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우선 지명까지 한 선수가 프로 팀에 입단하는데 계약금이 없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다른 팀으로 간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한국은 프로 팀이 연고지 선수를 우선 지명할 수 있습니다. 선수가 그걸 거부할 경우, 국내에 다른 팀으로는 이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으로 갔던 모양입니다.]

“흠.”

[한국에서도 꽤 큰 스캔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협회와 프로 팀의 행정에 반발했던 박용근 감독은 U-18 감독 발령이 취소되고 총괄 감독에서도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보도가 굉장히 일방적이고 날카로운 이유는?”

[한국 축구 협회와 프로 팀의 입김이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마틴은 서류를 넘겨 보았다.

“그렇다면 Ji의 어머니는?”

[일본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몇 달 뒤에 사망했습니다.]

“유감이군.”

[그렇지요. 그 뒤로 아시다시피 쭉 슬럼프가 있었습니다.]

이제야 대충의 얼개가 그려진 마틴은 ‘고맙네. 궁금한 게 있으면 또 전화하지.’ 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그락. 사그락. 사그락.

자료를 넘길 때마다 정지우는 성장하고 있었다.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 3년, 그리고 영국으로 건너온 뒤의 3년 동안 정지우는 늘 슬프고 외로운 얼굴이었다.

자료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천천히 들여다보던 마틴은 흥미로운 사진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커멓게 탄 얼굴에 눈이 찢어진 남자와 함께 있는 정지우의 사진이었다.

‘Park Yong-Guen?’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었다.

하긴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사진에서 유일하게 정지우가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전국대회를 우승하고 찍은 사진에서 정지우는 마치 미니게임에서 클레이가 뒤를 돌아볼 때처럼 ‘나 잘했지요?’ 하는 눈을 하고 있었다.

밑으로 시선을 내린 마틴이 얼른 돋보기를 가져다가 귀에 걸었다.

“I can't believe this.”

마틴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건 도저히 믿을 수가 없군.’ 하고 중얼거렸다.

본선 전 경기 무실점 우승이었다.

마틴은 오늘 벌써 두 번째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후우!”

이런 선수였구나!

이 정도로 대단하던 선수가 슬럼프에 빠졌다가 다시 헤어 나오는 거였구나!

마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정지우가 이런 실력을 다시 찾는다면 유니온 시티는 그를 잡지 못한다.

한국에서의 기록이니 영국에서는 안 먹힐지 모른다고?

젠장!

아스널과 브리스톨전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절대 그런 소리 못할 거다.

“Mr. AmaJing.”

맞다.

정지우는 어마어마한 선수다.

쥬피터나 마틴, 유니온 시티가 붙잡기에는 턱도 없을 만큼 말이다.

***

박용근은 눈살을 찌푸리며 웃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귀가 막혔냐? 동대문 쪽에 상점 하나 계약할 거라고!”

“그래서? 나보고 축구공이나 팔라고?”

“그거 말고 네가 아는 거 있어?”

김문호는 오늘따라 막힘없이 박용근의 말을 척척 맞받았다.

“그래. 나는 그렇다고 치고, 너는 왜? 왜 이 잘나가는 김문호 축구 교실을 때려치우고 공을 팔겠다는 건데?”

그러나 박용근의 다음 질문에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신 차려, 인마! 오십이 넘은 놈이……. 누구냐? 협회에서 누가 찾아왔었냐?”

김문호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박용근을 바라보기만 했다.

“한승관이었냐?”

김문호의 표정에 답이 있었다.

“그놈 참! 됐고! 내가 물러나면 되는 거냐?”

“용근아! 그건 내가 못 받아들여!”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안 그래도 요즘 마누라 하는 꽃집이 잘돼서 일손이 달리던 참이다. 언제까지냐? 아무리 그래도 애들에게 인사는 좀 해야지. 오늘 친해진 녀석도 있는데, 지금 나가서 말하긴 좀 그렇잖냐.”

“야! 그러지 말자! 나 그런 놈 아니다!”

“내일 그만두는 거로 하자. 막말로 동대문에 가게 연다고 지금 이 판국에 누가 나한테 공 사겠냐? 선수단 상대 안 하고는 먹고살기 힘들다. 거기에 어지간한 조기 축구회만 해도 내가 선수 빼돌렸다고 손가락질하는 판국이고.”

“그러니까 내가 사무실로 나오라고 하잖아!”

“그 손바닥만 한 사무실에 내가 가서 할 일이 뭐가 있어? 그리고 내가 거기 있으면 어차피 여기 지원 나오는 거 다 잘릴 텐데 뭐하러 그 짓을 해?”

“그러니까! 그냥 가게 내자고!”

박용근이 피식하고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거, 내일 올 때 컴퓨터로 사직서나 하나 예쁘게 뽑아 와라. 너나 나나 글씨는 엉망이잖냐.”

“용근아!”

“문호야.”

나직하게 깔린 박용근의 음성에 김문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부탁 하나만 하자.”

“말해. 뭔데?”

박용근이 나직하게 숨을 내쉰 후에 입을 열었다.

“난 지우 팔아 가면서 못 산다. 사과 따위 하면 내가 지우를 씹어 대는 거라는 걸 너도 잘 알 거고.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너는, 지우 욕하지 마라. 만약 잠꼬대라도 네가 그런 소리 했다는 말이 들리면 정말 화날 거 같다.”

김문호는 이를 꽉 깨물고 박용근을 노려보았다.

“알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씹듯이 답을 했다.

“쯧! 이렇게 됐는데 내일 나오는 것도 이상하네. 그냥 오늘 훈련 끝나면 내일부터 못 나온다고 할 테니까 사직서는 네가 알아서 해.”

박용근은 불쑥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주에 전화해라. 소주나 한잔하자.”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문을 나섰다.

“나쁜 새끼들.”

누구를 향해 뱉어 낸 것인지 모를 김문호의 욕이 간이 사무실의 바닥에 기다랗게 널브러졌다.

훈련이 끝났다.

어린아이들이 올망졸망한 눈을 한 채로 박용근의 주변에 몰려서서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알려 줄 게 있어요. 내일부터 새로운 감독님이 여러분들을 지도해 주실 겁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을 지도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그동안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박용근은 어린아이들과 한쪽에서 기다리는 학부모들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이들은 사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한다. 그래서 다들 무슨 말인가 하는 얼굴로 기다리는 이들을 향해 움직였다.

“왜 갑자기 그만두세요?”

“서운해서 어떻게 해요?”

그나마 몇 명이 다가와서 인사를 건넸고, 다들 그렇게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박용근이 빈 골대를 보며 한숨을 내쉴 때였다.

쪼르르르.

분명 밖으로 나갔던 이기호가 짧은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달려오고 있었다.

“엇차!”

박용근은 이기호를 안아서 팔에 얹었다.

“왜?”

“감독님, 내일은 안 와요?”

“응.”

“다음 날은요?”

“이제 못 나와.”

이 아이는 못 나오는 것과 안 나오는 것의 차이를 모를 거다. 그리고 왜 이렇게 갑자기 그만둬야 하는지도.

입구에서 아이 엄마가 기다리는 것이 보였다.

“엄마한테 가야지. 축구 재미있게 하는 거 잊지 말고. 포기하지 마.”

“네.”

이기호가 두 번이나 뒤를 돌아본 다음, 엄마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빠져나갔다.

눈치를 살피던 스태프들이 도구들과 공을 챙겨 간이 사무실로 들어간 다음이라 운동장에는 박용근 혼자 있었다.

박용근은 버릇처럼 골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 네가 다시 활약하는 것 때문에 내가 축구를 그만둬야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축구화 벗을 수 있어.”

전국대회에서 우승하던 순간, 골대에서부터 일직선으로 달려오던 정지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녀석이 그때까지 보았던 그 어떤 순간보다 환하게 웃으며 달려와 박용근을 안으며 뛰어올랐을 때 세상을 품에 안는 것 같았다.

본선 무실점 우승.

그때 공을 노려보던 정지우의 불타는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박용근에게 우승컵을 선물하겠다는 그 무서운 눈빛이.

“나는… 괜찮아.”

이상하게 목소리가 울먹였다.

그때 생각이 떠올라 감동해서 그런 거지, 지금이 서러워서 그런 건 절대 아닌 거다.

“그러니까…….”

말을 하던 박용근이 가슴에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꿀꺽 삼키고는 몸을 돌렸다.

이제는 꽃집으로 가서 커다란 화분과 비료, 흙 포대를 옮겨 줘야 할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