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미스터 어메이징(Mr. AmaJing) (2)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콧속이 쌉쌀하게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날씨였다.
레드 블레이트에 소집한 유니온 시티 선수들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운동장을 달렸다.
몸이 재산인 선수들이다.
막말로 능력이 떨어지면 방출되는 거고, 축구 기술과 능력이 발전하면 더 좋은 팀으로, 더 많은 돈을 받으며 옮길 수 있는 게 프로 선수의 삶이라서 팀은 선수들에게 무리한 훈련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란다고 들어 먹지도 않지만, 놔둔다고 방만한 선수도 거의 없다.
느긋하게 운동장을 돈 선수들이 자기 포지션에 맞는 훈련을 위해 그라운드 곳곳에 흩어졌다.
정지우는 골대 앞으로 움직였다. 장갑을 끼고, 손을 위아래로 움직여 간단하게 몸을 풀었다.
“기분은 어때?”
“괜찮은데요?”
골키퍼 코치가 스태프와 함께 30센티미터 높이의 점프대를 앞으로 3개, 좌우로 2개씩 놓아 주었다.
“시작한다.”
“그러죠.”
정지우는 바로 몸을 움직였다.
점프, 점프, 점프 후에 코치가 던져 주는 공을 잡는다.
얼른 뒤로 달려서 다시 공을 받는데 이때도 옆에 놓인 2개의 점프대를 뛰어야 한다.
“헉헉.”
쉬지 않고 뛰는 20분의 훈련이다.
“됐어! 오늘 컨디션 좋은데?”
골키퍼 코치가 점프대를 치웠다.
다음은 연속해서 공을 던져 주는 훈련이다.
처음은 2미터 앞에서 시작하지만, 5분쯤 지나면 1미터 앞에서 던질 정도로 조금씩 다가온다.
휙! 휙! 휙! 휙!
어시스턴트가 기계처럼 건네주는 공을 골키퍼 코치는 위와 옆, 그리고 정지우의 바로 발 앞으로 던진다.
휘이익!
그러다가 느닷없이 완전히 옆으로 던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정지우는 곧바로 몸을 날리며 공을 잡아냈다.
마틴은 운동장의 가운데에서 훈련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자꾸만 시선이 정지우에게로 향했다.
신문 기사를 본 응원 팀 사이에서 이미 ‘미스터 어메이징’이란 닉네임을 얻은 선수다.
기가 막힌다.
고작 두 게임을 뛴 임대 선수가 붙박이 골키퍼 얀센도 얻지 못한 닉네임을 얻었다는 것이.
정지우는 일종의 소나기 같다.
반짝했던 실력이 한순간 맑아진 날씨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고, 그게 아니어서 저 실력이 계속 유지된다면 유니온 시티는 그저 정지우라는 지나가는 소나기를 맞은 꼴이 될 거다.
마틴은 정지우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원래 실력일 거다.
골키퍼 코치가 빠르게 던져 주는 공을, 그것도 1미터 앞에서 던지는 공을 저렇게 막아 내는 건 동물적인 감각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게다가 코치가 느닷없이 옆으로 던져 주는 공을 몸을 던지거나, 때론 발을 뻗어서 모두 막아 내고 있었다.
‘젠장!’
마틴은 욕을 삼켰다.
골키퍼 코치가 두어 달 전부터 ‘Ji를 눈여겨봐. 굉장한 재능이야.’라고 조언했음에도 그러지 못했던 것이 화가 나서였다.
하긴, 그런 조언 때문에 FA컵에 넣은 것이기도 했다.
미칠 노릇이다.
팀 분위기가 분명하게 바뀐 것도.
선수들이 정지우를 힐끔거리며 평소보다 열정적으로 훈련에 임하고 있었다.
선수들의 가슴에 프리미어리그에서도 통할지 모른다는 희망이 피어났고, 그것이 훈련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는 골키퍼가 있다면?
수비 라인을 위로 올려 허리를 단단하게 보강할 수 있다.
그러면 중원에서 공을 가질 확률이 높고, 그건 바로 공격이 원활하게 펼쳐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마틴은 입맛을 다셨다.
탐난다.
정지우가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해서도 저런 실력을 발휘해 준다면?
마틴은 반대편 골대로 시선을 돌렸다.
얀센 역시 그동안 보여 주었던 모습과는 달리 눈빛을 번득이며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
마틴은 오늘 저녁에 보내 준다는 정지우에 대한 기록이 정말 궁금했다.
저런 재능과 능력과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동안 왜 2부 리그인 챔피언십을, 그것도 임대 선수로 떠돌았는지 말이다.
***
고만고만한 아이들을 나이별로 나누었다.
그렇더라도 대개는 코치들이 패스해 준 공을 몰고 콘 사이를 지그재그로 달려간 다음,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훈련을 다 함께 시작한다.
축구 선수로 키우고 싶은 부모, 아들이나 딸이 건강해졌으면 싶은 엄마, 혹은 내성적인 성격을 고쳤으면 싶은 엄마들이 스탠드에 앉아서 아이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박용근은 인조 잔디 위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스태프들이 나이와 포지션에 맞는 훈련을 시키기 위해 열을 바꿀 때였다.
골키퍼 훈련을 위해 세워 놓은 장대 옆에서 혼자 서 있는 남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마른 몸, 떨군 고개, 풀 죽은 얼굴.
시선을 흘깃 들었을 때 걱정스럽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도 보였다.
박용근은 천천히 아이에게 걸어갔다.
유니폼이 커서 상의는 원피스 같고, 하의는 7부 바지처럼 보였다.
“왜 여기서 그래?”
고개를 든 아이가 박용근을 보고는 죄지은 아이처럼 엄마의 눈치를 살폈다.
“엇차!”
박용근은 아이를 안아서 오른팔에 얹었다.
“축구가 재미없구나.”
이런 녀석이라니!
입을 열지는 않았는데 완벽하게 박용근의 말에 동의하는 표정이었다.
지금은 기술을 익힐 때가 아닌데, 무언가 익혀서 남들보다 앞서야 한다는 부담 때문일 거다.
그저 축구를 즐기면 되는 나이인데.
가끔 이 녀석들을 두 편으로 나누어 경기를 진행해 보면 전혀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슈팅을 날리는 아이들이 나온다.
그 기발함을, 그 신선한 시도를 기초 실력이란 바탕에서 키워 주어야 진정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다.
굳이 선수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이런 추억이 축구를 평생의 동반자로 만들어 줄 테니까.
“이름이 뭐야?”
“이기호입니다.”
풀 죽은 얼굴로 하는 웅변 투의 대답이 웃겨서 박용근은 커다랗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름이 멋진데? 어디 우리 기호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 나하고 한번 시험해 볼까?”
이기호는 그리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슛을 열 개를 차 보는 거야. 내가 저기 골대를 막을 거니까 몇 개나 넣는지 볼까?”
잠시 반대쪽으로 걸었던 박용근은 이기호를 안고 다시 5미터 간격으로 세워 놓은 장대 앞으로 움직였다.
“엇차! 공은? 어! 저기 있다. 어디, 다섯 걸음을 걸어야 하니까…….”
박용근이 짐짓 커다랗게 걷는 것처럼 다섯 걸음을 걷고 난 후에 공을 바닥에 놓았다.
“자! 차 봐! 음, 열 번 차서 다섯 번만 넣으면 기호가 이기는 거다.”
박용근은 장대 사이에 서서 두 손을 위로 들고 자세를 낮췄다.
쭈뼛쭈뼛. 툭!
공은 안쓰러울 정도로 데구루루 박용근의 옆으로 굴러왔다.
“아앗!”
그러고는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쓰러진 박용근의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골대로 들어갔다.
이기호가 멋쩍은 눈으로 박용근을 보았다가 엄마에게 시선을 주었다.
“야! 너무 세게 차는 거 아냐? 너 실력 있잖아? 다시 해 보자. 이거, 내가 속은 거 같은데? 좀 더 먼 곳에서 차게 해야 하는 거 아냐?”
너스레를 떨며 공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박용근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어서 찬 9개의 슈팅 중에 5개가 골에 들어갔고, 나머지 4개는 그냥 골대 밖으로 굴러갔다.
이기호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야! 너, 감독님을 속여? 이번엔 내가 수비를 해 볼게. 공을 몰고 와서 한번 넣어 봐.”
박용근이 굴려 준 공을 잡은 이기호가 툭 차고 골대로 달려왔다.
웃기다.
공보다 늦은 이기호의 모습이.
“너무 빠르잖아!”
그러나 박용근은 나름 진지한 얼굴로 불평을 털어놓으며 이기호의 뒤를 달렸다.
처음으로 이기호가 ‘까르르!’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어서 또 아홉 번의 드리블을 하는 사이, 이기호는 볼이 발갛게 올라와 있었다.
“더 할래?”
“예!”
“그러자. 더 하자.”
고맙다. 포기하지 않아서.
그리고 기억해 다오.
이기려고 하지 말고, 무리한 기술 익히려 하지 말고, 지금은 그저 재미있게 축구를 즐기는 것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란다.
박용근은 조금씩 이기호의 슛을 방해했다. 그러자 이기호는 ‘좀 모자란 건가?’ 싶은 모습으로 페인트 동작을 펼치며 박용근을 제치려 애썼다.
그리고 골!
“와- 아!”
두 팔을 위로 들고 엄마를 자랑스럽게 보는 아이다.
씩씩거리는 숨, 붉게 타오른 볼, 그리고 반짝이는 눈.
“이 녀석!”
박용근은 다시 이기호를 안아 들고 챔피언처럼 왼팔을 위로 들었다.
“축구 재밌지?”
“네에! 정말 재밌어요.”
“힘들 때도 있는데 아까처럼 멋진 슛으로 이겨 낼 거지?”
“예.”
이건 좀 자신이 없었나 보다. 단박에 목소리가 작아졌다.
“약속!”
박용근은 이기호와 손가락을 걸었다.
삐이익! 삐익! 삐익!
휴식 시간을 알리는 휘슬이었다.
“엇차.”
박용근이 내려 주자 이기호는 쪼르르 엄마에게 달려갔다.
“녀석.”
몸을 돌린 박용근은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시며 텅 빈 골대를 보았다. 저렇게 아무도 서 있지 않은 골대를 보면 허전함이 불쑥 달려든다.
이곳 걱정하지 말라고 혼잣말까지 중얼거려 놓고.
박용근이 피식하는 웃음을 지을 때였다.
“박 감독!”
김문호가 입구에서 손을 높이 들고 박용근을 찾았다.
무슨 일인데 그러지?
박용근은 사무실을 가리키고는 그쪽으로 걸었다.
김문호가 무거운 얼굴로 걸어오고 있었다.
***
6명씩 팀을 나눠 하는 미니게임이었다.
“Hey!”
손을 들며 공을 달라는 선수, 그 앞을 막아서는 수비, 그리고 골키퍼.
그라운드를 반으로 줄였기 때문에 그만큼 빠르고 슈팅도 자주 나온다.
마틴과 코치진은 놀란 얼굴로 미니게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에 없이 달라진 분위기도 놀라웠지만, 그보다는 서브 선수들 위주로 구성된 정지우 팀이 보여 주는 경기력에 제대로 놀랐다.
특히 정지우와 클레이의 호흡은 발군이었다.
“왼편!”
정지우의 고함이 터지면 클레이는 여지없이 왼쪽을 막아섰고,
터엉!
슈팅이 날아오면 정지우는 완벽하게 공을 잡아냈다.
그뿐만이 아니다.
유니온 시티의 최고 드리블러 레믹이 클레이에게 꼼짝을 하지 못하는 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건지.
평소라면 세 골에 한 골, 그러니까 통상 3 대 1의 스코어로 진행되어야 하는 경기가 지금은 거꾸로 1 대 3이다.
골키퍼를 시작으로 수비진이 단단해졌고, 그러자 공격이 살아났다.
마틴은 등줄기와 팔에 소름이 끼쳤다.
제대로 갖춰진 강한 팀의 면모를 서브 팀이 그대로 보여 주고 있어서였다.
미니게임이다.
술렁술렁한 느낌이어도 뭐라 할 사람 없는데, 지금 그라운드를 뛰는 12명의 선수는 글자 그대로 리그 경기만큼이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서브 팀은 단단해진 실력에 흥분하고, 주전 팀은 서브 팀의 반응에 더욱 열을 내다 보니 자연스레 열기가 피어오른 거다.
“Hey!”
레믹이 공을 달란 직후였다.
투욱!
카알이 짧게 공을 찔러 주자 대뜸 클레이가 앞을 막아섰다.
툭, 투욱!
레믹은 왼발로 공을 골대 방향으로 틀었다.
그런데 그 순간.
클레이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 공을 걷어 내 버렸다.
‘어떻게?’
레믹과 클레이가 짠 것도 아닐 텐데!
놀라서 바라보던 마틴은 기가 막힌 웃음을 토해 내고 말았다.
클레이가 고개를 돌려 정지우를 바라보고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아서였다.
‘나 잘했지?’
딱 그런 표정이었다.
마틴이 알아볼 정도였는데 선수들이 모를 리는 없다.
무엇보다 오늘 미니게임에서 계속 공을 빼앗긴 레믹은 분하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얼굴로 정지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삑! 삑! 삑!
미니게임이 끝났다.
선수들이 손을 부딪치거나 등을 두드리는 사이, 마틴은 사무실로 향했다.
잡고 싶다.
정지우를.
어느 팀이든 선수들을 아우르는 리더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리고 대개는 골을 만들어 내는 공격수가 그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정지우라면, 저런 능력과 실력을 갖춘 골키퍼라면.
어떻게 하면 붙잡을 수 있을까?
선수들을 불러 놓고 그 앞에서 간절하게 매달린 다음, 엉덩이춤이라도 추면 혹시 남아 줄까?
챔피언십을 돌며 저런 능력 있는 선수는 처음이다.
서브 팀이 보여 준 것처럼 단단한 경기를 펼치는 팀의 감독이 되어 보고 싶다는 욕심에 마틴은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
프리미어리그로 가서 아스널뿐만 아니라 맨유, 첼시, 리버풀 같은 강팀을 차례로 꺾어 보고 싶다.
‘자료가 왜 이렇게 안 와?’
마틴은 독촉 전화를 걸 생각으로 좀 더 빨리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