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미스터 어메이징(Mr. AmaJing) (1)
간단하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난 다음이었다.
찌르릉! 찌르릉!
학교를 마친 빌이 달려오기 꼭 적당한 시간에 벨이 울렸다.
정지우는 웃으면서 인터폰의 버튼을 눌렀다.
달칵.
“Who's that?”
“It's me, Bill. Mr. AmaJing!”
뭔 영국 아이가 발음이 이렇게 이상하지?
정지우는 현관 버튼을 눌러 주면서 그제야 미스터 어메이징이 무슨 뜻인가 싶었다.
빌 또래의 아이들은 원래 유치한 멘트를 잘 쓴다.
그러려니 하고 방문을 열었을 때, 빌은 이미 바로 문 앞에 있었다. 이 녀석을 상대하려면 한 살쯤 된 비글 두어 마리는 있어야 할 거다.
“Ji! 이걸 봐!”
거실로 들어선 빌이 대뜸 타블로이드판으로 제작된 유니온 데일리를 디밀었다.
뒤적일 것도 없었다.
가장 앞면에 정지우가 높다랗게 떠서 왼편 구석으로 날아온 공을 쳐 내는 사진이 담겨 있었고, 그 위로 ‘AmaJing’이란 글자가 커다랗게 찍혀 있었다.
‘Amazing’의 Z 대신 정지우의 J를 넣은 전형적인 영국식 기사였다.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냉장고를 가리켰다.
“Ji, 우유 마실 거야?”
당연하게 빌이 오히려 정지우에게 질문을 던졌고,
“아니.”
답을 한 정지우는 식탁에 놓인 바나나의 랩을 벗겼다.
두 손으로 커다란 우유 팩을 들어서 잔에 채운 빌이 냉장고에 우유 팩을 넣었다.
바나나를 잘라서 입에 넣은 정지우는 또다시 웃고 말았다.
빌은 늘 저렇게 우유를 마시면 윗입술에 묻힌다.
“학교는 어땠어?”
“별로였어.”
빌이 기분이 언짢다는 것처럼 툴툴거렸다.
“왜?”
“그냥 다들 날 무시해.”
이렇게 밝고, 말 잘하는 놈이 소위 왕따를 당할 것 같지도 않고?
정지우의 표정을 본 빌이 모른 척 우유를 마시기 시작했다.
한국이 아닌 영국이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자존심이 상할 이야기를 끝까지 캐묻는 건 실례가 되는 나라.
“나랑 똑같네.”
정지우는 손으로 바나나를 잘라서 입에 넣었다.
“Ji를 무시한다고? 누가?”
“아스널전을 뛰기 전까지 어느 팀에 가든 그런 느낌이었던 거 같은데?”
“그건 Ji의 능력을 몰라서 그랬던 걸 거야. 이제는 아니잖아.”
어쩌면 어린애가 이렇게 영감같이 말을 할까?
정지우는 짐짓 고개를 끄덕인 후에 빌을 보았다.
“너는 누가 무시한다는 거야?”
빌은 먼저 입을 내밀며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팀을 망친대.”
“팀? 무슨 팀?”
“우리 축구팀. 다들 내가 그만두기를 바라.”
정지우는 웃음을 담은 얼굴로 빌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나랑 같네. 나도 학교 축구팀에 있을 때 다들 내가 그만두었으면 했었거든.”
“정말? 왜?”
정답은 가난해서다.
더럽게 가난해서 유니폼은 물론이고 축구화, 골키퍼 장갑, 정강이 보호대까지 얻어 써야 하는 선수를 반기는 축구팀 부모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그런 답을 하겠나.
“난 소질이 없었어.”
빌이 깜짝 놀란 것처럼 정지우를 보았다.
“미스터 어메이징이? 말도 안 돼.”
“그때 포기했었다면 지금 여기 없었을 거야. 그랬었다면 너도 못 만났겠지? 그러니까 축구가 좋다면 포기하지 마. 가끔 시간 되면 내가 봐줄게. 원하는 포지션은?”
“전에는 뭐든 다 좋았는데, 지금은 골키퍼야.”
“나 때문에?”
“응. Ji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축구 선수고, 내 친구니까.”
정지우는 커다랗게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툭!
빌이 기분 좋은 얼굴로 정지우가 내민 주먹에 제 주먹을 부딪쳤다.
***
어린이 축구 교실이 끝났는데도 박용근은 스탠드에 있었다.
평소라면 전은주가 운영하는 꽃집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무거운 화분, 비료, 그 외에 흙 포대 따위를 옮겨 주고서 함께 퇴근하는 게 그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텅텅 빈 운동장이다.
그런데도 박용근은 좌우를 살핀 뒤에 다시 전화기로 시선을 떨구었다.
자랑스럽다.
그리고 좋았다. 좋아도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골을 막아 내는 정지우 위로 ‘미스터 어메이징’이라는 글자가 찍힌 사진을 보는 것이 말이다.
국내에서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차지하는 포털 스포츠 메인 기사로 올라왔다는 사실도 그를 행복하게 했다.
전은주가 정말 용서한 게 맞느냐고 물을 정도로 표를 내지 못했지만, 오늘 새벽에 축구를 볼 때 미치는 줄 알았었다.
“잘했어, 이 녀석아.”
박용근은 사진 속의 정지우를 향해 말을 건넸다.
‘이대로 쭉 나가서 세계적인 선수가 되는 거다. 여기서 있었던 아픔 다 잊고, 훨훨 나는 거야. 내가 널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 알지?’
이번 바람은 쑥스럽고 낯간지러워서 혼잣말로도 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삼켰다.
‘가만있자. 이걸 어디를 누르라고 하더라?’
박용근이 버튼을 이리 누르고 저리 누르고 전화기를 가지고 10분쯤 씨름한 뒤에야,
찰칵!
화면을 사진 저장소에 담을 수 있었다.
“흐흐흐.”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말하기 좋아하는 놈들은 물 먹었느니, 기껏 키우고 배신당했다느니 하지만,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박용근과 전은주만은 안다.
평생 모아서 융자를 겨우 다 갚은 부천의 작은 빌라.
그 빌라를 가지고 다시 융자를 받으려는 걸 알아챈 정지우는 박용근과 전은주에게 말도 하지 않고 일본으로 떠났다.
떠나던 날, 전은주에게만은 전화를 걸었는데 그때 녀석이 우는 것 같았다고 마누라는 지금도 그때 생각이 떠오를 때면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그동안 흘러 버린 6년의 세월이 아쉬웠지만, 이렇게 정지우가 다시 살아났으니 그걸로 됐다.
몇 번을 찾아가려고 했다가도 녀석에게 부담될까 봐, 언제고 찾아오는 날이 있겠지 하는 심정으로 견딘 시간이었다.
찾아오지 않으면?
그럼 또 어떠냐?
이렇게 정지우가 잘나가면 되는 거지.
오늘은 삼겹살 사서 오붓하게 소주라도 한잔할까?
박용근은 모처럼 좋은 기분으로 꽃집으로 향했다.
***
김문호는 뻑뻑한 표정으로 소파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잠시나마 한 팀에서 뛴 적이 있는 후배 한승관이 그의 답을 기다리는 중이어서 뭐라고 하든 입을 열어야 했다.
“선배님, 간단합니다. 어린이 축구 교실에 이 친구를 새로운 감독으로 임명하시면 되는 겁니다.”
기다리기 싫었던지 한승관은 소파 테이블에 올려진 이력서를 김문호 앞으로 좀 더 밀었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어? 날개 다 꺾인 용근이를 이 바닥에서 내쫓으려는 이유가 뭐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누가 들으면 제가 박 감독님께 앙심 품은 줄 알겠습니다.”
김문호는 터져 나오려는 분통을 커다란 한숨으로 참아 냈다.
“여기 이 친구가 능력이 있어서 그런 겁니다. 미래의 한국 축구를 책임질 아이들을 좀 더 뛰어난 지도자가 키워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내가 이 친구를 거절하면 협회에서 지원하는 금액을 삭감하겠다는 거 아냐?”
“제대로 된 지도자를 거절하시면 협회에서도 고민은 하게 되겠지요. 아무래도 올바른 교육 현장에 협회비가 지불되어야 하니까요.”
김문호는 잠시 창밖을 보았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에 불쑥 찾아와서 느닷없이 박용근의 자리를 뺏으려 하다니.
두말할 것 없이 정지우의 기사가 원인이었을 거다.
혹시나 예전에 일본에 가게 된 이유라도 밝혀질까 봐 미리 선수를 치려는 것.
김문호는 한승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나만 묻자. 만약 박 감독이 원하는 인터뷰를 하면 계속 감독직을 해도 괜찮은 거냐?”
“그 양반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답이나 해!”
김문호가 지금은 이러고 있지만, 눈이 뒤집히면 박용근과 쌍벽을 이룬다던 ‘동대문의 개’다.
한승관이 마지못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협회의 뜻에 협조한다면야 그 정도는 충분히 인정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더 좋은 조건이 있을 수도 있지요.”
“더 좋은 조건?”
“뭐, 회장님께 정식으로 사과만 하면 18세 이하 대표 팀을 맡으실 수도 있구요.”
“흐흠.”
김문호가 다시금 숨을 내쉬었다.
박용근은 18세 이하 대표 팀이 아니라 국가 대표 감독을 맡겨도 충분히 제 몫을 할 사람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 지우가 영국에서 활약하는 게 뭐가 그렇게 무서운 건데?”
“선배님!”
한승관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쨍!’ 하는 음성으로 김문호를 불렀다.
“협회에 반기를 들고 나갔던 놈입니다. 대한민국 축구를 우습게 안 놈이 매스컴의 관심을 받으면 여러 가지로 불편해집니다. 한없이 너그럽기만 한 우리 국민은 그런 놈도 국가 대표로 기회를 주라고 할 텐데, 그때 뒷감당을 누가 합니까?”
세수하는 것처럼 얼굴을 크게 쓸어내린 김문호는 한승관을 피해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하필이면 벽에 걸린 액자를 보았을까?
경기 직전의 기념사진에서 김문호와 어깨동무를 한 박용근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협회의 협조가 없으면 어린이 축구 교실은 유지하기 어렵다. 물론 수입이 받쳐 주는 달도 있지만, 운동장 임대료부터 기타 비용을 계산하면 손해를 보는 달이 제법 된다.
1년 단위로 하는 운동장 사용 계약도 문제다.
이 제안을 거절하면 내년 운동장 사용 계약은 다른 곳으로 넘어가게 될 거다.
김문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박 감독에게 18세 이하 대표 팀 감독을 맡기는 건 확실해?”
“사과만 제대로 한다면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확실하냐고 물었다.”
한승관은 ‘예.’라고 답을 하고는 눈치를 살폈다.
김문호는 언제고 테이블을 뒤집어엎으며 ‘개, 소, 닭, 말’의 새끼들을 주르륵 찾아 대고 남을 위인이었다.
저런 양반이 왜 박용근에게는 꼼짝을 못하지?
“가 있어. 이번 주까지 답을 줄게.”
“그렇게까지는 시간이…….”
“가 있으라고.”
김문호의 표정과 말투로 볼 때 테이블이 엎어질 경계선에 다가온 것이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한승관이 억지로 답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긍정적인 검토 부탁드립니다.”
꼴에 행정가 흉내는!
김문호는 사무실을 나서는 한승관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세상 참 잔인하다.
선수 시절 박용근에게 그렇게 욕을 처먹던 놈이 한승관이다.
“적당히 좀 해라!”
“저놈은 애초에 재능이 없어!”
“그럼 더 이해해 줘야지. 그리고 그건 축협이나 감독이 결정할 문제지, 우리 영역이 아냐.”
“누가 그걸 모르냐? 그래서 내가 이 지랄 하는 거잖아. 재능이 부족하면 노력을 더 해야지. 저 새끼, 몰래 술 처먹고 들어와서 연습도 제대로 안 하잖아?”
“야, 인마! 그만하자. 감독님이 선발한 놈이다.”
김문호는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사진을 똑바로 보았다.
어둠이 깔릴수록 형광등이 더욱 밝게 사무실 곳곳을 비추는 시간이었다.
저때는 참 좋았는데…….
그때 박용근은 진짜 대단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