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3화 (13/262)

제5장. 절대 용기 잃지 마 (2)

아침을 먹은 후, 어린이 축구 교실에 도착한 박용근은 곧바로 운동장으로 움직였다.

운동장 중간에 콘을 세우고, 공을 가져다 놓는 일은 굳이 박용근이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이 일은 그의 몫이 되었다.

콘을 다 세운 박용근은 본부석 터치라인 쪽으로 기다란 장대를 5미터 간격으로 세웠다.

골키퍼가 연습할 공간이었다.

띠리리. 띠리리. 띠리리.

어디서 보고 있다가 준비가 끝나기를 노렸나?

장대를 세워 놓기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필드 점퍼에서 전화기를 꺼낸 박용근은 발신 번호를 확인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야! 너 봤냐?]

“나이가 오십이 넘은 놈이 말투가 그게 뭐냐?”

박용근은 5열로 이루어진 스탠드 쪽으로 움직였다.

[지우가 또 선발로 나와서 무실점 했어! 야! 그놈, 그거 예전 감각 살아난 거 아니냐?]

“그랬냐?”

[너 정말 안 봤어?]

“언제 했는데?”

김문호가 잠시 말이 없는 틈을 타서 박용근은 스탠드의 2열에 앉았다.

[내가 녹화 떠 놨다. 보내 줄 테니까 보고, 협회에서 자꾸 말 나오나 보더라.]

“지랄들은…….”

바람은 차고, 볕은 따듯한 봄날이었다.

[솔직히 그렇잖아. 너만 물 먹은 꼴이니까. 말하기 좋아하는…….]

“어떤 넋 빠진 새끼가 아직도 그런 소릴 해?”

박용근은 김문호의 말을 뚝 자르고 단박에 으르렁거렸다.

“야! 그런 놈 있으면 똑바로 좀 전해. 아니면 내 앞에 데려오든지. 그때 그 어린애가 어머니 병원비와 수술비 좀 해 달라고 얼마나 매달렸어? 그거 끝까지 1년 뛰어 봐야 한다고 했던 놈들이 누군데!”

[너는 왜 나한테 그러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니까 그렇지! 내가 그 병원비 대겠다고 집 대출받는 거 알고 일본에 갔던 애야! 그런 애를 씹어서 완전히 돈에 팔려 간 것처럼 만든 놈들이 누군데! 다른 놈들은 다 몰라도 너는 그런 소릴 그냥 들으면 안 되지!”

[알았다, 알았어. 누가 뭐래냐? 단지 이쪽에서는 지우가 활약하는 거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만 알라는 거다. 어차피 너나 나나 주류도 아니고. 심지어 마지막 불꽃일 거라고까지 하더라.]

박용근은 나직하게 한숨을 토해 냈다.

이 어린이 축구 교실도 사실 김문호가 힘써 줘서 왔을 정도로 유일하게 남은 인맥이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내가 너를 모르냐? 아무튼, 녀석이 활약하는 거 보니까 이상하게 콧날도 시큰하고 그렇다. 저기…….]

“뭐?”

[아니다.]

혹시나 정지우가 연락하지는 않았는지 궁금한 거였다.

지난 6년간 쭉 그랬었으니까.

[거기는 할 만하냐?]

“그럭저럭 재밌다.”

[에효! 너도 참! 국가대표 감독을 해도 할 놈이…….]

“시끄럽다. 그거 아무나 하냐? 야! 애들 온다. 끊어.”

[그래. 다음에 소주나 한잔하자.]

전화를 끊은 박용근은 멍하나 인조 잔디가 깔린 운동장을 보았다.

대출을 좀 더 빨리 받았어야 했다.

하필이면 그 대출 서류를 녀석이 볼 게 뭐였는지.

박용근은 하늘로 시선을 들었다.

얼굴이 따가울 정도의 햇살이 내리쬐는, 모처럼 눈부신 날이었다.

‘에이……!’

전은주가 그렇게 신신당부하는 선크림을 안 바른 것이 떠올랐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나쁜 놈. 보고 싶지도 않냐?”

또 한 번 씁쓸하게 웃은 박용근이 몸을 일으켰다.

축구공보다 작은 머리를 가진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걸어오는 것을 보고 나서였다.

***

간단하게 아침 식사를 마친 정지우가 그동안 정리해 놓았던 선수들의 자료를 들여다볼 때였다.

찌르르릉!

요란하게 벨이 울렸다.

월요일 아침이다.

올 사람이 없는데?

정지우는 인터폰 버튼을 눌렀다.

“Who's that?”

“나다.”

이 양반이 웬일이지?

정지우는 얼른 현관문의 버튼을 눌러 주었다.

어차피 열어 줄 문이다. 방문을 열자 계단 소리와 함께 유정호가 빠른 걸음으로 올라왔다.

“형이 어쩐 일이야?”

“너는 왜 만날 전화기를 꺼 놔?”

정지우는 TV 위에 있는 전화기를 보았다.

“방전됐었나 본데?”

“충전 좀 해라.”

유정호는 코트를 벗어 소파에 놓고는 제집처럼 주방으로 움직였다.

“커피 탈 건데 마실래?”

“아니.”

하여간 이 양반도 참 허물없이 지낸다.

물이 끓자 유정호는 인스턴트커피를 타서는 탁자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너 이제 됐다.”

“뭐가?”

유정호는 딱 입이 근질거리는 얼굴이었다.

“오퍼 왔다. 소속 팀 던캐스트, 유니온 시티, 그리고…….”

뭔데 이렇게 흥분해서 이러지?

“궁금하지?”

“아니.”

정지우의 답을 들은 유정호가 김빠진다는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덜랜드에서도 오퍼 왔어, 인마!”

정지우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

“왜? 너한테 직접 연락 온 팀도 있었냐?”

“미안한데, 나 이번 계약 끝내고 그만둘 생각이야.”

커피 잔을 들던 유정호가 굳어 버린 사람처럼 정지우를 보았다.

“감독님 찾아뵙고 사죄드리려고.”

“그거하고 선수 생활 그만두는 게 무슨 상관인데? 연락했었냐?”

“아니.”

정신이 돌아온 듯한 얼굴의 유정호가 물끄러미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그동안은 솔직히 무서웠어. 그런 짓을 해 놓고 다시 찾아뵙는다는 게.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감독님 뵙고 사죄드리고…….”

입을 다물고 있는 유정호를 보자, 이번에도 또 미안할 짓을 저지르는구나 싶어서 정지우는 말끝을 흐렸다.

“미안해, 형.”

사과를 들은 유정호가 픽 하고 웃었다.

“감독님께 사죄는 해. 해야 하는 거고. 그런데 어차피 계약하고 나면 휴식기 있잖냐. 그때 가서 하면 안 되는 거냐?”

솔직히 생각해 보지 않았던 일이다.

아스널전에서 기회가 올지도 몰랐고, 브리스톨 시티전의 게임까지 딱 두 게임으로 오퍼가 올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하자! 계약 끝내고 휴식기에 찾아봬. 너 어차피 한국에 갈 때도 됐다. 어머님도 뵈어야 할 거고.”

정지우는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유정호의 말대로 했다가 박용근이 용서를 안 해 주면 또 소속 팀에서 경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정지우는 마음을 굳히고 유정호를 바라보았다.

“마음을 비우지 않았다면 아스널전과 브리스톨 시티전에서도 그런 집중력 안 나왔을 거야. 계약은 감독님께 용서받고 나서 생각할게. 솔직히 용서하실 것 같지도 않고.”

“너 다른 데 계약 와서 이러는 건 아니지?”

정지우가 웃는 것을 본 유정호가 얼른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 너를 잘 아는데 요즘 이 바닥이 하도 그래서. 알았다. 그건 좀 고민해 보자. 아무튼, 세 곳에서 동시에 오퍼가 왔다는 건 다른 쪽에서도 움직임이 있을 수 있는 거니까 어디에고 함부로 답을 하지는 마.”

“형?”

“그만둔다는 말도 하지 말고. 대신 감독님께 사죄 못하면 선수 생활 계속하란 말 안 할게. 어차피 이전같이 해 봐야 너도 비전 없을 거고. 그렇지?”

정지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정호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느닷없이 달라졌다 싶었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렸으면 진즉 찾아뵙지, 왜 이러고 있었어?”

“그러게.”

정지우는 바보처럼 웃고 말았다.

분명 마음의 짐 때문인 건 알았는데, 그만두겠다고 마음먹는 순간에 이렇게까지 바뀔 줄은 몰랐었다. 그 외에 릴리와 빌 때문이기도 했는데, 그런 걸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에효! 됐다. 말해 뭐하냐. 슬럼프라면 슬럼프인 거지. 이제 그걸 벗어날 방법이 뭔지 알았으니까 일단 그걸로 된 거다.”

“고마워.”

“괜찮아, 인마. 난 너 이러는 거 정말 좋다. 그래. 박 감독님을 찾아뵙기는 해야지. 아무튼, 팀이나 접촉 오는 쪽에 함부로 말하지는 마. 네 신상에 관한 건 무조건 내 입에서 나가는 게 맞아.”

“알았어.”

유정호가 식어 버린 커피를 마시고는 잔을 내려놓았다.

“너, 이번 게임 한국에서도 보도는 했는데……. 반응은 짐작하지?”

이런 건 대꾸할 필요도 없어서 정지우는 그냥 고개만 끄덕여 주었다.

“에이! 안 되면 나랑 매니지먼트 일 같이하면서 살면 되지. 간다. 일주일쯤 있다가 올게. 몸조심 잘하고.”

유정호가 이마의 상처에 시선을 주며 던진 인사였다.

정지우는 그를 따라 일어나서 문을 열어 주었다.

“야! 전화기 충전 좀 해!”

“알았어.”

문을 나서던 유정호가 다짐을 받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솔직히 아직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리 욕심도 나지 않았다.

단 두 게임에 세 팀에서 오퍼라?

하긴 한 팀은 원소속 팀이고, 다른 한 팀은 임대 와 있는 팀이니까 그게 그거긴 하다.

정지우는 문을 닫고 움직여 탁자에 앉았다.

다 필요 없다.

마음껏 할 수 없다면, 공연히 유럽을 빌빌거리며 살 거라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사는 것이 맞는 거다.

지난 6년을 바보처럼 살았던 것으로 교훈은 충분히 얻었다.

***

마틴은 책상에 앉아서 검지로 머리를 긁었다.

[Ji의 매니저가 우리는 물론이고, 던캐스트와 심지어 선덜랜드의 오퍼에 대해서까지 답을 뒤로 밀었다면 분명 또 다른 곳에서 접촉이 있었다는 뜻이지.]

왼손에 든 전화기를 통해 들리는 쥬피터 회장 목소리에 그의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짐작 가는 게 없나?]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흠, 그가 원래 돈에 민감하다는 과거 보도를 보긴 했는데, 그렇다면 누군가 우리보다 높은 금액을 불렀다는 뜻인가?]

어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넘겨짚어서라도 이유를 가져다 붙이는 사람이 쥬피터다.

그가 버릇처럼 만들어 내는 이유를 마틴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자네가 그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워.]

마틴은 ‘젠장!’ 하는 욕을 삼켰다.

달랑 6개월 임대 온 선수다.

그것도 붙박이 골키퍼 얀센의 명목상 서브로, 싸다는 이유로 데려다 놓은 선수를 통제해야 했다고?

[훈련은 언제부터지?]

“내일까지 쉬고, 수요일에 소집입니다.”

[Ji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 주게.]

더 나가면 엉덩이춤을 추더라도 관심을 얻으라고 할 기세여서, 마틴은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선수들이 원하는 관심은 출전입니다.”

[이보게, 마틴.]

마틴의 답이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단박에 쥬피터의 음성이 달라져 있었다.

[자넨 게임을, 나는 구단을 책임져야 하네. 그리고 난 우리 두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지내기를 원해.]

“그래야지요.”

마틴은 한 발짝 물러났다.

이 시기에 고작 한국인 선수 한 명 때문에 구단주와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Ji에게 관심을 보여 줘.]

“알겠습니다.”

[유니온 시티를 위한 자네의 헌신에 늘 감사하네.]

마틴을 해임하고 난 뒤의 인터뷰 기사에서 쓸 법한 멘트를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후우!”

마틴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머리를 긁었다.

속없는 웃음이 픽 하고 나왔다.

두 게임에서 보여 준 실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면 정지우는 선덜랜드가 아니라 분명, 맨유나 아스널, 리버풀, 첼시에서 오퍼를 하고도 남는 선수다.

선수의 재능을 알아보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그 팀의 감독들이 정말 정지우를 점찍은 걸까?

그래서 물밑에서 접촉을 시작한 거라고?

마틴이 인정하지 못하는 정지우의 숨겨진 재능을 그들이 보았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이 쥬피터가 저리 몸 달아 하는 이유이기도 할 테고.

얼른 계약해서 프리미어리그 상위 팀에 판다면?

지난 5년의 유니온 시티 운영비가 한 방에 나올 일이니, 쥬피터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설 만도 하다.

마틴은 얼른 전화기를 들었다.

아무래도 정지우에 대한 자료가 필요했다.

그가 일본과 영국에서 기록한 경기 에버리지로는 지난 두 게임이 설명되지 않아서였다.

두 달 뒤면 누가 데려가도 데려간다.

그러나 그때 정지우의 소속 팀이 유니온 시티가 아니라면 마틴은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이게 될 게 분명했다.

까짓것, 유니온 시티에서 쫓겨난다고 해도 챔피언십에서 오랄 곳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지난 5년을 공들여 프리미어리그로 입성하려는 순간이다.

이걸 망쳐?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멋진 커리어를 쌓을 기회를 날리라고?

통화 버튼을 누른 마틴이 전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바쁜가?”

자리에서 일어난 마틴은 정수기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Ji의 과거 기록을 보았으면 해. 한국에서의 경력, 보도 자료, 가십, 그 외에 관련된 자료 전부.”

상대의 답을 듣는 동안 마틴은 홍차 티백을 잔에 넣었다.

“부탁해.”

전화기를 내려놓은 마틴은 포트의 버튼을 누르며 책상을 보았다.

왜 일이 이렇게 되었지?

고작 두 게임에 감독의 목을 흔들 정도로 뛰어난 선수를 여태 벤치에 앉혀 놓고 있었던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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