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9화 (9/262)

제4장. 저 녀석은 일어설 거야 (1)

공은 골대를 아슬아슬하게 빗겨서 밖으로 나갔다.

“우!”

그리고 그와 동시에 관중들이 커다랗게 탄성을 질렀다. 공을 걷어차려던 라파엘이 정지우를 들이받았기 때문이다.

선수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마틴이 보기에도 섬뜩할 정도의 충돌이었다.

삑! 삑!

레프리가 휘슬을 불며 팀 닥터를 재촉했다.

“여보!”

전은주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을 때, 박용근은 쭉 찢어진 눈으로 모니터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어떡해!”

영국에서 벌어지는 축구 경기다.

한국에서, 그것도 불법 도박 사이트를 통해 보는 박용근에게는 정지우를 도울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전은주는 그렇게라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모니터에는 라파엘이 정지우의 가슴을 걷어차며 엎어지다가 반대쪽 무릎으로 얼굴을 찍는 장면이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나왔다.

“괜찮아.”

박용근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은 일어설 거야.”

그러고는 혼잣말처럼 말을 건넸다.

“지우는 정말 강한 녀석이거든.”

박용근의 마지막 말은 마치 그가 전하는 바람처럼 들렸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골키퍼는 포지션의 특성상 어지간히 시간을 끌어도 필드 바깥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팀 닥터가 달려왔을 때 정지우의 왼편 이마에는 피가 흥건하게 흐르고 있었다.

“Ji! Ji!”

거즈로 이마를 누른 팀 닥터가 다급하게 정지우를 불렀다.

이렇게 의식을 잃으면 위험한 거다.

‘교체해야 돼.’

그가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가슴에 달린 무전기의 버튼을 누를 때였다.

“끄응.”

눈을 뜬 정지우가 팀 닥터를 본 후에 상체를 일으켰다.

“Ji! 내 말 들려? 날 알아보겠어?”

“괜찮아요.”

“무리할 필요 없어! 교체하자.”

“괜찮다니까!”

상체를 세운 바람에 왼편 눈썹으로 피가 떨어지는데도 정지우는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길 봐!”

팀 닥터가 오른손 엄지를 세워서 정지우의 눈앞에서 움직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는 정지우다.

그래서 정지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팀 닥터의 손가락을 향해 끝까지 시선을 주었다.

“큰 부상은 아니어도 두 바늘은 꿰매야 해. 그러니 일단 교체하자.”

“경기 끝날 때까지만 버티게 해 줘요.”

팀 닥터가 잠시 정지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겠어?”

“부탁할게요. 지혈만 시켜 줘요.”

무엇이 이 선수를 이렇게까지 내모는 걸까?

몸이 재산인 프로 선수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버틸까?

팀? 감독? 아니면 유니온의 관중?

주변을 둘러본 팀 닥터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리고 그는 벤치를 향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우- 와아!”

대강 상황을 눈치챈 관중들이 함성을 쏟아 낸 다음이었다.

상처를 닦아 낸 팀 닥터는 지혈제를 바르고, 거즈와 테이프를 이용해 상처를 덮었다.

“붕대는 감는 게 좋아.”

“일단 이렇게 경기할게요. 나머지 치료는 하프 타임 때 하죠.”

팀 닥터가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뱉지는 않았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이 고집불통아!’ 하는 눈빛이었다.

“경기 도중에 어지럽거나 속이 울렁이면 바로 알려. 그건 약속해.”

“그럴게요.”

이를 꽉 깨문 팀 닥터가 정지우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벤치로 달려 나갔다.

정지우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이었다.

“우와- 아!”

함성이 브리스톨 시티의 홈구장 에쉬튼 게이트를 가득 메웠고,

짝짝짝짝짝짝짝짝!

관중들 전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지우를 향해 박수를 보내 주었다.

“괜찮아?”

주장 데이빗, 그리고 유니온 팀 선수들과 함께 라파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지우에게 다가왔다.

피식.

정지우는 팔을 뻗어 라파엘의 뒤통수를 툭 쳤다.

“나에게 달려들던 것처럼 상대 팀 선수를 상대해. 남은 시간 동안 절대 놓치지 마!”

“오케이!”

라파엘이 그나마 안심된다는 얼굴로 답을 했다.

“Come on!”

주장 데이빗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바꿨다.

게임 시작이다.

당연하게 브리스톨 시티의 윌슨이 코너킥을 준비했다.

그가 공을 모서리에 놓는 동안 정지우의 앞으로 키가 큰 아마디가, 그 옆으로 모리스가 붙어 섰다.

유니온 시티 선수들의 분위기가 묘하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주장 데이빗은 중앙에서 위치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고, 라파엘과 말더스가 기를 쓰고 아마디와 모리스에게 찰싹 달라붙어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는 몸을 밀어 댔다.

그 외에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브리스톨 선수들을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악착같이 따라붙었다.

확실히 유니온 시티 선수들의 분위기가 바뀐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묘한 변화는 상대 팀 선수들도 분명하게 알게 된다.

키가 큰 아마디가 등 뒤에 붙은 라파엘을 밀어 댔다.

머리로 정지우의 시선을 가리는 것과 동시에 점프할 공간을 먹고 들어오려는 의도였다.

좋은 말로 능숙한 놈이고, 나쁜 표현으로 교활한 놈이다.

점프를 하기 위해서, 그리고 윌슨의 코너킥을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했다.

‘어딜!’

와락!

정지우가 앞에 선 아마디의 등을 밀치는 순간이었다.

삐익!

주심이 날카롭게 휘슬을 불었고, 곧바로 윌슨이 공을 향해 움직였다.

퍼엉!

공은 힘차게 날아올라 곧바로 아마디의 이마를 향해 날아왔다.

정지우는 이를 깨물며 앞으로 움직였다.

정말이지 이런 덩치들과 하는 몸싸움은 1톤 트럭을 어깨로 미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화아악!

정지우와 아마디가 거의 동시에 뛰어올랐다.

질 줄 알아?

병원에 있는 릴리, 부모와 함께 경기장에 와 있는 빌, 그리고 이곳까지 응원 온 저 관중들 앞에서 골을 허용할 것 같냐고?

정지우의 얼굴 앞으로 아마디의 뒤통수가 솟구치는 순간이었다.

퍼억!

높다랗게 뛰어오른 정지우의 명치에 뒤로 젖힌 아마디의 어깨가 걸렸다.

기우뚱!

몸이 옆으로 밀려나는 순간에도,

툭!

정지우는 악착같이 공을 골대 밖으로 쳐 냈다.

그리고 그다음, 아마디의 어깨에 걸린 몸이 골대 쪽으로 기울면서 거꾸로 바닥에 떨어졌다.

털썩!

삐이익!

주심의 휘슬이 날카롭게 울렸을 때, 정지우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우우-!”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의 야유가 터져 나올 때, 주장 데이빗이 아마디의 가슴을 거칠게 밀어 댔다.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가 없다.

골을 넣으려는 선수와 막아 낸 선수가 뒤엉킨 거다.

아마디가 거칠게 항의했고, 데이빗은 데이빗대로 ‘비겁한 짓을 했잖아!’ 하며 달려들었다.

삑! 삑! 삑!

욕을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더는 손을 써서도 안 된다.

브리스톨 선수들이 아마디를 안으며 말렸고, 유니온 시티의 선수들이 주장을 감싸며 달랬다.

삑! 삑!

주심은 아마디와 데이빗을 불러서 잠시 가라앉히게 한 다음, 두 사람 모두에게 옐로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지우는 그때쯤 일어났다.

테이프 안쪽으로 피가 배어 나와 붉게 물들었는데, 아직 거즈 바깥으로 피가 흐르지는 않았다.

거센 파도처럼 몰아치던 브리스톨의 공격이 옐로카드로 마무리되었다.

골대 앞에 공을 찍은 정지우는 앞을 살폈다.

확실히 경기 시작 때와는 달랐다.

정지우의 부상과 이어지는 주장의 몸싸움 뒤에 보이는 유니온 시티 선수들의 눈빛이 말이다.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그리고 그건 유니온 시티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지우는 말더스에게 공을 차 주었다.

그가 공을 두어 번 치고 나간 후, 다시 라파엘에게 패스했고, 이어서 공은 카알에게 넘어갔다.

레믹이 오른쪽 라인을 따라 달리며, 공을 달라는 의미로 손을 아래로 뻗었다.

공간도 좋았고, 타이밍도 기가 막혔다.

그런데 카알은 엉뚱하게 왼편으로 공을 보냈다. 정지우까지 순간 ‘왜?’ 할 정도로 기습적인 패스였다.

“우와- 아!”

기가 막힌다.

주장 데이빗이 뻥 뚫린 블리스톨의 왼편을 무섭게 달리고 있었다.

투욱!

왼발로 공의 방향을 바꾼 데이빗이 골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누가 봐도 슛을 할 기회였다.

실제로 주장 데이빗은 슛을 할 것처럼 오른발을 들었다.

와락! 와라락!

수비수 둘이 등을 돌리는 동작으로 데이빗의 앞을 막아섰을 때,

툭!

정작 주장은 슛을 하려던 동작에서 공을 옆으로 밀었다.

“우와- 아!”

레믹은 완벽한 기회를 잡았다. 골키퍼 외에는 아무도 없는 일대일 찬스였다.

퍼엉!

그가 세차게 공을 찼고,

화아악!

몸을 날린 브리스톨의 골키퍼 톰 히튼의 손끝을 벗어난 공은 그대로 골대 안으로 들어갔다.

출렁!

“이예에에에!”

유니온 관중들이 함성과 함께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쉬튼 게이트가 흔들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함성이었다.

두 손을 높이 쳐든 관중, 옆 사람과 껴안고 펄쩍펄쩍 뛰는 관중들이 계속해서 비명 같은 고함을 질러 대고 있었다.

지켜 냈다.

성난 파도처럼 몰려들던 상대 팀의 공격을.

정지우는 양손 검지를 높이 치켜들며 브리스톨 골대 위쪽의 하늘을 보았다.

‘보이세요? 내가 지켜 냈어요.’

함성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제 감독님께, 그리고 사모님께 용서를 빌러 갈 생각이에요. 그동안 못난 모습 보여서 죄송했어요.’

정지우가 두 팔을 내리며 시선을 앞으로 주었을 때였다.

놀라운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코너에 달려가 있을 줄 알았던 유니온 선수들이 일제히 정지우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심지어 가장 앞에 달려오는 놈은 골을 넣은 레믹이었다.

“Ji! What a fucking my hero!”

놈이 거친 말을 뱉으며 정지우에게 달려들었다.

와락!

가슴이 뻐근했고, 이마가 지끈거렸는데 기분은 최고였다.

“Ji! You're great!”

주장 데이빗이 고개를 디밀며 정지우의 이마에 이마를 맞댔다.

지금 TV를 켠 사람이 있다면 정지우가 골을 넣은 줄 알았을 거다.

선수들이 모조리 정지우를 둘러싸고 등과 뒤통수를 두들겼고, 벤치에서는 하늘을 향해 주먹을 뻗었던 마틴이 스크립터와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에는 두 사람이 살지!”

관중들이 악을 쓰는 것처럼 응원가를 터트렸다.

쿵. 쿵. 쿵. 쿵. 쿵.

“레드와 블레이트가 사이좋게 지냈지!”

심판이 중앙선을 가리켰고, 선수들이 그쪽으로 움직이는 동안에도,

쿵. 쿵. 쿵. 쿵. 쿵.

“레드가 시합에 나가면 블레이트는 이렇게 말했어!”

응원가는 계속 이어졌다.

쿵. 쿵. 쿵. 쿵. 쿵.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저러다 목이 남아날까 싶을 만큼 유니온 관중들은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였다.

또다시 모니터 가득 정지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양손 검지를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보는 정지우의 모습이 초고속 카메라로 찍은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는데, 애잔하게 하늘을 보는 그의 눈빛과 표정이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저 순간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이어서 유니온 선수들이 다가와 정지우를 껴안고, 이마를 대는 모습이 느린 그림으로 나왔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지우야!”

전은주는 붉어진 눈을 껌벅이며 입 앞에서 연신 박수를 쳐 댔다.

힐끔 시선을 주었을 때, 박용근의 작은 눈도 분명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저 고집쟁이는 분명 잠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할 게 뻔하다.

전은주는 얼른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은 한 장면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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