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8화 (8/262)

제3장. 최선을 다하고 돌아간다. (2)

“브리스톨 시티의 홈구장 에쉬튼 게이트에 양 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습니다.”

선수들이 통로를 빠져나오는 TV 화면 뒤에서 캐스터의 음성이 들렸다.

“판트전에서의 패배를 씻으려는 마틴 글렉 감독은 오늘 한국 출신 골키퍼 정지우를 선발로 기용했습니다. 아이언 더비에서 정지우 선수가 과연 어떤 활약을 할지 기대되는 경기입니다.”

에쉬튼 게이트에 ‘Hey Jude’라는 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왜 이 곡을 트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영국 리그는 시합 전에 대부분 비틀스의 음악을 배경으로 넣는다.

운동장으로 나간 정지우는 선수들 중간에서 관중석을 향해 섰다.

간단한 행사와 함께 동전을 던져서 선공을 결정한다.

선공을 차지한 브리스톨 시티 선수들이 유니온 시티 선수들 쪽으로 움직이며 악수를 청했다.

말이 악수지, 안면이 없는 선수들끼리는 그저 손만 부딪치고 지나간다.

노란 유니폼을 입은 정지우의 앞으로 브리스톨 시티의 골키퍼 톰 히튼이 다가왔다.

“Good luck.”

톰 히튼이 건넨 인사에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하며 인사했다.

“우- 아- 와!”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들어서자 엄청난 함성이 에쉬튼 게이트를 들썩였다.

정지우는 중계석을 기준으로 왼편 골대로 움직였다.

이럴 때면 유독 가슴이 두근거린다.

잔디가 축구화에 밟히는 감촉, 승부가 결정 나기 전에 마시는 숨, 그리고 우리 팀 관중들의 함성을 들을 때 말이다.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마틴이 자리한 벤치 뒤에서 원정 팀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이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검은 옷에 노란 조끼를 걸친 보안 요원들이 유니온 시티 응원단을 완벽하게 둘러싸고 있을 만큼 관중석의 분위기는 살벌함 그 자체였다.

토요일이다.

저기 응원단 어디엔가 덩치가 산만 한 빌의 아버지 토미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 빌과 응원가를 부르고 있을 거다.

‘고마워! 고마워, Ji!’

초대권을 건네주었을 때 그는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가족을 제외하고 그의 삶에서 유일한 위안인 축구, 그것도 그 어떤 경기보다 보고 싶은 브리스톨과의 경기 초대권이다.

얼마나 기뻤던지 그는 레슬링 경기 초대권을 받은 아이처럼 하늘로 초대권을 들어 올리며 소리 질렀고, 이어서 정지우를 세차게 끌어안기까지 했다.

놀라서 달려 나온 그의 아내 샌디의 반응 역시 토미와 다르지 않았다.

‘Oh my Godness!’

날카로운 비명처럼 ‘세상에!’를 외치며 입을 틀어막았던 샌디는 토미와 빌, 그리고 정지우를 끌어안으며 비명을 멈추지 못했다.

어려운 삶, 빡빡한 여건에서 꼭 보고 싶었던 경기를 보게 된 한 가족의 모습으로 초대권을 건네준 보람은 충분히 받았다.

프로 선수다.

이제는 저렇게 응원하는 관중을 위해 이 게임에 최선을 다할 때였다.

정지우는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시며 골대의 중앙에 자리 잡았다.

6년 만이다.

릴리 덕분에 찾아낸 열정이 빌과 유니온 시티 관중들의 함성을 타고 피어나고 있었다.

정지우는 중앙선 위쪽의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이걸 원하셨던 거예요?’

릴리를 만나게 된 것이 어쩐지 우연 같지는 않았다.

삐이익!

“우- 아- 와!”

경기가 시작되었다.

박용근은 아내 전은주와 함께 작은 방 책상에 앉았다.

부천의 중동에 있는 작은 빌라였다.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 빌라에서 새벽 3시 30분에 축구 경기를 보면 단박에 위, 아래층에서 난리가 난다.

그래서 두 사람은 데이트하는 연인처럼 이어셋을 한쪽씩 나누어 귀에 꽂고 있었다.

새카맣게 탄 얼굴, 쭉 찢어진 눈, 고집스러운 입술, 짧은 곱슬머리의 박용근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시선을 주는 반면에, 전은주는 감정을 누르려는 것처럼 자꾸만 코와 입을 가렸다.

TV가 아니라 컴퓨터로 보는 중계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방송이 편성되지 않아서 이런저런 사이트를 뒤지다가 불법 도박 사이트를 찾아냈다.

삐이익!

게임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잘해! 잘해, 지우야!”

기도 같은 전은주의 바람이 화면을 향해 달려 나갔다.

브리스톨의 선공이었다.

클레이 윌슨이 툭 밀어 준 공을 모리스가 뒤로 돌렸다.

둥둥! 둥둥둥!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

우리는 세계 최강 팀!

둥둥! 둥둥둥!

“The world has ever seen!”

세상에 나왔던 팀 중에서!

그사이 요란한 응원가가 브리스톨 응원단에서 터져 나왔다.

질 수 없다는 각오와 그만큼의 투지가 선수들 사이에 가득한 경기였다.

그 탓에 중앙선 부근에서 치열한 공방이 이뤄졌고, 공은 쉽게 한쪽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툭! 툭툭!

와락! 와라락!

누군가 공을 잡으면 반드시 2명 이상이 달려들었고, 거친 태클이 이어졌다.

몇 번이나 공을 빼앗고, 빼앗기던 도중이었다.

삐이익!

주장 데이빗이 상대 팀 선수를 들이받아 휘슬이 울렸고,

“와아- 아!”

“Go to hell!”

흥분한 관중들의 함성과 욕설이 동시에 쏟아졌다.

중앙선과 골대의 중간쯤이다.

윌슨이 킥을 준비하자, 브리스톨 선수들이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로 몰려들었다.

정지우는 자세를 잡으며 선수들의 위치를 살폈다.

“Hey! Hey!”

그러고는 악을 써서 말더스를 불렀고, 상대 팀 선수 아마디를 가리켰다.

키가 큰 데다 탄력까지 좋은 흑인 아마디는 어정쩡한 자세로 어슬렁거리다가 단숨에 달려들어서 헤딩을 따낸다.

말더스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그에게 움직였다. 원래 맡았던 선수를 어떻게 하느냐는 눈빛이었다.

삐이익!

그때 레프리의 휘슬이 날카롭게 들렸다.

퍼엉!

그리고 윌슨이 찬 공이 높고 길게 날아왔다.

정지우가 자세를 낮추는 순간이었다.

주장 데이빗을 밀치며 모리스가 달려들었고, 아마디가 공의 궤적을 향해 앞으로 움직였다.

둥둥! 둥둥둥!

북소리가 들린 직후,

불쑥!

아마디가 망설이던 말더스를 밀치며 뛰어올랐고,

터엉!

여유 있게 공에 머리를 가져갔다.

말더스는 확실히 아마디를 제대로 막지 못했다. 그래도 앞에 있어 준 것만 해도 도움이 됐다.

적어도 오른쪽은 막았으니까.

화아악!

정지우는 그가 헤딩하는 순간 몸을 높다랗게 띄웠다.

보인다!

아마디의 머리를 맞고 날아오는 공이!

터억!

공은 정지우의 손끝에 분명하게 닿았다.

“우- 와- 아!”

함성이 커다랗게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마틴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지우가 오른손을 뻗고 허공에 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에 말이다.

툭!

공은 골대 위로 튀어 올라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우- 와- 아!”

“이예에에쓰!”

거짓말 같다.

어떻게 저토록 골대의 왼쪽 구석을 정확하게 파고든 공을 막아 낼 수 있을까?

쿵. 쿵. 쿵. 쿵. 쿵.

유니온 시티 응원단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Go, Go, Go my Red! Go, Go, Go my Red!”

그리고 특유의 구호를 목청껏 외쳐 댔다.

경기 시작 5분쯤 된 시간이었다.

지금 골을 먹으면 이 경기는 이대로 마감될 수도 있었다.

“Good job!”

주장 데이빗이 정지우와 손을 마주치고 빠르게 중앙 지역을 지켰다.

코너킥이다.

선수들이 뒤엉켜 밀고 밀렸으며, 반칙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양손을 위로 들었다.

“라파엘! Hey!”

정지우는 이번에 라파엘을 향해 악을 쓰고 아마디를 가리켰다.

저놈을 막으면 수비는 반쯤 성공한다.

삐이익.

또다시 주심의 휘슬이 울렸다.

양손을 위로 들었던 윌슨이 공을 노려보며 신중하게 움직였다.

퍼어엉!

무언가 계획했었던 코너킥이다.

와락!

아마디가 덩치가 작은 라파엘을 밀어붙이며 달려들었는데 공은 그 위를 휙 지나갔다.

속았다!

골대의 반대편을 노리고 일부러 시선을 잡은 거다.

정지우는 오른쪽을 버리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리스가 공을 향해 발을 뻗고 있었다.

‘끄응!’

이럴 때면 오른쪽 허벅지와 허리가 끊어지는 것처럼 아프다.

이건 생각으로 나오는 동작이 아니다.

그냥 몸이 반응하는 거다.

퍼엉!

모리스가 허공에 떠 있는 공을 그대로 걷어찼다.

모든 것이 정지한 상태에서 오로지 공만 공간을 뛰어넘는 것처럼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와락!

바닥에서 50센티미터쯤 떠서 날아오는 공을 향해 정지우가 왼손을 뻗었다.

막고 싶다!

유니온 팀을 위해!

빌과 릴리를 위해!

헛되이 산 지난 6년을 위해!

투욱!

닿았다! 분명 손에 맞았다!

철렁!

“우와- 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함성이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정지우가 두 바퀴나 구르고서 골대로 시선을 돌렸다.

공이 옆 그물에 맞고 경기장 바깥으로 구르는 순간,

「What a wonderful goal keeping! Jiwoo Jung!」

캐스터의 흥분한 음성이 이어셋을 통해 고스란히 넘어왔다.

정지우가 공을 막아 내는 장면이 느린 그림으로 나오는 동안에도 캐스터는 연신 ‘Unbelievable!’과 ‘amazing!’ 따위의 빤히 알아들을 만한 감탄사를 쏟아 냈다.

선명하지 못한 화면이지만, 모니터는 내내 정지우의 모습을 가득 담았다.

양팔을 위로 들어 올리며 정지우는 분명 ‘Come on!’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유니온 시티의 관중들이 그런 그에게 손을 뻗은 채로 열광하는 모습이 보인 다음, 다시 정지우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담겼다.

그동안 훨씬 컸고, 어른스러워지긴 했지만, 정지우는 예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지우야!”

전은주는 두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두 번째 코너킥이다.

삐익! 삐익! 삐이익!

주심이 신경질적으로 휘슬을 불고는 골대 앞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주장 데이빗과 아마디를 불러 따로 주의를 주었다.

“Ji! Ji!”

말더스가 먼저 정지우를 불렀다.

‘누굴 막을까!’

놈은 마침내 이기고 싶다는 열망이 완벽하게 피어오른 눈을 하고 있었다.

정지우는 모리스를 가리켰다.

“Okay!”

말더스가 모리스를 껴안다시피 달라붙었다.

겨드랑이에 양팔을 끼우고 손을 쭉 뻗었다.

밀고 밀리고, 상대방의 상의를 잡는다.

이런 걸 다 잡으면 챔피언십은 경기가 아예 진행되지 않는다.

삐이익!

심판의 휘슬이 날카롭게 울린 다음이었다.

퍼엉!

윌슨이 찬 공이 다시 높다랗게 날아왔다.

골대의 중앙은 주장 데이빗의 몫이다.

그 지점을 굳게 지키던 그가 윌슨이 찬 공을 헤딩으로 받아 냈다.

공은 널따랗게 둘러선 브리스톨의 테일러가 받았다.

툭!

그가 윌슨에게 패스를 건네는 순간이었다.

“우와- 아!”

카알이 공을 가로채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유니온 시티의 선수들이 일제히 달려 나갔고, 누구보다 앞서 레믹이 뛰었다.

퍼엉!

카알이 낮게 걸어 준 공을 레믹이 받았다.

“Hey!”

오른쪽으로 달리던 스웰던이 커다랗게 고함을 질렀으나, 레믹은 중앙을 뚫고 달렸다.

한 명을 제치고, 그가 헛다리를 짚는 것처럼 페인트를 하는 순간이었다.

툭!

뒤에서 달려온 브리스톨의 스쿠스가 공을 가볍게 밀어냈다.

공을 받은 건 피어슨이었다.

그는 멀리 있는 앤더슨을 향해 공을 차 주었고, 앤더슨은 받은 즉시 모리스에게 밀어 주었다.

역습의 교과서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투욱!

모리스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오른쪽 페널티 에어리어로 공을 찼다.

윌슨이었다.

내내 코너킥을 담당했던 윌슨이 뻥 뚫린 유니온 시티의 골대를 향해 공을 차며 달려들었다.

공격 3명에 수비수 셋!

정지우는 이를 악물며 주변을 훑었다.

윌슨이 치고 들어오고, 모리스가 중앙으로, 가장 신경 쓰이던 아마디가 왼편 구석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직접 슈팅? 낮은 패스? 높게 날리는 크로스?

정지우는 윌슨이 달려드는 방향의 골대 기둥을 향해 바싹 다가섰다.

이러면 공격수는 선택의 폭이 줄어든다.

“헉헉!”

뒤늦게 달려온 라파엘의 숨소리가 거칠게 들리는 순간,

퍼엉!

윌슨이 반대편 골대를 향해 강력한 슛을 날렸다.

그라운드에 낮게 깔린 공이 한 번 툭 튀었다.

보인다! 보이면 막는 거다!

막는다! 막을 거다!

휘익!

정지우가 몸을 날리는 순간이었다.

삽시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터억!

분명 공은 손끝에 걸렸다.

그리고 그 순간,

퍼억! 콰작!

정지우의 가슴과 얼굴로 엄청난 충격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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