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5화 (5/262)

제2장. 날 위해서? (2)

집으로 돌아온 정지우는 노트를 펼쳤다.

판트에 대한 분석이었다.

챔피언십 팀들은 주로 4-3-3이나 4-4-2를 즐겨 쓰는데, 판트는 시종일관 지겹도록 4-4-2를 고집하는 팀이었다.

웃긴다.

와서 지난 4개월 동안 리그에서 한 게임도 못 뛰면서 한 일이 이런 거라는 게.

그래도 준비는 하는 게 맞다.

정지우는 다시 노트에 시선을 주었다.

리베르트, 29세, 네덜란드 출신의 공격수.

은잠비, 27세, 세네갈 출신, 역시나 공격수.

판트는 이렇게 두 놈만 조심하면 특별할 거 없는 팀이다.

대신 막아 내기 더럽게 까다로운 놈들이기도 했다.

특히나 리베르트는 좌우에서 올라온 센터링을 귀신같이 달려들어 골로 만드는 능력을 지녔는데, 정지우가 보기에 그건 본능 같은 거였다.

흔히 골 냄새를 맡는다고들 한다.

그렇게 따지면 이놈은 아예 개코를 지닌 놈쯤 될 거다.

붙어 보고 싶다.

이놈이 잘하는 헤딩슛, 달려들며 날리는 강력한 슈팅을 막아 보고 싶다.

리베르트가 프리미어리그 소속 팀에 스카우트되지 않는 이유를 정지우는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도 있었다.

답은 간단했다.

놈의 슈팅 예비 동작이 크고 분명하다는 것.

챔피언십 팀들보다 프리미어리그 팀들은 확실히 수비 능력이 뛰어나고, 그만큼 선수 분석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런 곳에서 슛 직전에 어느 발을 쓸 건지, 어느 쪽으로 보낼 건지를 다 알려 주는 공격수가 살아남기는 어렵다.

정지우는 피식 웃으며 라파엘과 클레이를 떠올렸다.

라파엘은 주전, 클레이는 서브 중앙 수비수다.

만약 정지우에게 골키퍼 장갑을 맡기고, 두 놈 중 하나를 고르라면 곧바로 클레이를 선택할 거다.

녀석은 무엇보다 감각이 있었다.

지시를 이해하는 속도도 빠르다.

훈련하는 틈틈이 서브 선수끼리 발을 맞추곤 했는데 클레이는 정지우의 말을 따랐고, 골키퍼가 원하는 수비수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 결과가 프리미어리그 2위인 아스널전에서 나왔었다.

최소한 클레이에게 맡겼던 쪽에서 공이 오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고, 그 덕이 정말 컸다.

잠시 몇 가지 변수와 상상 속에서 게임을 진행하던 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먹을 시간이었다.

‘이 녀석이 올 때가 됐는데?’

찌르르릉!

웃음이 픽 하고 나왔다.

그렇게 웃는 낯으로 걸어간 정지우가 인터폰을 누르는 순간이었다.

“Ji!”

빌의 목소리가 인터폰을 통해 커다랗게 들려왔다.

달칵.

정지우는 버튼을 눌러 주었다.

판트와의 경기 전.

레드 블레이크의 분위기는 최고였다.

둥둥! 둥둥둥!

북소리가 먼저 울렸고,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

우리는 세계 최강 팀!

둥둥! 둥둥둥!

“The world has ever seen!”

세상에 나왔던 팀 중에서!

어느 팀이나 부르는 구호를 레드 블레이트의 관중들이 목청껏 외치고 있었다.

“긴말 않겠다. 저 응원가 들리지?”

마틴이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켰다.

“지금껏 잘해 왔던 것처럼 오늘은 판트를 상대로 승리한다.”

둥둥! 둥둥둥!

북소리와 응원 구호 소리가 점점 더 커지며 마틴의 마지막 말을 잡아먹고 있었다.

“자!”

마틴이 손뼉을 두 번 쳤다.

“가자!”

그리고 출구를 가리켰다.

주전 선수들이 피치로 나서는 동안, 서브는 벤치로 움직인다.

바로 2미터 앞이 그라운드고, 바로 뒤가 응원석인 자리다.

둥둥! 둥둥둥!

“We're by far the greatest team!”

둥둥! 둥둥둥!

“The world has ever seen!”

북소리는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고, 관중들의 구호는 귀를 파고든다.

어느 순간은 이 구호가 두렵고, 어느 순간은 소름 끼칠 정도로 힘이 되기도 한다.

프리미어리그 승격까지 승점 7점, 그리고 이틀 전 아스널 전에서의 짜릿했던 승리.

관중들은 경기 시작 전부터 이미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양 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나뉘어 섰고,

삐이익!

레프리가 경기 시작을 알렸다.

레드 블레이트의 선공이었다.

주장 데이빗이 카알에게 건넨 공이 다시 레믹에게 옮겨 갔다.

“와아!”

함성이 울릴 때, 정지우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레믹은 경기 전부터 아스널전에 나가지 못한 것이 못내 억울한 표정이었다.

가뜩이나 드리블을 좋아하는 놈이 보여 주고 싶기까지 하면?

하프라인을 겨우 넘어간 레믹이 3명에게 둘러싸였다.

툭!

저 와중에도 레믹은 공을 카알에게 차 주었다.

분명 재능은 있다.

그러나 버티다 못해 겨우 건네준 공에까지 재능이 담기지는 않는다.

덕분에 주변에 대기하던 판트 선수 둘이 단박에 카알에게 달려들었다.

퍼억!

그리고 판트의 은잠비가 카알의 어깨를 들이받았다.

가뜩이나 체지방이 없는 흑인이다.

거기에 근육이 있을 자리에 마치 탄력 죽이는 고무줄을 빽빽하게 집어넣은 것 같은 선수가 은잠비다.

한국이나 일본 같으면 벌써 파울을 선언했을 상황이지만, 챔피언십에서 저 정도는 그냥 넘어간다.

툭!

은잠비가 뺏어 낸 공이 리베르트를 거쳐서 왼편 저 너머로 날아갔다.

흔히 말하는 뻥 축구 같지만, 저렇게 공간을 훤히 내준 곳에 상대편의 공이 가면 수비가 단박에 흔들린다.

정지우는 리베르트만 보았다.

놈이 무섭게 레드 블레이트의 골대로 달려가고,

퍼엉!

발바닥으로 공을 한 번 굴린 판트의 레프트 윙이 골대를 향해 공을 날렸다.

리베르트의 오른손이 위로 들렸다.

저건 오른쪽 골대를 향해 헤딩을 한다는 의미였다.

제일 재수 없는 건, 저렇게 오른쪽을 노렸는데 공이 잘못 맞아 왼편으로 올 때다.

콰악!

라파엘이 리베르트와 동시에 몸을 띄우며 거세게 달려들었다.

덩치가 220파운드(100킬로그램)에 가깝고, 키가 180이 넘는 놈들과 부딪치면, 달려오는 1톤 트럭에 받히는 느낌이 든다.

오른쪽이라고!

정지우는 이를 꽉 깨물었다.

터엉!

리베르트의 머리에 맞은 공이 골대 오른쪽을 아슬아슬하게 위로 넘어갔다.

“우우!”

관중들의 탄성이 쏟아져 나올 때 정지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드 블레이트의 주전 골키퍼 얀센이 버벅거릴수록 당연하게 기회가 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레드 블레이트가 지길 바라는 마음은 없다.

정지우는 얀센이 공을 던져 주는 것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얼마 만에 경기를 보며 흥분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어제, 저녁을 함께 먹은 빌의 초롱초롱한 눈동자, 빌이 소개해 준 릴리의 간절한 소망 덕분인 건가?

아니면 노동의 대가로 이 자리에 나온 저 많은 관중들의 응원 때문일까?

공은 쉽게 판트의 진영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안다.

감독인 마틴도 알고, 지켜보는 서브들도 알고, 그라운드에서 땀을 내기 시작하는 선수들까지 모두 다.

아스널을 상대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라는 것도.

욕심이 나겠지.

아스널도 이겼는데 판트쯤이야!

그것도 서브가 섞인 1.5군이 나간 거니까, 그때 벤치에 있었던 1군 선수들은 더 멋진 걸 보여 주고 싶겠지.

툭툭. 툭.

공을 돌리던 레드 블레이트의 라파엘이 느닷없이 기다랗게 공을 차 냈다.

멍청이!

저런 것처럼 맥 빠지는 공격도 없다.

그것도 4-4-2를 사용하는 판트를 향해서.

삐이익!

카알이 헤딩하는 판트의 선수를 밀치는 바람에 레프리가 파울을 선언했다.

정지우는 양쪽 선수들을 빠르게 훑었다.

판트는 여유 있고, 레드 블레이트는 어딘가 어수선했다.

중앙선 부근에서 공이 오갈 때, 레드 블레이트는 확실히 공간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다.

툭툭!

벤치 바로 앞으로 공이 왔다.

“헉헉!”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

툭! 툭!

공을 건드리는 소리.

“Hey!”

공을 달라고 외치는 고함이 그대로 들린다.

투욱!

판트의 윙이 짧게 내준 공을 미드필더가 반대편으로 걷어찼다.

정지우는 얼른 리베르트를 찾았다.

‘막아! 리베르트를 잡으라고!’

그러나 수비수 라파엘은 은잠비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수비수가 라파엘만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라파엘만큼 센스 있게 리베르트를 막을 선수가 레드 블레이트에는 없다.

공중볼 경합, 몸싸움, 속도가 뛰어난 라파엘이 당연하게 리베르트를 막아야 하고, 걷어 내기와 패스가 강점인 말더스가 은잠비를 막아 줘야 한다.

그래야 골키퍼인 얀센이 방향을 잡는 거다.

‘은잠비를 버려!’

정지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랬는데 은잠비가 공을 잡는다면?

그때는 골키퍼의 능력을 믿어 줘야 한다.

퍼엉!

공이 날카롭게 골대 앞으로 날아왔다.

골키퍼 얀센이 다급하게 리베르트를 가리켰다가 자세를 잡은 직후였다.

은잠비와 라파엘이 뒤엉켜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러나 공은 그 둘을 훌쩍 넘어 리베르트를 향해 날아갔다.

‘젠장!’

늦었다.

거기에 말더스는 리베르트의 점프를 방해하지 못했다.

레프리 몰래 상의를 당기거나 점프하면서 밀치기라도 했어야 했는데!

‘왼쪽!’

얀센이 주춤하는 순간이었다.

터엉!

리베르트의 머리에 맞은 공이 골대의 왼쪽 모서리를 향해 날았다.

휘이익!

얀센이 뒤늦게 팔을 뻗으며 몸을 날렸으나,

철렁!

공은 골네트를 출렁이고는 그대로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우와아!”

원정 팀 판트의 관중들이 내지른 고함이 경기장을 들썩였다.

두 팔을 뻗거나 껑충껑충 뛰면서 기뻐하는 관중 앞으로 리베르트가 달려갔다. 그러고는 두 손을 치켜드는 몸짓으로 타오르는 열기에 기름을 부었다.

은잠비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리베르트의 어깨를 짚으며 뛰어올랐고, 판트의 선수들이 그를 감쌌다.

리베르트의 머리에 이마를 비비고, 어깨와 머리를 두드린다.

거친 숨을 토해 내고 달려서, 1톤 트럭 같은 상대 팀 선수들과의 몸싸움을 이겨 낸 다음, 마침내 골을 넣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러니 저때의 기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나.

“There's only one! Ribert!”

오직 한 사람! 리베르트!

판트의 관중석에서 리베르트를 위한 응원가가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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