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4화 (4/262)

제2장. 날 위해서? (1)

다음 날, 회복 훈련은 별거 없었다.

조깅과 스트레칭, 다시 조깅과 좀 더 강한 강도의 스트레칭을 반복하고, 거기에 골키퍼의 경우는 던져 주는 볼을 받는 훈련을 30분쯤 하는 것이 전부였다.

레드 블레이트의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정지우를 바라보는 선수들의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이 맞다.

오전 훈련이 그렇게 끝났다.

구단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어도 되고, 이대로 돌아가 집에서 식사를 해도 된다.

접시에 감자 으깬 것, 작은 고깃덩이, 바나나, 우유를 담은 정지우가 식탁에 앉았을 때였다.

“Ji!”

클레이라는 23살짜리 영국 놈이 정지우를 불렀다.

“앉아.”

“고마워.”

빈 식탁에 앉으란 것이 인사받을 일이라는 건 영국에 와서 처음 알았다.

정지우는 포크를 들어 감자 으깬 것을 입에 넣었다.

“우리 판트 경기에 대비해서 뭔가 짜야 하는 거 아냐?”

고기를 입에 넣은 클레이가 궁금한 눈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이틀 뒤가 판트와의 홈경기다.

“아스널과의 게임은 운이 좋았던 거야. 그리고 그런 것들은 코치가 할 일이지, 내가 끼어들 일도 아니고.”

“코치에겐 말 안 했어.”

클레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대꾸했다.

주전들은 거의 없어서 서브 선수들, 그중에서도 외국계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코치와 이야기는 대강 했다.”

“뭐?”

클레이가 놀란 눈으로 정지우를 보았다.

“클레이.”

“얍!”

“넌 감각이 좋아. 내가 골키퍼를 하며 선택하라면 이 팀에서 무조건 널 중앙 수비수로 부탁할 만큼.”

멍청한 건지, 단순한 건지.

프로 선수란 놈이 같은 서브 골키퍼에게서 칭찬을 들었다고 저렇게 좋아하는 표정을 짓다니.

“그런데 말한 대로 나는 골키퍼지, 코치가 아냐. 아스널전은 내가 골문을 지키는 동안, 네가 각도를 잡아 주었으면 하는 걸 부탁했던 것뿐이고. 판트와의 게임을 대비하고 싶다면 기록을 살펴서 상대가 잘 쓰는 발, 방향, 페인트 동작을 외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놈은 실망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마틴 감독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서 검지로 머리를 긁었다.

이겼을 땐 좋았다.

팀 분위기도 살아나서 이틀 뒤에 있을 게임을 기대해 볼만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정지우가 준 임팩트가 워낙 강렬해서 지역 신문은 그를 기용할 것을 강조하고 있었고, 회장은 내심 FA컵에서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게임이 끝나고 한 번, 회복 훈련을 하는 오전에 또 한 번.

마틴 감독은 두 번이나 녹화된 게임을 보았다.

“미치겠군.”

정지우가 저런 활약만 해 준다면……?

마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렇게 계속 활약하는 놈을 맨유나 첼시, 맨체스터 시티처럼 돈 많은 구단이 가만둘 리 없었다.

반대로 따져 보자.

지금껏 이름조차 생소하다는 건, 이제까지의 경기당 실점이 1.79라는 건, 정지우의 실력이 원래는 그 정도이고, 어제의 게임이 분명 그의 인생 경기라는 의미가 된다.

역시 믿을 건 기록밖에 없다.

그리고 에버리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긁적긁적.

마틴은 버릇대로 검지로 머리를 긁었다.

세 게임이다.

프리미어 승격을 위해 필요한 승점은 7점.

두 게임을 이기면 한 게임은 비겨도 채워지는 승점이다.

골키퍼는 다양한 능력을 보아야 한다.

정확한 킥, 공을 멀리 던지는 능력, 심지어 수비진을 이끌 카리스마까지 필요하다.

그렇더라도…….

마틴 감독은 새겨 놓은 것처럼 머리에 박혀 버린 정지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떻게 7미터 앞에서 반응할 수 있었을까?

190도 안 되는 키로 골문 구석에 정확하게 파고드는 공을 막아 내는 건 또 어떻고?

“후우!”

마틴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흔들었다.

자칫하면 마지막 순간에 팀에 혼란을 줄 수도 있다.

“세 게임이다.”

자신을 일깨우는 것처럼 마틴은 혼잣말을 뱉어 냈다.

“Ji는 FA컵에서 기회를 주는 거로 하지.”

저절로 고개까지 끄덕여졌다.

무엇보다 승격이 우선이다.

만약 정지우가 어제처럼 활약한다면 FA컵에서 돌풍을 일으키면 되는 거다.

마음을 굳힌 마틴이 책상에 놓인 서류를 들었다.

클레이의 기록이었다.

이 녀석도 그동안은 기대하기 어려웠었는데, 정지우의 말대로 그날따라 아스널의 공격수를 정확하게 막아 냈었다.

자꾸만 정했던 마음 저 아래에서 스멀스멀 욕심이 피어올랐다.

“여기까지!”

마틴은 마음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해서 다음 시즌에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하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구단을 나선 정지우는 버스에 올랐다.

창밖의 풍경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다가왔는데, 그게 이상하게 씁쓸하게 느껴졌다.

‘벌써 3년이네.’

일본에서 건너와 이렇게 3년이나 영국의 구석에서 살았다.

억울한 일도 있었고, 답답할 때도 많았는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미안함과 외로움이었다.

약속해?

약속한다니까!

릴리 덕분에 6년 만에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날 얼마나 푹 잤는지 모른다.

정지우는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며 하늘을 보았다.

가장 먼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고, 다음으로 미안하고 죄송해서 차마 찾을 수 없는 두 사람의 얼굴이 그려졌다.

그때 조금만 더 현명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버스가 집을 지나쳤지만, 정지우는 그대로 있었다.

졸아서가 아니라 들를 곳이 있어서였다.

25분쯤 더 달린 버스가 정류장에 멈춰 섰을 때, 정지우는 버스에서 내렸다.

정류장에서 5분쯤 걷자 목적했던 성 마테오 병원이 앞에 있었다.

유니온 시티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병원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달려들었고, 덩치가 커다란 경비원, 다음으로 경비원만큼이나 체격 좋은 간호사들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올라간 정지우는 왼편으로 돌아서 세 번째 병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씨익.

저 녀석을 보면 웃음이 먼저 나온다.

금발, 커다랗고 파란 눈, 오뚝한 코.

정지우를 본 릴리가 손을 흔들었다.

침대 옆에 있던 릴리의 엄마가 고개로 안을 가리켰다.

들어와도 된다는 뜻인 거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간 정지우는 릴리의 엄마와 먼저 인사를 나누고 침대로 다가갔다.

“Hi!”

귀를 간질이는 깜찍한 음성으로 릴리가 인사를 건넸다.

영국 여자아이들은 어릴 땐 인형인데, 이런 아이들도 나일 먹으면 이상하리만치 덩치가 부푼다.

“How's today?”

“Fine, Ji.”

콧등이 가려웠는지 손등으로 코를 문댄 릴리가 정지우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게임은 봤어?”

“봤어!”

“약속 지켰다?”

“응. 언제 또 나와?”

오물거리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면서도 릴리는 하고 싶은 말을 다 전하고 있었다.

“다음 FA 게임? 아니면 좀 더 일찍 나올 수 있고.”

“Ji, 나하고 약속해서 그렇게 지켜 낸 거야?”

“그럼.”

릴리가 환하게 웃으며 자랑하고 싶은 것처럼 엄마를 보았다.

“Ji, 어제 게임 정말 멋졌어요! 릴리가 그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봤어. 고마워요.”

“릴리하고 약속해서 나도 더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었어요.”

릴리의 엄마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Ji, 나 Ji가 나오는 경기 또 보고 싶어.”

“노력할게. 일정 잡히면 바로 연락하고.”

“Ji.”

릴리가 엄마를 힐끔 보고는 정지우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 경기장에 가서 보고 싶어.”

정지우는 답을 하지 못했다.

이럴 땐 그냥 웃어 주는 게 제일 좋다. 어색해 보이는 웃음이라도 말이다.

“열 때문에 그래?”

“응. 네가 무균실에 또 가게 될까 봐 그렇지.”

릴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엄마가 말하는 대로 치료 잘 받아. 그래서 건강해지면 꼭 경기장에 와. 내가 이렇게……!”

정지우가 양팔을 쭉 펼쳤다.

“다 막아 버릴게.”

“날 위해서?”

“릴리를 위해서!”

만족한 듯한 릴리의 표정을 보며 정지우가 팔을 뻗었다.

작은 몸이 정지우의 품에 안겼다.

잠시 릴리의 등을 다독여 준 정지우가 몸을 일으켰다.

“갈게.”

“바이!”

정지우는 릴리의 손을 잡아 주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나설 때 ‘인사하고 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릴리 엄마가 정지우를 따라 병실을 나섰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걸 거다.

정지우는 몸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

머리와 덩치가 정지우보다 커다란 삼십 중반의, 우리말로 ‘순자’쯤 된다는 ‘메기’라는 이름을 가진 영국 아줌마였다.

“고마워요, Ji.”

“천만에요. 다음에 또 올게요.”

“Ji.”

메기가 몸을 돌리려는 정지우를 어색하게 불렀다.

“이런 거 방해된다는 거 잘 알아요. 하지만 Ji가 와 주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몰라.”

하고 싶은 말을 차마 바로 전하지 못하고 메기가 입을 다물었다.

개인주의가 강한 영국에서 프로 선수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게 무척이나 부담되고, 실례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 팀에 있는 동안은 자주 올게요. 내가 게임에 더 나가게 될지는 몰라도.”

“고마워요. 고마워, Ji.”

릴리 엄마와 인사를 마친 정지우는 병실을 나섰다.

병원에서 걸으면 넉넉하게 1시간쯤 걸린다.

정지우는 버스 대신 걷는 것을 택했다.

유니온 시티는 어디선가 쇠에서 풍기는 독특한 녹 냄새가 풍기는 듯한 도시였다.

오래된 건물들, 청바지와 낡은 셔츠에 점퍼를 걸친 사람들, 노동에 지친 표정까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의 그와 다르지 않은 모습과 표정이란 생각에서였다.

“Ji!”

길을 걷는 동안 덩치가 커다란 남자가 정지우를 알아보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Hi!”

그러고는 정지우가 답을 하자 기쁜 얼굴로 웃었다.

고작 축구, 그것도 FA컵 한 게임이다.

그런데 그것이 저들에겐 삶을 살아가는 희망이 된다.

프리미어리그 2위 팀을 이긴 짜릿한 쾌감이 일주일의 힘겨운 노동을 견딜 힘이 돼 주는 거다.

정지우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이대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미안해, 지우야.’

‘그런 소리 마세요.’

‘엄마가 우리 아들, 앞길을 막았어.’

마지막에 정지우의 손을 꼭 잡아 주었던 그 말랐던 손이 떠올랐다.

지금은 아프지 않을 거다.

그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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