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6화 (6/262)

제2장. 날 위해서? (3)

언제부터인지,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골을 넣은 팀이 응원가를 부르고, 골을 먹은 팀은 상대의 응원가가 울려 퍼지는 동안만큼은 침묵한다.

“One! Ribert!”

리베르트만 있을 뿐!

골을 넣은 리베르트의 응원가가 펼쳐지는 동안, 양 팀 선수들이 하프라인을 중심으로 나뉘어 섰다.

“You're supposed to be a big team!”

너희 원래는 대단한 팀이라며!

“You're not singing any more!”

너희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구나!

판트의 관중들이 악을 써 가며 레드 블레이트를 조롱해 댔다.

“우- 와- 아!”

그러고는 두 팔을 앞으로 뻗은 채로 판트 특유의 함성을 질러 댔다.

레드 블레이트의 관중들은 팔짱을 낀 채로 모욕을 견딘다.

정지우쯤은 한쪽 다리에 들어가고도 남을 커다란 청바지를 입은 여자, 금발에 안경을 낀 남자아이, 자루만 한 티셔츠를 입은 중년 남자, 해괴하게 머리를 자른 청년들.

저들 모두가 굴욕을 참아 가며 레드 블레이트의 승리를 원한다. 레드 블레이트가 골을 넣기를, 아스널전과 같은 극적인 승부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환호하고 싶어 한다.

툭.

주장이 카알에게 공을 건네주었다.

투욱.

카알이 후방으로 공을 밀었고,

툭!

라파엘이 곧바로 레믹에게 공을 차 주었다.

‘패스해!’

카알이 비었다.

레믹이 저 타이밍에 카알에게 공을 주고, 그 공이 주장 데이빗을 거쳐 반대편으로 넘어간다면 놈에게도 보다 확실한 기회가 생기는 거다.

“우아아!”

그러나 레믹은 공을 끌고 오른쪽 라인을 따라 달렸다.

‘개새끼!’

보기는 좋다.

당장 관중의 환호도 얻는다.

그러나 판트의 선수들에게 둘러싸이면 저 환호는 금방 탄식으로 바뀐다.

“아-!”

실제로 정지우의 생각이 멈추기도 전에 탄식이 울려 나왔다.

판트 선수가 막아 낸 공이 레믹의 발을 맞고 바깥으로 튀어 나간 탓이었다.

어느 팀이나 드리블러가 필요하다.

페널티 에어리어 근처에서 치고 들어갈 때, 실력 있는 드리블러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다.

그러나 외곽에서 저렇게 헛지랄을 떨면 그냥 그걸로 끝이다.

30번이나 50번에 한 번쯤 골을 넣을 때도 있고, 멋진 찬스를 만들어 줄 때도 있긴 하다.

그럼 뭐하나?

그동안 우리 팀은 10골에서 30골을 먹어야 하는데!

판트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처럼 보였다.

이기면 승점 3점, 비기면 1점.

지면? 그냥 꽝이다.

초반에 골을 넣은 판트는 여유 있게 공을 돌리며 전진하지 않았다.

툭! 투욱! 툭!

주장과 카알이 공을 뺏으려고 달려들었지만, 공보다 빠르지는 못했다.

마틴은 정지우의 앞 의자에 앉아서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민되겠지.

무조건 공격하라고 했다가 역습에 한 골을 더 먹게 되면 이 게임을 다 날리는 거고,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는 이대로 끝날 것 같고.

어떡해서든 동점 골을 만들어서 승점 1점이라도 건지고 싶겠지만, 판트가 저렇게 초반부터 잠그고 나온다면 그것도 쉽지 않다.

공은 판트의 진영을 계속 돌았다.

나갈 듯하다가 뒤로 돌리고, 다시 골키퍼를 거쳐 앞으로 나온다.

주장이 감독 마크를 힐끔 보았다.

‘어떻게? 밀고 나가?’

마크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위치를 지키며 판트와 동점을 노리겠다는 작전이 분명했다.

하긴, 초반 1실점이라면…….

그 순간이었다.

투욱!

하프라인 부근에 있던 공이 빠르게 레드 블레이트의 진영으로 넘어왔다.

“우와아!”

은잠비가 어느새 반대편으로 달려와 공을 몰고 달리고 있었다.

투욱!

그는 수비수가 달려들자 공을 패스했고,

툭!

공을 받았던 선수가 곧바로 달려 나가는 은잠비 앞으로 공을 차 주었다.

드리블러?

저렇게 동료를 이용할 줄 아는 스피드 빠른 놈이 훨씬 더 무섭다.

퍼엉!

달리는 속도를 살짝 죽인 은잠비가 골대를 향해 공을 띄웠다.

리베르트는?

정지우의 시선에 몸을 높게 띄운 리베르트가 보였다.

‘이런……!’

리베르트에게 라파엘과 말더스가 동시에 달라붙어서 점프를 막고 있었다.

‘멍청이!’

정지우가 욕을 삼키는 순간이었다.

판트의 주장이 번쩍 뛰어올라 멋지게 공을 들이받았다.

터엉!

철렁!

“우와- 아!”

은잠비가 없다고 해도 말더스는 저 공간을 지켰어야 했다. 그리고 레믹도 수비에 가담했어야 했다.

골을 처넣겠다는 욕심에 하프라인 근처를 어슬렁거려서는 골을 넣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팀이 이기기는 어렵다.

“You're supposed to be a big team!”

너희 원래는 대단한 팀이라며!

“You're only singing when you're hammering!”

너희는 망치질할 때만 노래하는구나!

판트의 관중들이 쇠를 주로 다루는 레드 블레이크의 관중들을 조롱하는 노래를 터트렸다.

훌리건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저렇게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걸 계속 듣다가 보면 누군들 울화통이 터지지 않겠나.

금발의 남자아이가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이 보였다.

부푼 꿈,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안고 들어왔을 아이다.

물론 패배를 받아들이는 훈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아버지의 고된 육체노동을 대가로 축구장에 들어선 저 어린아이에겐 너무나 잔인한 요구인 거다.

“우- 와- 아!”

판트의 관중들이 손을 앞으로 뻗어 가며 함성을 질러 댔다.

이후에 특별하게 눈에 띈 장면은 없었다.

승점을 지키고 싶은 판트, 더 이상 실점을 하지 않겠다는 레드 블레이트의 기운 빠진 공방전만 있을 뿐이었다.

삐이익!

레드 블레이트 관중들의 희망을 먹어 버린 전반이 그렇게 끝났다.

정지우는 장갑과 수건을 들고 라커룸으로 향했다.

서브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하게 걷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풀 죽은 선수들.

독이 오른 감독.

라커룸으로 향하는 길에 지르는 관중들의 응원과 고함.

비 오는 날, 축축하게 젖은 동물원을 갔을 때 풍기는 노린내 같은 땀 냄새가 운동장을 누볐던 선수들의 몸에서 풍겼다.

적응해서 지금은 괜찮지만, 처음 코앞에서 상상하지 못했을 만큼 강하게 풍겨 오는 냄새에 정말이지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자가락, 자가락.

축구화의 스터드가 지하 통로를 밟는 소리가 무겁게 들렸다.

라커룸에 들어선 선수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5분은 시간을 준다.

물을 마셔야 하고, 젖은 유니폼을 벗을 시간을 주는 거다.

경기를 뛴 선수들의 표정과 눈빛이 당연하게 좋지 않았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아니라면 자신의 플레이를 자책하는 심정 탓이었다.

이럴 때 뻔뻔한 놈도 있다.

레믹 같은 놈은 패스를 주지 않았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떠올린다.

정지우가 장갑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였다.

감독 마크가 라커룸으로 들어섰다.

“후반은 라인을 올린다.”

그리고 빤한 전술을 들고 나왔다.

2 대 0이라면 누구라도 총공격을 명령할 수밖에 없다.

후반이 시작되고 단박에 스코어는 4 대 0이 되었다.

경기가 아직 30분이나 남았음에도 관중들이 몰려 나갈 정도로 졸전이었다.

레믹은 끝까지 공을 몰고 설치다가 빼앗기고, 수비는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았다.

보여 주고 싶다는 마음을 접지 못하는 놈!

저러다가 한 골만 넣으면 기고만장해서 자신에게 패스가 오지 않아 골을 더 넣지 못했다고 설칠 놈!

경기가 끝나고 운동복을 정리한 정지우가 몸을 일으킬 때였다.

“Ji! 코치가 찾아.”

스크립터가 라커룸으로 상체만 넣은 채 말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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