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3화 (3/262)

제1장. 누구도 내 경기에서 골을 넣지 못한다. (3)

아직도 열기를 식히지 못한 관중들을 향해 유니온 시티 선수들은 두 팔을 들어 박수를 쳤다.

187의 정지우다.

골대의 높이 8피트는 충분히 커버하지만, 가로 길이 8야드인 스탠딩 커버리지를 감안하면 골키퍼치고 그리 큰 키는 아니다. 물론 그렇더라도 유니온 선수들에 비해 작은 키는 아닌 거다.

대부분이 육체노동자인 관중들은 목청이 터져라 악을 써 댔다.

“Ji! Ji!”

정지우는 관중석의 가장 앞에서 두 팔을 마구 흔들어 대는 빌을 향해 고개를 까닥여 주었다.

이런 게 저 어린아이에게는 꿈이고, 희망이 될지 모른다.

레드 블레이트는 희망을 잡아먹혀야 먹을 것을 구하는 그런 도시인 탓이다.

선수와 기자가 뒤섞인다는 믹스트존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결과가 뜻밖인 데다 기대하지 않았던 동양인 선수의 활약, 그리고 결승골이 워낙 극적으로 나와서 더 그랬을 거다.

아무튼, 정지우는 장갑을 벗고 믹스트존에 섰다.

“오늘 경기 소감을 먼저 말해 주세요.”

“팀원들이 잘해 준 경기였습니다. 무엇보다 홈팬들에게 승리를 선사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오늘 활약이 뛰어났는데 개인적인 소감은 어떻습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이후로 몇 가지 질문이 더 있었는데, 정지우는 계속 비슷한 답을 했다.

10분쯤의 취재가 끝났다.

정지우가 믹스트존을 빠져나갈 때, ‘정지우 선수!’ 하는 한국말이 들렸다.

정지우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라커룸을 향해 걸었다.

“야! 정지우!”

늘 이렇다.

한국 기자들은 믹스트존을 이용하지 않고, 언제고 불러 세우면 달려가서 원하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답을 해 줘야 하는 줄 안다.

그것도 관심이 있을 때 이야기지.

아마 내일 한국의 기사에 ‘인성이 부족한 선수의 활약’이라거나, ‘외국 기자에게만 답을 하는 정지우’, 그도 아니면 단신으로 처리될 테지만 상관없었다.

라커룸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정지우는 장갑을 내려놓고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를 마친 정지우가 옷을 차려입은 다음이었다.

“지! 코치가 찾아.”

스크립터가 다가와 고갯짓을 했다.

정지우는 라커룸의 문을 닫고 코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똑똑똑.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틴은 오래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커피?”

“괜찮습니다.”

“거기 좀 앉아.”

정지우는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오늘 멋진 경기를 했어.”

이런 건 따로 대답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경기를 설명해 줄 수 있겠나?”

정지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네의 과거 기록을 보자고. 경기당 1.79점을 실점했지. 물론 그동안 무실점이 없었던 건 아니야. 하지만 오늘 경기는 그 정도 수치로 설명할 수 없는 거다.”

마틴은 서류에서 시선을 들고 책상에 상체를 기댔다.

“그러니 오늘 경기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줬으면 싶다. 내가 선수의 실력을 몰라봤던 건지, 아니면 네게 무슨 특별한 능력이 생긴 건지.”

정지우는 이제야 마틴의 질문을 이해했다.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당연히 그래 줘야지.”

“오늘은 제대로 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동안은?”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마틴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지, 그동안 기용해 주지 않았다고 이런 대답을 하는 건 좋지 않아.”

“오해한 것 같은데, 이건 선발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마틴은 오른손으로 입 주변을 쓸면서 정지우를 노려보았다.

“좋아! 그럼 하나 더 묻지. 다음 게임을 맡기면 어떨 것 같은가? 그때도 제대로 해 보고 싶은 경기가 되나?”

“코치, 그전에 내가 하나 물어도 됩니까?”

“얼마든지.”

“다음 경기에도 제대로 하고 싶다면 내가 원하는 수비수를 기용해 줄 수 있습니까?”

마틴이 숨을 커다랗게 들이마시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동양인 선수에게서 흔히 보이는 순종적인 면이 없는 것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너의 대답에 달리기도 했지. 이젠 내 질문에 답을 해 보겠나? 다음 경기를 맡기면 그때도 제대로 해 보고 싶은 경기가 되나?”

“그건 전적으로 코치에게 달려 있습니다.”

“지! 난 이런 식의 말장난을 좋아하지 않아.”

“코치, 오늘 클레이의 움직임을 기억해 보십시오. 나는 내가 원하는 곳을 막아 줄 수비수가 필요합니다. 그런 조건이 갖춰지면 제대로 해 보고 싶은 경기가 되고, 아니라면 1.79의 실점을 합니다.”

마틴이 신음처럼 숨을 내쉬며 정지우를 노려보았다.

짧은 침묵이 흐른 다음이었다.

“알았다.”

“가 봐도 됩니까?”

마틴은 고개만 끄덕였다.

이제는 경기장 바깥에서 홈팬들의 함성이 들린다. 흥분한 관중들이 주차장과 경기장 출구에서 지르는 함성인 거다.

마틴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맛을 다셨다.

***

“Ji! You're so amazing!”

영국인 특유의 발음으로 빌이 외친 소리였다.

자랑하고 싶었던지 빌은 출구에 팔을 걸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쓱쓱.

정지우는 빌의 어깨를 쓸어 주었는데, 그사이 펜과 사인지가 20개쯤 달려들었다.

이런 건 프로 선수로 절대로 피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정지우는 사인을 해 주었고, 엄지를 치켜든 팬들과 사진을 찍었다.

“지! 집으로 가요?”

“그래야지.”

“같이 가도 돼요?”

“그러려고 기다렸던 거 아냐?”

사인하는 틈에도 빌의 질문은 멈추지 않았고, 정지우는 꾸준히 답을 했다.

30분쯤 지나자 안개가 걷힌 것처럼 주변에 몰려 있던 팬들이 사라졌다.

“가자.”

“오늘 굉장했어요!”

정지우는 빌을 향해 웃어 주었다.

짧은 금발이 사방으로 쏟아졌고, 볼에 주근깨가 가득한 전형적인 영국 남자아이다.

“난 Ji가 이렇게 굉장한 선수인 줄 알고 있었어요!”

이런 건 그냥 웃어 줄 수밖에 없었다.

조잘조잘.

빌은 버스를 타고서도 흥분을 가라앉힐 줄 몰랐다.

선수마다 구할 수 있는 초대권으로 온 경기다.

어쩌면 이 녀석에게는 오늘이 평생의 추억으로 남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흥분한 녀석의 모습을 보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경기에 나선 것이 얼마 만인가 싶을 정도여서 버스에 오르자 꾸벅꾸벅 졸음이 쏟아졌다.

‘약속 지켰어.’

빌의 흥분한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릴 때 정지우가 속으로 되뇐 말이었다.

오늘은 기뻐하는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입 한쪽이 살며시 올라갔다.

“Ji! Ji!”

꿈속에서 부르는 것처럼 빌의 음성이 들렸다.

“도착했어요.”

겨우 눈을 뜬 정지우는 우선 빌을 보았고, 다음으로 창밖을 보았다.

빌과 함께 오지 않았다면 원하지도 않은 버스 여행을 즐겨야 할 뻔했다.

끼이익! 치이이!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정지우와 빌이 순서대로 내렸다.

“다음 시합은 언제인지 알아요?”

“내일 훈련 끝나고 확인해서 알려 줄게.”

“지! 다음 시합은 사흘 뒤에 있어요! 판트와 홈경기요!”

정지우는 멋쩍게 웃었다.

경기 스케줄에 연연하지 않았지만, 본인이 생각해도 이 정도는 좀 심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들어가!”

“안녕, 지!”

빌이 인사를 하고 집으로 달렸다.

오늘 잠이 들 때까지 조잘거릴 게 분명했고, 축구 경기에 누구보다 열광하는 아버지가 그때까지 맞장구를 쳐 줄 거다.

낡은 아파트에 도착한 정지우는 입구에 들어섰다.

편지함을 확인하고, 다시 계단을 올라간다.

정지우는 3층으로 향했다.

터덕. 터덕. 터덕. 터덕.

모처럼 시합을 뛰고 났더니 당장 쓰러져 자고 싶을 만큼 피곤이 몰려왔다.

피식.

명색이 프로 선수가 이 정도로 지치다니, 자격 미달이라는 비난을 받아도 대꾸할 말이 없었다.

303호에 도착한 정지우는 열쇠를 꺼내 문에 꽂았다.

달칵! 끼이익!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와 식탁이 그를 맞았다.

가방을 던진 정지우는 방으로 향했다.

털썩!

그러고는 침대에 몸을 던지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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