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가문의 네크로맨서 22화
“저희들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최정훈은 진지한 눈으로 신유현을 바라봤다.
“제가 여러분들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요.”
신유현은 일부러 구체적인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다.
‘이 정도 일은 알아서 해야지.’
신유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요구가 막연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현무전의 핵심 간부들이었다.
이 정도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앞날이 깜깜했다.
그리고 중요한 포인트라면 이야기해 주었다.
그 어떤 일을 하든 자신에게 신뢰를 줄 수 있으면 된다고.
‘내가 믿을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 주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이 해야 할 일은 정해졌군요.”
최정훈은 빙긋이 웃었다.
어딘가 모르게 홀가분해 보이는 미소였다.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제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연화와 김재현도 최정훈과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흠.’
그 때문에 신유현은 속으로 살짝 놀랐다. 자신의 말에 그들이 싫은 기색을 보일 줄 알았으니까.
“앞으로는 저희들이 전력으로 전주님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최정훈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정말 자신을 따르기로 결심한 모양.
그들이 정말 진심인지 아닌지는 지켜보면 알겠지.
“그리고 주작전에서 내기 상품을 보내왔습니다.”
이어서 최정훈은 신유현에게 작은 보석함을 하나 내밀었다.
“드디어 왔나 보군요.”
신유현은 눈을 빛냈다.
주작전에서 내기 상품으로 보냈다고 하면 한 가지밖에 없었으니까.
파천신단(破天神丹).
마나를 증진시켜 주는 내단이 드디어 손에 들어온 것이다.
“신단을 전해 주러 온 주작전 녀석들을 전주님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군요. 정말 속이 시원했습니다.”
김재현은 자기도 모르게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수호검전들 중에서 주작전은 현무전을 아래로 보고 있었다.
특히 현무전이 관리하던 던전들을 가장 많이 빼앗아 간 곳도 주작전이었다.
그 때문에 재정을 담당하는 김재현은 주작전과 관련된 일이라면 눈살을 찌푸렸다.
수호검전들의 주된 수익원은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부산물들이었으니까.
“그때 주작전 녀석들의 표정은 잊을 수가 없네요.”
이연화도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김재현의 옆에서 따라 웃었다.
그녀 또한 주작전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했다.
본래라면 현무전에서 받을 예정인 문하생들을 주작전에서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며 가로채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주작전 녀석들이 죽을상을 하고 현무전을 찾아온 게 아닌가?
특히 파천신단을 넘겨받을 때는 막혔던 가슴이 뚫리며 전율이 등을 타고 달리는 통쾌함을 느꼈다.
평소 현무전을 우습게 보는 주작전의 간부들 중 한 명인 이명훈이 이를 악물고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넘겨주었으니까.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이연화와 김재현이 신유현을 따르기로 마음을 굳힌 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죠.”
신유현은 그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지금까지 다른 검전에 빼앗긴 것들을 다시 되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현무전을 재건하고 가문에서 영향력이 큰 조직으로 성장시킬 생각이었다.
게티아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앞으로 많이 바빠지게 될 겁니다.”
현무전을 재건하고 발전시키려면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당장 인재만 해도 가문의 문하생들뿐만 아니라 외부 조력자들을 영입할 생각이었으니까.
현무전의 재정을 늘리기 위한 사업가들이나, 무기와 장비들을 연구 개발하는 마도공학자들 등등.
지금은 무명이지만 미래에 두각을 드러내는 실력자들이 가문 밖에 묻혀 있으니 말이다.
“여러분들에게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신유현은 눈앞에 있는 인물들을 바라봤다. 그들에게는 적어도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신뢰를 얻는 일.
다른 하나는 앞으로 바빠질 현무전에서 그들이 해야 할 담당 부서의 일이었다.
현무전을 재건하고 발전하려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예, 맡겨 주십시오.”
최정훈은 심장에 오른 주먹을 가져다 대며 허리를 숙였다.
이어서 이연화와 김재현 또한 심장에 주먹을 가져다 대며 무릎을 꿇었다.
둘 다 파천검가식 인사법이었다.
그 모습을 본 신유현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 인사법에는 의미가 있었다.
당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 * *
이야기를 끝낸 최정훈 일행들은 지하 수련장에서 물러갔다.
그들이 신유현을 따르고 충성을 맹세하겠다는 모습을 보였지만, 아직 여러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현무전에 있는 모든 인물들이 나를 따르는 건 아니지.’
예전에 비해 현무전의 규모가 작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수십 명에 달하는 초인들이 남아 있는 상황.
아직 그들 모두가 신유현을 인정한 건 아니었다.
여전히 신유현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지만.’
현무전을 운영하는 핵심 간부들이 자신을 따르겠다고 뜻을 밝혀 왔다.
그리고 신유현이 가문 내에서 실적을 쌓고 다른 수호검전들에게 빼앗겼던 것들을 되찾아오는 모습을 본다면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자.’
현재 신유현이 해야 할 큰일은 다름 아닌 미확인 던전 게이트의 조사다.
그 일을 무사히 마친다면 가문 내의 평판이 올라갈 터.
‘일단 그 전에…….’
신유현은 자신의 손안에 있는 파천신단을 바라봤다.
파천신단을 섭취하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테지.
신유현은 지하 수련장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전신 혈도를 따라 차크라의 마나를 돌리기 시작했다.
차크라 연공법, 우파니샤드.
불사왕의 마나 연공법과 파천심법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생겨난 수련법.
기본적으로 차크라 연공법은 파천심법과 닮아 있었다.
파천심법과 마찬가지로, 차크라의 마나를 임맥과 독맥을 타고 돌리는 소주천을 시키니까.
현재 신유현은 2문까지 차크라를 개방한 상황.
1문 차크라 물라다나를 개방하면서 기력 개방을 한 것보다 훨씬 더 많고 고순도인 마나를 얻었다.
2문 차크라를 개방했을 때도 상당한 수준의 마나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꿀꺽.
가볍게 운기조식을 마친 신유현은 파천신단을 삼켰다.
‘으음.’
파천신단을 삼키자마자 방대한 마나가 몸속에서 터져 나왔다.
신유현은 곧바로 차크라 연공법 우파니샤드를 운용하면서 터져 나오는 마나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임맥과 독맥을 따라 마나를 돌리기 시작했다.
소주천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후.”
신유현은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기를 반복했다.
몸 안에서 파천신단의 마나가 야생마처럼 날뛰었다.
하지만 지금 신유현에게는 2문까지 개방된 차크라와 연공법 우파니샤드가 있었다. 거기에 이전 삶에서 마리아에게 배운 마나 제어법까지.
그 덕분에 야생마 같던 마나가 빠르게 온순해져 갔으며, 순한 말처럼 변한 파천신단의 마나를 조금씩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유현의 몸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신유현은 눈을 떴다.
그 순간.
[축하합니다! 차크라 수치가 56이 되었습니다.]
[당신은 3성 중급이 되었습니다.]
“후.”
길게 호흡을 내쉬며 신유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시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지만 오히려 몸은 가벼웠다.
또한 무엇보다 이전에 비해 마나 양이 상당히 늘어나 있었다.
“괜찮네.”
신유현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파천신단을 흡수하자, 3성 최하급에서 단숨에 중급이 된 것이다.
이제 차크라를 1포인트만 더 올리면 상급이 될 수 있었다.
‘지배력도 앞으로 1포인트인가.’
3성이 되고 지배력 수치가 41이 되면 세븐 아크스 중 한 명인 문곡성의 중재자 어둠의 성녀를 불러낼 수 있었다.
그녀를 불러낼 수 있다면 여러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겠지.
차원 전쟁에 대한 것이나, 타임 크라이시스가 무엇인지 등등.
그리고 불사왕과 마수들 및 게티아가 어떤 관계인지까지도.
“남은 건 미확인 던전 게이트를 조사하는 것뿐이군.”
* * *
어느덧 파천신단을 흡수한 지 이틀이 지났다.
신유현은 파천신단을 흡수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놀랍게도 반나절이 지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체감상 길어 봐야 30분 정도인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신유현을 습격했던 정태성 일행은 가문에서 퇴출당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부전주인 최정훈의 말로는 보상금을 좀 쥐여 줬다고 한다.
분명 입막음 비용이겠지.
또, 둘째 형인 신철진은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고 했다.
실제로는 근신 처분을 받은 것이지만 대외적으로는 폐관 수련에 들어간다고 한 모양이었다.
신철진은 프라이드가 높았으니까.
‘숙부님도 호락호락하지 않았지.’
2성 보스를 혼자 처리하면 숙부인 신성현이 후견인이 되는 걸 생각해 보겠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리고 어제, 신성현이 현무전을 찾아와 말했다.
이번 조사 임무를 무사히 마친다면 후견인이 되어 주겠노라고.
2성 보스를 처리했을 때는 정말로 후견인이 될까 말까 생각하는 단계였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번 조사 임무를 확실하게 마치면 후견인이 되기로 다짐을 받았다.
‘이번 임무는 반드시 성공시킨다.’
이번 조사 임무를 성공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숙부인 신성현을 끌어들일 수 있으면 가문에서 신유현이 세력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그나저나 정말 과거와 변함이 없구나.’
신유현은 창문 밖을 바라봤다.
지금 신유현은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 와서 자바칩 프라페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 있는 이곳에 세계 헌터 협회의 한국 지부가 있다.
헌터 협회의 한국 지부는 강남에 있는 15층 빌딩이었다.
헌터 협회 빌딩이나 서울시의 모습은 과거와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고, 고층 빌딩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프라페 맛도 그대로네.’
신유현은 자바칩 프라페를 한 모금 빨아들였다. 씁쓸하면서 달달한 맛이 입안에서 퍼지면서 마음이 평온해졌다.
‘다시는 못 먹을 줄 알았는데.’
게티아들에 의해 파괴된 세상에서 커피나 프라페는 사치였다.
그래서 두 번 다시 먹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 다시 프라페의 맛을 보게 될 줄이야.
그뿐만이 아니다.
이전 삶에서 게티아들에 의해 폐허가 된 서울시와 다르게 지금 눈앞의 거리는 활력이 넘쳤다.
‘이번에는 지켜야지.’
잠시 카페에 앉아 자바칩 프라페의 달달한 맛을 만끽하며 평화로운 한때를 보낸 신유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헌터 협회 지부에서 신유현은 바로 D급 헌터 라이선스를 발급받았다.
대한민국 4대 무술 명가 중 하나인 파천검가의 도련님이었으니까.
거기다 이미 파천검가에서 신유현이 3성 초인이라는 사실을 헌터 협회에 알려 주었다.
얼마 전 사문위원회를 했을 때, 가주인 신성일이 신유현의 등급을 간파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거의 기다림 없이 라이선스를 발급받은 후 11층 대기실로 안내받았다.
그곳에는 이미 신유현과 함께 미확인 던전 게이트를 조사하러 갈 헌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이 조사대인가?’
신유현은 대기실 안을 둘러봤다.
대기실은 중앙에 커다란 책상이 있는 회의실이었다.
총 8명의 헌터들이 책상을 중심으로 앉아 있었고, 회의실 앞쪽 단상에 협회 직원 2명이 서 있었다.
그들을 쭉 둘러본 신유현은 마지막으로 4성 중급 헌터 두 명을 바라봤다.
저들 중 한 명이 조사대에서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생존자였다.
그리고.
‘조커이기도 하지.’
수많은 헌터들을 학살한 빌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