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8 마지막 =========================================================================
좁은 통로가 계속 이어지진 않았다.
아래로 내려가자 불릿은 한쪽 구석에 흑마법사들로 추정되는 시체를 모아놓는 연합군을 볼 수 있었다.
불릿을 끝으로 더 이상 인원이 내려오질 않자 메시지 마법으로 소식을 전해 들었던 미러링이 말을 걸어왔다.
“소식은 들었소. 외부와도 통신이 두절되었고, 내가 있었더라도 문을 여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 같더군.”
“본인도 노력해 보았으나 힘을 절반이나 소모해도 반응조차 없더구려.”
“시간을 들인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하필이면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그것인 것 같소.”
지금 이곳에 있는 인원만으로도 대단했으니 아쉽긴 해도 탈출하려고 후퇴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후퇴한다 하더라도 붉은 비라는 제물마법에서 벗어나려면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수단만이 남은 상황에서 그러면 안 됐다.
“출발합시다.”
“그럽시다. 남은 시간도 얼마 안 되는 것 같군.”
점점 짙어지는 마기가 그들의 불안감과 육체에 압박을 가해왔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전진뿐이었다.
* * *
고대의 유적이라서 그럴까? 이곳에선 흙덩이의 능력도 많은 제한을 받았다.
땅을 디디고 있는 생물이라면 그녀의 눈을 피할 수 없어야할 텐데도 흙덩이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마기를 정화하고자 하더라도 정화되는 범위가 너무도 미미해 겨우 5, 6미터 남짓했다.
지상에서라면 불모의 황무지라 할지라도 범위가 거의 수십 미터에 달했었으니 비교가 되도 너무 됐다.
마법사들도 마기에 방해를 받아서 그런지 원래도 낮아졌던 마법능력이 제한을 받았다.
잊은 사람들이 있을 것 같아 다시 말하지만 대륙의 정령사와 마법사들의 수준은 한 단계 하락한 상태다.
그래서 7서클 마스터라 할지라도 온전한 힘을 내진 못했고, 그 밑의 마법사들은 말만 6서클, 5서클이지 실제론 그 단계의 마법을 펼치려면 도구에 의존해야 했다.
이 말은 가지고 있는 물품을 모두 사용하면 자신의 수준에서 낼 수 있는 마법은 봉인된다는 소리였다.
촉박한 시간, 한정된 마법횟수, 적들의 심처라는 압박감이 그들을 짓누르는 요인이었다.
뚜벅, 뚜벅.
이곳은 과연 기괴하다고 할만 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온갖 악마상이 눈에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었고, 마치 마기의 바닷속을 헤엄치고 있는 것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이놈들이 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누군가의 중얼거림대로 흑마법사들은 일루젼학파의 수장 미러링의 바다의 분노에 불타죽은 놈들을 제외하곤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차라리 함정이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불안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오히려 기괴한 석상과 음침한 마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성스러움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유적도 유적 나름이라고, 고대의 흑마법사들이 72악마군주를 어떤 마음으로 섬겼을 지를 알만한 대목이었기에 괜히 불릿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자기들에게 소중한 것은 남들에게도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흑마법사들이 대륙에 몰고 온 전쟁엔 사람만이 죽어간 것은 아니었다.
옛 조상들이 만들고 일군 건축물과 환경, 문화까지 모조리 파괴당했다.
그 중에는 현대의 기술로 재현할 수 없는 유물과 유적도 있었으니 그것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아쉬운 부분이었다.
지상은 제대로 된 고대의 흔적을 찾아보기도 어려웠는데 전쟁의 원흉들은 이렇듯 반듯한 유적을 고고히 지켜냈으니 열불이 날 지경인 것이다.
“왜 저 석상들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을까?”
마법사의 호기심이랄지 그들은 이동을 하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를 깨트리는 악마석상에 의문을 드러냈다.
불릿은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자신도 72악마군주를 상징하는 악마석상을 보면서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노려보는 것 같은데…, 그럴 린 없겠지.’
아무리 쳐다봐도 그런 낌새는 보이질 않았고, 흙덩이의 능력을 이용해도 마기는 감지되지 않았다.
“집중하라, 이곳은 흑마법사의 심처이니까.”
“알겠습니다.”
“충!”
각자 대답을 하는 것을 보며 불릿은 존재감을 지우고 마치 기사인척 행동하는 우락크에게 스쳐지나가듯 눈길을 주었다.
그녀의 존재는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됐다. 불릿의 최측근인 벤젼스, 셰실리코프는 알고 있었지만 제노시스는 어렴풋하게 전달받아서 그저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만 아는 상태, 나머지는 카미스 백작, 미러링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사실 저번의 새벽기습 때도 그녀가 나섰으면 안 될 일이었다.
정황상 어쩔 수 없어서 나서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스타로트가 알아차렸을까 내심 조마조마했다.
‘불안해하지 마라.’
“?!”
갑자기 머릿속에서 여성의 맑은 목소리가 울리자 좌우로 휙휙 고개를 돌리는 불릿.
그러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려는 순간, 갑자기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아니,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을 잡아 누르면서 말소리가 이어졌기에 몸을 멈춘 것이다.
‘나다. 인간들은 의념으로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것인가?’
불릿의 시선은 로브를 뒤집어쓴 우락크에게로 고정되어졌다.
‘이 몸에게 말하고자 생각하면 그리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이오?’
‘그래, 본좌가 유도하긴 했어도 쉽게 하는군.’
‘흙덩이와 예전에 했던 텔레파시와 비슷한가.’
‘해봤었으면서 왜 못했던 것이지?’
‘지금 내 생각을 읽었소?’
‘능숙하진 못한가 보구나, 생각을 숨길 줄은 모르는 것을 보니.’
신기하긴 했어도 지금 이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농담을 거의 않는 엘프였기에 말 한마디에도 이유가 있었다.
‘…네가 저 석상을 가고일로 의심하는 것 같지만 나로서도 별다른 점은 느껴지질 않는다. 그보다 시간이 없는 것 같은데?’
우락크의 말대로 저걸 부순 결과가 더 나쁠 수도 있었고, 시간이 지체된다는 점이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아직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석상의 크기만 하급 마물과 비슷한 5, 6미터에 달했고 천장은 10미터는 되는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고대 신들의 신전이라는 분위기.
왜냐하면 신들의 신전은 크고 웅장해야 한다는 것이 고대에는 성행했던 것 같다는 것을 남겨진 유적들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흐음….”
빠르게 대화를 주고받았으나 머릿속의 사념을 통해서 그런 것이기에 1분도 안 되는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앞으로 가자.”
“예?”
셰실리코프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불릿이 혼잣말을 하는 것치곤 크게 중얼거리자 얼결에 대꾸를 하였다.
그러나 불릿이 그를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가자 셰실리코프는 의문을 표하면서도 그를 호위하기 위해 재빨리 발을 옮겼다.
‘여기서 함몰되면 살아남기 어려울 것 같다.’
잘 꾸며지긴 했으나 이곳이 지하를 파내서 만든 동굴이란 것을 잊어선 안 됐다.
넓은 장소로 나와서 작은 말소리는 울리지 않았으나 여러 사람이 움직이다보니 소리가 갇혀 웅웅 대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불릿은 우락크가 있다는 점에 든든함을 가졌기에 그를 믿고서 앞을 향해 나아갔고, 우락크는 남몰래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의 틈바구니에 스며들었다.
앞으로 더 나아가니 나타난 곳은 이전과는 정 반대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이전엔 그래도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상당히 밝게 해놓았었는데, 이번엔 누가 흑마법사 아니랄까봐 어두침침한 공간에 촛불 몇 개로 윤곽만 간신히 드러날 정도의 밝기를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제물이라도 바칠 요량이었던지 돌로 된 제단 같은 것이 있었고 그곳에서부터 피 냄새가 짙게 났다.
낮아진 천장과 음침한 분위기, 그리고 사방에 나있는 문들이 이곳을 중앙공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윽, 냄새.”
“신들에게 공물을 바치던 곳으로 보입니다.”
흙덩이가 콧등을 찡그리자 자베르가 이곳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고, 이에 불릿도 그런 것 같다고 고개를 주억였다.
“그보다 주위에 나있는 저 문들이 신경 쓰인다.”
낮아진 천장으로 인해 답답해져서 그런지 모든 것들이 신경 쓰였다.
마치 저 문을 열고 당장이라도 무언가 들이닥칠 것처럼….
벌컥!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99개의 문들이 열리면서 끔찍한 몰골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끼야아아-!
끼야! 끼야아아아아!!
입구를 제외한 모든 방향에서 악령 와치가 비명을 지르니 마법사, 기사를 가리지 않고 경지가 낮은 이들의 칠공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푸확!
“끄어억!”
“시, 실, 꾸루루루룩….”
방어마법을 비롯, 아티펙트까지 갖추었지만 99마리의 와치가 밀폐된 공간에서 내지르는 소리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와치의 비명엔 마기가 섞여있기에 혼을 뒤흔들며 신체에 침투된 마기에 대항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바다의 분노!”
이에 대항하고자 7서클 마스터인 미러링이 모든 영역을 뒤덮을 수 있는 바다의 분노를 시전하자 빨간 불의 해일이 뚫린 구멍을 향해 들이닥쳤다.
잠시 후.
“끄아악!”
“살려줘!”
“으악! 으아악!”
흑마법사들이 고통에 몸부림을 치는 것인지 대부분의 와치가 신형이 흐릿해지거나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저항한 이가 있는 것인지 가운데 쪽의 문에서 와치 하나가 불릿을 향해 다가왔다.
끼아아아! 끼아아아아!
“일어서라,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여!”
쉰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마기와 마나가 뒤섞인 더러운 기운이 여러 통로를 향해 스며들어갔다.
그러자 와치가 사라졌던 문들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왔다.
덜걱.
덜그럭, 끼긱-
끼각끼기기가가각가각각-
“히익, 모, 모야?”
사람들을 치료해주던 흙덩이는 뼈가 어긋나는 소리에 기겁하며 손을 멈추었는데,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일 정도의 결과물이 곧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것은 수백에 이르는 해골전사들이었는데, 흑마법사가 죽었는데 뜬금없이 해골전사로 탄생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마나와 마기, 그리고 마이너스 에너지를 머금은 좋은 재료를 가지고 기껏해야 해골전사를 만들겠는가?
하지만 놈들의 무장상태가 너무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장비 곳곳에 그려져 있는 문양에 모두가 기겁했다.
“암흑군단의 표식!”
“헬 게이트다! 지옥의 문이 열렸다!”
“젠장, 달려!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빨리 문을 파괴하러 달려가란 말이다!!”
“기사들이여, 검을 들어라! 투툰께 영광을 바치자!”
“우오오오!!”
이곳이 좁은 것은 아니었지만 99곳, 아니. 98곳에서 헬 게이트가 열려 마계와 연결되었고, 그로 인해 이곳은 삽시간에 해골전사로 미어터지게 생겼다.
그리고 마계의 주축인 암흑군단의 해골전사는 보통 해골전사가 아니다.
카강, 챙, 뿌각!
“커헉!”
몇 번 검을 나누지도 않았는데 검이 부러지자 기사는 그대로 가슴팍이 뚫려 숨이 끊어졌으니 와치 때문에 부상을 입었다 해도 수준이 너무 높았다.
이에 마법사들이 보조를 하자 간신히 한수 앞서며 끝없이 몰려드는 해골전사를 막아설 수 있었다.
“우락크, 당신이 나설 차례요!”
이런 상황에선 수천에 이르는 악마의 심장도 삽시간에 베어버린 우락크가 제격이었기에 그녀를 불렀으나 우락크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