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37 마지막 =========================================================================
“일단 입구부터 찾아보도록 하지.”
불릿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이곳저곳을 쑤셨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여기까진 불릿도 예상했던 바인지라 다시 흙덩이에게 부탁했다.
“부탁한다, 흙덩아.”
“으그우…, 알았어.”
그녀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불릿이 부탁하니 거부하질 못하고 그대로 연속해서 정령술을 발동했다.
우우웅!
흙덩이가 정령술을 사용하니 아까 시전했던 대지의 축복과 연계해 드러나지 않던 입구가 아가리를 좌악 벌렸다.
찌지지직…
분명 사람이 오고갔던 출입구이거늘, 마치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소리가 사람들의 귓가에 틀어박히고 있었다.
이 소름 돋는 소리에 거대 구멍의 위압감에 적응되어가던 사람들은 다시금 긴장감을 다잡았다.
“십인장, 확인해보도록.”
“충!”
벤젼스가 십인장에게 명을 내렸지만 진홍색 케이프에 흰색 3줄이 그어진 이가 이를 말렸다.
“아니, 내가 하도록 하지.”
“이건 천인장이 할 일이 아니다, 제노시스.”
벤젼스의 말대로 천인장이 위험한 정찰을 할 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가장 위험한 것이 처음 아니겠는가? 그나마 병사를 안 시킨 이유는 기사급이라면 함정일지라도 피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천인장은 매우 중요한 지휘계급, 함부로 몸을 굴릴 위치가 아니다.
“기사이면서 마법도 사용할 수 있는 제가 하는 게 낫습니다.”
제노시스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마법사가 탐지엔 능하지만 신체반응이 느려 의외로 기습공격엔 잘 죽었다.
반대로 기사는 반응은 곧잘 하지만 탐지능력이 떨어져 이런 마법이 가미된 함정엔 오히려 더 약한 면모를 보인다.
그러니 불릿의 마정석 물량공세로 소드익스퍼트 하급에 올라선 제노시스라면 마검사로의 역량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불릿도 제노시스를 이해했는지 열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의 천인장을 믿어주었다.
“확인해 보거라.”
“각하, 제노시스는 아직 경험이 미천합니다.”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 또한 본인의 역할이노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확인해보라.”
불릿의 믿음에 의기충천한 제노시스는 씩씩하게 걸어가더니 이내 검을 빼들고선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아래로 길게 이어진 통로는 마치 지옥의 무저갱처럼 보였는데, 헤이스트까지 사용할 준비를 마친 후 통로의 초입으로 들어갔다 나왔음에도 별다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입구부분엔 함정이 없음을 깨닫게 되자 불릿은 고민에 빠졌다.
‘고급 병력만을 데려가야 한다. 이 많은 병력이 다 들어갈 만큼 공간이 확보되었다는 보장도 없고,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어차피 일반 병사들은 흑마법사를 상대하는 데엔 별다른 도움이 되질 않는다.
어디까지나 병사들은 놈들이 운용하는 마물군단을 상대하기 위해서일뿐, 그 이후엔 뒤처리 역할만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사항은 기사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고, 쓸만한 인물이라 치면 소드익스퍼트 상급은 되어야 한다.
누구를 데려갈지 상념을 끝낸 불릿은 목청을 돋워 주변의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각 진영의 수장들은 지금 즉시 모일 수 있도록!”
* * *
“발을 헛디지지 말게나.”
“2인 1조, 명심합시다.”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불릿이 내린 선택은 각 진영별로 소드익스퍼트 상급의 기사를 차출해 마법사와 호흡을 맞추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밑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즉각 대처할 수 있었고, 서로의 조합을 통해 시너지도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길이 워낙 좁아 두 명이 함께 지나갈 순 없었는데, 그래서 선두에 있을수록 위험은 증가하였다.
그래서 선두엔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이들이 나섰는데, 마탑에서의 최고는 당연히 마탑주였으니 미러링이 나섰고, 기사들은 의외로 셰실리코프가 아닌 카미스 백작이 머리를 맡았다.
그는 살짝 웃으며 셰실리코프보다 조금 더 경지가 높다고 말하였지만, 삼광(三光)은 정색하며 그를 존중했으니 차이가 조금 나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가기 전 불릿은 7서클 마스터인 미러링에게 부탁을 하였다.
“아래를 향해 화염계열 마법을 사용해주시오.”
“…우리도 그런 생각은 못 했는데, 꽤나 잔인하외다?”
“쥐새끼를 사람 취급할 필요가 있겠소?”
불릿의 부탁대로 미러링은 화염계열 마법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끔찍한 기술인 바다의 분노(Wrath of the sea)를 사용했다.
6서클의 화염계 마법이면서 웃기게도 1서클 파이어(Fire)와 비슷한 온도를 지녔다.
단, 범위는 아찔할 정도로 넓었기에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죽이는 마법으로 악명 높아 마법사가 전장에 나서선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로 손꼽혔다.
고위서클의 마법일수록 인간이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태워버리기에 오히려 낮은 온도일수록 고통과 괴로움을 수반하는 것이다.
좁은 통로를 향해 바다의 분노가 시전되자 가뜩이나 광범위한 불들이 좁아터진 통로로 길게 뿜어졌다.
푸화악-.
절대 붉은 색에서 벗어나질 않는 온도점, 그러나 불은 그 자체만으로도 사람을 태워 죽일 수 있는 무시무시한 현상이었다.
불의 온도가 높건 작건 간에 사람은 그것을 견딜 수 없는 법이었고, 그러한 사실은 통로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비명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끄아악…
…살려줘…!
무우울! 무우우우울!!!
어찌나 끔찍한 고통이었는지 어둠속이 보이질 않음에도 들려올 정도로 커다란 비명소리.
좁은 통로를 통해 들려와서 그런지 와치의 비명보다 더 와닿는 기분이었다.
와치는 악령이라서 그러한 비명을 내지르는 것이지만 지금 이것은 자신들도 낼 수 있고, 그리될 수도 있는 비명이었으니까.
“역시 기다리고 있었군.”
몇몇은 사람이 불타는 것이 상상이라도 됐는지 구토를 했으나, 불릿은 차가운 신색을 유지하며 통로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모습엔 산전수전 다 겪은 레너드 자작도, 7서클 마스터이며 방금 마법을 시전한 당사자인 미러링도 질린 듯했다.
“…흠, 후끈하군요.”
겨울이었기에 달구어진 통로의 따스함은 오히려 기이함을 토해냈다.
선두에 서게 될 카미스 백작은 통로의 온도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선 칼을 빼들었다.
스르릉-.
“진입합시다, 저 아래에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단 것이 느껴지는군요.”
그것은 전장을 뒹군 자의 직감인지, 아니면 높은 경지에 있는 자의 특수능력인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들 중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진 않았다.
느껴지지 않는다하여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먼저 들어갑니다.”
쑤욱.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통로를 내려가는 카미스 백작을 보며 미러링은 한숨을 쉬었다.
“에휴, 나도 진입하외다. 디펜시브 아머, 디펜시브 실드, 트리플 실드, 매직 실드….”
각종 보호마법과 저항력을 상승시켜주는 아티펙트를 걸친 미러링은 카미스 백작을 놓치기 전에 자신도 통로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최고실력자 두 사람이 내려가니 나머지 인원들도 알아서 짝을 이룬 후 줄줄이 내려섰다.
소드익스퍼트 상급은 워낙 수가 적어서 할 수 없이 대부분이 중급이었는데, 그나마도 정예병인 바포 변경백, 투투 후작령, 구울 백작령의 기사들이 다수였다.
나머지는 하는 수 없이 영주가 직접 참가하거나 병사를 크레파토스에게 인계하고 통로로 내려가는 지휘관도 있었다.
이것만 보면 기사보다 훨씬 더 희귀한 마법사를 천여 명이나 파견한 마탑의 저력을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렇게 500명쯤 내려가니 불릿도 중간에 섞어들기 위해 흙덩이를 바싹 끌어당겼다.
“삼광, 벤젼스, 제노시스는 나를 따르고 크레파토스는 레너드 자작을 보조하라.”
“……명을 받듭니다.”
명색이 호위대장인 크레파토스는 자신이 지명에서 제외되자 약간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곤 해도 수준도 안 되는 자를 데려갈 순 없었고, 나이도 노쇠한 그를 데려갔다간 초상 치를 것이 분명했다.
이게 다 그를 위한 것이었기에 불릿은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크레파토스의 등을 두드려주며 자베르에게서 각종 마법을 받고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내려가기를 10미터, 불릿은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굉음에 크게 놀랐다.
그그그극!
쾅!
“끄아아악!!”
“무슨 일인가?!”
마법사들이 라이트 마법을 사용하곤 있었으나 불릿은 아직 10미터밖에 내려오질 않았던지라 지상의 빛을 받을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끈적한 피분수를 뿜으며 허우적대는, 비스듬하게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사람들이 보이고 있었다.
아마 두세 사람이 뒤엉킨 것 같았는데, 피로 새빨갛게 변한지라 알아보기 어려웠다.
“윽….”
“넌 보지 마렴.”
“응? 응? 누가 다쳤어?”
다 큰 어른들도 고개를 돌리며 욕지거리를 내뱉었고, 불릿도 전쟁을 겪으며 여럿 본 광경이지만 괜찮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래서 자신의 눈을 가린 불릿의 손을 치우려고 흙덩이가 발버둥 쳐도 절대 풀어주지 않았다.
“크아압!”
그리고 불릿의 뒤에서 따라오던 벤젼스가 마나를 잔뜩 실은 검으로 천장을 찔러갔으나 들려오는 것은 파괴음이 아닌 금속음이었다.
까가가가가강!
“크읏!”
불똥이 튀면서 검이 뒤로 밀려나자 벤젼스는 온 힘을 다해 천장을 찔렀지만 상하는 것은 벤젼스의 검일 뿐, 반응이 없었다.
결국 그는 칼날이 무뎌진 검을 회수하고선 분함을 드러냈다.
“제기랄! 뚫리지 않습니다!”
“역시 함정이었군.”
“어떻게 합니까, 각하?”
“벤젼스가 저렇다면 저로서도 손 쓸방법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보조계열 마법에만 능통하기 때문에….”
벤젼스가 하지 못하는 일은 지금 불릿의 근처에 있는 이들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셰실리코프가 출중한 실력을 지녔어도 기본적으로 힘은 비슷했기 때문에 파괴력에선 차이점이 미미했다.
그리고 제노시스도 마찬가지로, 그가 마법을 통해 상급에 버금가는 힘을 내긴 했어도 약점을 통해서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지 위력이 상승해봤자 익스퍼트 중급이 한계였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언 락!(unlock)”
잠긴 문을 열 때 사용하는 마법엔 반응이 없자 마법사는 시체를 건드릴 수 없어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나 역시 반응이 없자 마법사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까지 포기하자 남은 것은 흙덩이였기에 불릿은 시체들을 가리라 명했다.
마법사는 동료가 그리 되었기에 아끼던 로브를 벗어서 그들을 가려주었고, 더 이상 시신이 보이질 않게 되니 불릿은 흙덩이를 돌려 세웠다.
“흙덩아, 저 천장을 열어보렴.”
“나만 믿어!”
명색이 땅의 정령술을 사용하는 정령…, 뭐라 불러야 하지?(?)
어쨌든 간에 당당하게 나선 흙덩이가 불릿의 힘을 빨아들이며 정령력을 발산했다.
대지를 움직이는 일이라면 그녀의 장기였기 때문에 괜히 통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다른 기술들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웬걸? 거의 절반에 이르는 정령력을 쏟아 부어도 반응을 않자 기겁한 불릿이 흙덩이를 말렸다.
“그만! 날 말려 죽일 셈이더냐!”
“응?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안돼!”
“히잉….”
혼을 내는 불릿의 반응에 금세 시무룩해지는 흙덩이. 진짜, 아무리 무리를 하더라도 이런 곳에선 무리이다.(뭘?)
그렇게 갇혀버린 불릿 일행은 500이란 숫자를 가지고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