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정령사-233화 (233/241)

00233  마지막을 향해  =========================================================================

불모의 황무지 흑마법사의 중앙심처 도착까지 예정시간 3일.

9만에 이르는 군대가 진격하는 속도를 생각하면 3일이라는 시간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이다.

1.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가시가 잔뜩 달렸던 악마의 심장이 마지막 습격이었던 것인지 그 후로는 고요, 적막, 싸늘함만이 빈자리를 채우며 불모의 황무지를 떠돌았다.

차라리 몬스터라도 몇 나타나면 흑마법사들에게 더 이상 남은 저력이 없다고 생각할 텐데, 습격은커녕 정찰조차 없으니 병사들의 불안함은 극에 치닫는 중이었다.

“왜 이렇게 조용한 거야, 젠장.”

오직 군대가 걷는 발소리만이 귓가에 울리니 그것이 답답했는지 구 플로라 남작령의 기사 베이그란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 소음에 비해 적막이 감도는 것이 전설로 전해지는 마계의 암흑군단을 보는 듯했다.

마계의 암흑군단은 대부분이 언데드로 이루어져서 달리 죽음의 군단으로도 불렸다.

전원이 해골로 이루어진 자들인지라 말을 할 수 없었으나 정신이 이어져 있어 대화자체가 필요 없었다.

조용하다는 점에선 비슷했으나 말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으스스한 것 같소.”

“그러게 말이오, 하아아….”

말을 타고 다각다각 걸어가는 그의 곁으로 같은 소속의 기사 셔틀리안이 맞장구를 쳐주었다.

“영주님은 왜 되도 않는 무력으로 공을 세운답시고 활개 치시다가 돌아가신 건지….”

“예상은 했지만, 좀 허무하구려.”

플로라 남작은 독신주의자였기에 자식이 없었다. 그렇다고 양자를 들이거나 후계를 정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들이 돌아가면 영지는 다른 곳에 흡수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여기서도 이들을 이끌던 플로라 남작이 사망하였기에 마치 공중에 붕 뜬 상태, 그나마 불릿이 지휘권을 통합하지 않았다면 다른 군벌들에 의해 이용당하다 버려졌을 것이다.

“바포 백작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어찌 됐을지 모르겠소.”

“그러게 말이오, 식량도 주시고 공평하게 대해주시고.”

“셔틀리안 경, 내 제안하나 해도 되겠소?”

어차피 주변엔 온통 소속이 다른 영지의 군사들이었기에 둘의 대화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사적인 용건을 꺼내는 베이그란에게 셔틀리안은 곧바로 대꾸했다.

“좋은 이야기라도 있소?”

“같은 왕국민이라지만 타인이나 마찬가지인 우리에게 이토록 신경을 써주는 바포 백작께 나는 감동했소.”

“나도 마찬가지긴 합니다만, 무언가 건수라도…?”

이젠 미래가 불투명해졌기에 셔틀리안은 누구를 모셔야하나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이는 비단 그만의 걱정이 아니라 플로라 남작령의 모든 기사들이 그러한 고민을 안고 있는 상태였다.

실력이 있고 장비도 그대로이니 모실만한 주군을 찾으면 됐으나 군주들이 한번 남을 섬겼던 이를 믿기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검을 휘두르던 이를 뭘 믿고서 등을 맡기겠단 말인가?

“이번 몬스터 웨이브로 왕국에 많은 난민이 발생하지 않았소이까?”

“으음, 그것도 다 흑마법사의 소행이라니 안타까운 일이지.”

그동안 루드밀라는 흑마법사의 마수에서 한발 비껴가 있었지만 이번 몬스터 웨이브를 통해 그 말도 과거가 되어버렸다.

당장 플로라 남작령만 하더라도 그로인한 피해를 상당히 보았기에 단순무식한 플로라 남작이 살아생전에 골을 싸맬 정도로 크나큰 일이었다.

그리고 몬스터로 인해 경작지가 망가지고 집이 파괴된 자들은 먹고살기 위해 보다 더 좋은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한 자들을 주로 받아들이는 곳은 불릿의 바포 변경백과 투툰 후작령이었다.

구울 백작은 골치 아픈 난민을 받아들이기 싫었기에 그쪽으로 오는 자들을 그대로 통과시켜 불릿에게로 넘겼다.

“얼마 전 바포 변경백에서 병사가 됐다는 자와 대화를 나누어보았는데 그렇게 대우가 좋답니다.”

말을 하면서도 흥분됨을 감추지 못했는지 어깨를 들썩였고, 입에선 허연 입김과 머리에서도 열이 올라와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좋길래 기사로서 풍족하게 살아온 베이그란이 저럴까 싶어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적신 셔틀리안이 재차 물었다.

“좀 들어봅시다.”

셔틀리안이 관심을 가지자 베이그란은 목을 가다듬고서 자신이 그토록 꼬치꼬치 캐물었던 정보를 줄줄이 나열하기 시작했다.

“어흠, 먼저 맨 처음 바포 변경백으로 전입한 자들에겐 4인 가족 기준으로 경작지를 주는데, 놀랍게도 세율이 1할이라 하더이다.”

“세상에, 1할만 먹고 영지를 꾸리는 것이 가능한 것이오?”

대개 농민들이 못사는 이유가 높은 세금 때문이었는데, 농작물의 4할을 떼 가는 것은 기본이었고 집세, 시민세, 기타 세금 어쩌고저쩌고 등등이 엄청 많았다.

결국 뼈 빠지게 일을 해도 손에 남는 건 없었고, 남는 것은 가난을 되물림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영주라고 해서 마냥 편한 마음으로 세금을 걷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혈세를 걷는 경우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돈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기사 한 명만 하더라도 일반적인 보병 100을 양성하는 것과 맞먹을 만큼의 자금이 필요했고 시간은 그보다 훨씬 더 길게 걸렸다.

게다가 배경 또한 확실해야 했기에 자질이 있는 귀족의 자제를 찾는 것도 일이었다.

기사만 하더라도 이렇게 많은 자금이 필요했는데 다른 것까지 합하면 평민이 생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왔다.

“자네도 알다시피 바포 백작님은 정령사이지 않소? 속성이 물에서 땅으로 변했다는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지만 그래서 토질이 매우 좋아져서 질 좋은 곡물을 기를 수 있다더구려.”

“호오, 탐나는 땅일세?”

이 시대는 농업이 주가 되는 사회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평민들은 밭을 일구고 곡물을 길렀다.

귀족들은 자신의 손으로 가꾸진 않았지만 저마다 땅을 가지고 있어 영토를 빌려주어 거기서 나오는 곡물에 일정한 세금을 매겨서 자산을 불려나갔다.

그러니 기름진 땅은 누구나 탐내는 곳으로, 이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는 경우도 심심찮게 발생했다.

“투툰 후작께서 두둔하고 구울 백작도 건드릴 생각도 안 하는데 이만큼 안전한 곳이 또 어딨겠소? 그리고 이건 알려지지 않았던 소식인데, 작년 겨울에 반란을 진압하면서 란푸스 왕국도 물리쳤다하니 무력, 지력, 금전, 영토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거 아니겠소이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혼자만 아는 것이 이득이었기에 자신에게 왜 이런 말을 들려주나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서 셔틀리안은 베이그란에게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을 걸었다.

“그런 좋은 곳에 자리가 많이 나진 않았을 것 같은데….”

셔틀리안이 왜 말을 흐리는 것인지를 베이그란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언 손을 비비면서 이에 대꾸를 해주었다.

“호오, 수련도 좋지만 왕국의 정세에도 눈길을 돌리는 게 어떻소?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병사를 만나고 나서 알아본 것이지만….”

그러면서 휙, 휙,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좀 더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하는 베이그란.

이러한 행동은 은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보이는 ‘나 비밀얘기하오’라고 광고하는 그런 제스쳐였다.

“투툰과 바포 가문이 사돈관계가 될 것 같다하외다.”

“그게 사실이오?!”

그의 소근거림에도 눈치 없는 셔틀리안은 큰 목소리로 대꾸하였고, 몇몇 이들의 시선이 모이려하자 베이그란은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조용히하라고 했다.

“쉿, 쉿. 지금 뭐하는 짓이오? 내 셔틀리안 경과의 친분을 생각해 알려주었더니….”

“미, 미안하오.”

“쯧, 어쨌든 그런 정보를 입수했소.”

“…그런데 바포 가는 현재 백작 단 한 사람뿐이질 않소이까?”

바포 가가 손이 귀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대로 물려오는 특성이라도 되는지 웬만해선 첩을 잘 들이지 않았다.

아마 정령사들의 공통점인 정신병 때문인 듯했으나 대외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었다.

그러니 사돈관계가 된다는 것은 나이 41에 이르른 바포 백작이 아직 성혼을 하지 않은 5공녀와 결혼을 한다는 의미이질 않겠는가?

“설마 투툰 후작이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5공녀를 바포 백작에게 시집보내다니….”

그리고 육체가 젊어졌다곤 하나 5공녀를 달라고 한 바포 백작의 행동에 혀를 내두르는 셔틀리안.

그런 그의 짐작에 베이그란이 또 혀를 찼다.

“누가 바포 백작님이라 말하였소? 삼광이 5공녀와 혼인할 것이오.”

“잉?”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게 되었기에 셔틀리안은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었고 베이그란은 약간이지만 한심하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바포 백작께선 가신 하나하나에도 이렇듯 신경을 써준단 말이오, 싫으면 우리 가족만 데리고 갈 것이니 다른 곳에 말하지나 마시오, 크흠.”

“아, 아니오, 같이 갑시다.”

이들의 대화는 비단 둘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연합군을 보다 좋게 이끌려는 그의 행동이 점점 군벌들의 병력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이다.

불릿에 대한 좋은 여론이 형성되자 이러한 비사가 속속들이 왕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병사와 기사들이 이러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모르고 군벌의 패자(霸者)들은 진짜 패자(敗者)가 될 지경에 처해갔다.

* * *

펑!

“체크인.”

“3시 지역 흐름 감지.”

“마기인가?”

“미세한 흐름, 바포 백작 부인 지원요청바람.”

“요청확인, 메시지(message) 시전.”

마법사들은 자기들끼리 뭉쳐선 각종 마법을 시전하며 무언가를 속닥이는 중이었다.

마탑이 폐쇄적이라고 할 순 없었지만 여전히 마탑이 마법사들의 세계에서 넘어설 수 없는 벽으로 불리는 이유가 그들만의 독특한 방식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수준에 맞는 체계적인 교육, 실적에 따른 등급제는 마탑 내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인식시켜 주면서 자부심 또한 안겨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사들은 마탑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고, 마탑에 속한 마법사들이 대륙에 큰일이 발생할 때마다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던 것이다.

메시지 마법을 사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타고서 불릿과 흙덩이가 호위병대를 대동한 채 그들의 앞에 등장했다.

“흔적을 발견했나?”

불릿은 흙덩이를 자신의 앞에 앉히고서 망토로 그녀의 몸을 감싼 상태였다.

마냥 정령력으로 몸을 보호하면 오히려 체력이 약해질 수 있다는 의사의 조언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요새 흙덩이는 추위와 더위도 겪으며 점차 인간다운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었다.

“추버….”

덜덜덜-.

그녀가 추위에 부들부들 떨자 불릿은 말에서 내려선 후 흙덩이를 돌돌 감싸고 품에 안았다.

“일단 얘기를 하기 전에 히트 프로텍트부터.”

“알겠습니다. 그럼 이 아가씨부터….”

“부인이라고 하게.”

“…부…인? 아, 예.”

어디 마실 나온 귀족가의 영애처럼 보이는 보드라운 털이 달린 원피스를 입은 흙덩이는 가슴이 크더라도 어려 보였다.

마탑 측에서 파견된 마법사들은 모두 머리가 좋았기에 불릿에 대한 정보도 외워두고 있었기에 떨떠름해 하면서도 그녀가 불릿의 아내임을 인지했다.

다만 추위에 덜덜 떨며 불릿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이 살 떨리게 귀여웠을 뿐.

‘바포 변경백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수준 높다더니 사실인가보네.’

마법사는 흙덩이에게 히트 프로텍트를 걸어주면서 문득 불릿의 영토에 지부가 있는 것을 떠올리며 그곳의 마법사들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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