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9 불모의 황무지로 =========================================================================
“거절, 거절, 거절, 거절, 거절….”
팔락, 펄럭, 팔락-.
불릿은 집무실에 앉아 주변 군벌들로부터 도움을 요청했던 문서를 훑어보고 있었다.
결과는 거절. 단 하나도 도움을 준다는 말이 없었는데, 그럴 듯하게 둘러대도 결국엔 여력이 없다는 말만 지껄이고 있으니 머리가 아파왔다.
탁!
“위기의식이 없는 건가, 아니면 본 변경백이 망하길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그는 책상에 문서를 강하게 던지며 남은 문서 한 장으로 부채질을 했는데, 문득 거기에 적힌 내용이 눈길에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겠다.」
짧지만 의미심장한 내용. 왕실에서도 도움을 줄 수 없다는 서신을 보내온 가운데 오직 투툰 후작만이 답을 보내왔다.
“본인에게 찾아오라는 소릴 하다니, 여전히 오만하군.”
다만 이 서신이 의미하는 내용은 도움을 준다기 보다는 이전에 얘기가 오고간 혼인 건에 관해서일 것이다.
셰실리코프를 남작의 위로 승격시킨 이유가 투툰 후작의 막내딸, 5공녀 션샤인 폰 투툰과 혼인시켜주기 위해서 아닌가.
이 서신은 거절도, 그렇다고 허락의 의미도 아닌 뒤에서 받쳐주는 자들끼리 만나서 면담을 해보자는 뜻이었다.
자신이 복귀하고 1년이 다 되가는 시점이니 불릿에 대한 정보는 변경백 외부로도 널리 퍼졌을 것이다.
“흐음, 행동을 교정하고 가야하나.”
불릿은 이젠 있지도 않은 턱수염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는데, 결국 발품을 팔아야하는 것은 그였기에 이런 독백이 나오는 것이리라.
젊어진 이후로 불릿의 행동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먼저 혈기라고 해야 할지, 성급하다고 해야 할지 예전과 비교했을 때 과감한 면이 없잖아 있는데, 신중하며 냉철했던 이전과는 확연히 차이 나는 모습이었다.
이게 투툰 후작과의 면담에서 이익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저울질한 불릿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경우엔 솔직한 게 낫겠지….”
“불릿, 손 멈췄어.”
“아, 그래.”
스윽스윽.
“히힛, 기분 좋다.”
불릿의 시선 아래엔 의자를 연결한 후 누워서 그의 허벅지를 베고 있는 흙덩이가 있었다.
이젠 한결 안정된 심신의 올리비아와 차분한 유실리아와는 다르게 흙덩이는 애교가 많았는데, 본래 나이대인 10…살인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게다가 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자랐고, 불릿에 의해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는 홀로 고독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갇혀있었기에 사랑을 갈구하는 행동이 더욱 심했다.
‘고양이 같군.’
불릿의 손길에 따라 그릉그릉거리며 연신 볼을 비비는 흙덩이의 모습은 애완동물처럼 보였다.
“친구들이랑은 안 노니?”
쭉 외톨이였던 그녀에게도 불릿과 올리비아, 유실리아 외에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자들이 생겼는데, 이전에 놀이터에서 만났던 아이들을 의미했다.
“불릿 오빠가 더 좋아. 놀아줘-.”
부빗부빗.
“…어제도 그렇게 해놓고?”
“해주게? 할까? 할래?”
고개를 번쩍 들며 눈을 반짝이는 흙덩이의 시선에 불릿은 부담스러운 듯 살며시 그녀의 머리를 아래로 내리며 다시 쓰다듬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일해야 한다.”
“피, 나도 오빠야랑 놀고 싶은데, 올리비아랑만 데이트하구.”
“음.”
천진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이 미소녀의 기억력이 비상하다는 점을 상기해야 했다.
잊는 것이 거의 없는 흙덩이는 저번의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서 계속 불릿을 보챘는데, 그 덕분에 불릿은 좀 잘만 하면 습격해오는 흙덩이 덕분에 잠을 자지 않고도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는 수 없군.”
탁.
불릿은 결국 졌다는 식으로 서신과 서류를 정리한 뒤 한쪽 구석에 몰아서 놓은 후 그녀를 번쩍 들어서 바닥에 세워놓았다.
“안아주는 게 더 좋은데.”
“어허, 자기발로 걸어야 어여쁜 레이디지.”
“헤헷.”
잔소리인 듯 아닌 듯한 말에 흙덩이는 혀를 낼름 내밀었는데, 분홍색의 자그마한 혀를 보자 불릿은 또 다시 충동을 느꼈다.
“으음, 잠시만.”
그는 자신보다 키가 작은 흙덩이에게 허리를 숙이지 않고 오히려 공주님안기로 그녀를 품에 들어 안고서 진공키스를 했다.
“응? 으븝.”
“쪼옥, 츄우웁….”
결국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나서야 그녀를 구속에서 해방시켜주는 불릿.
뽀옹….
“헤엑, 헤엑. 마, 맛있었어?”
“…너희 때문에 성욕을 주체할 수가 없잖아.”
콩.
“아얏. 이히히, 더 할래?”
불릿이 살짝 꿀밤을 먹여주자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해맑게 묻는 흙덩이의 물음에 불릿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유실리아랑 놀아라. 올리비아는 마사지인가 뭔가를 받는다고 해서 자리에 없으니까.”
“그게 뭐야?”
아직도 모르는 단어가 있기에 그녀에겐 하나하나의 단어를 친절히 설명해주어야 했다.
“마사지란 것은, 음. 이렇게 만지면서 굳은 근육을 풀어주는 거다.”
조물조물…
주멀럭주물럭주물럭-.
“아하하핫, 힛, 히힉! 가, 간지러워!”
“후후후.”
“히히, 으헤, 흐에에…, 으으응…….”
오른팔로 안아든 흙덩이에게 왼팔로 사정없이 간지럼을 태우자 그녀는 발버둥을 치며 웃음을 터뜨리다가 점점 가슴이라던가 배꼽, 은밀한 부위로 향하는 그의 손길에 신음으로 변해갔다.
딱 거기서 멈춘 불릿은 다시 그녀를 바닥에 세우고서 말을 이었다.
“대략 이런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읏, 야, 야한 거야?”
흙덩이가 몸을 움츠리며 묻자 불릿이 그녀의 흐트러진 복장을 정리해준 뒤 말려 올라간 원피스를 내려주며 대답했다.
“아니, 이건 그냥 네가 좋아서 그런 거고.”
“……하고 싶어졌어, 안 돼?”
흡사 애무와 비슷한 손길이었기에 애가 탔는지 그녀가 두 팔을 번쩍 들고 그에게 무언가를 바랐지만 이번에도 불릿은 거절의사를 보였다.
“참는 연습도 해야 하는 법이다. 자기만 생각하는 여자애는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어요.”
타이르듯 내뱉는 말에 흙덩이가 강하게 부정했다.
“나 엄마 안 해! 그냥 불릿 아기할거야! 안아줘!”
흙덩이가 불릿에게 삐지진 않겠으나 어머니가 되기 위해 희생해야하는 점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불만을 터뜨렸다.
그리고 불릿의 눈엔 이런 흙덩이가 마냥 귀여웠기에 그녀의 원대로 안아주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착하지, 우리 아기? 너는 제일 마지막에 가질 거니까 당장 급하게 할 필요는 없어. 그냥 그렇다는 말이었지, 화내지 말아주렴.”
가신들에겐 보이지 않는 너무도 다정한 말. 하다못해 올리비아나 유실리아에게도 이 정도로의 상냥함은 보이지 않는 불릿이었다.
오직 흙덩이 한정, 그만큼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는 아이였기에.(나이가 나이니까.)
불릿의 몇 마디에 흙덩이의 삐짐은 단숨에 녹아내렸다. 그녀 또한 불릿만큼 좋아하는 이는 없었기에.
이 또한 불릿 한정의 자세.
“…참아볼게, 나는 오빠의 착한 아기니까.”
“그래그래…, 뭔가 좀 오글거리는군.”
자신이 말해놓고도 영 어색했는지 중얼거리는 그의 입을 이번엔 흙덩이가 틀어막았다.
“흡, 쪽, 냐암, 냐암-.”
“흐흡…, 이 방식은…어제 배웠던 그거니?”
“푸핫! 응, 불릿꺼 빨아먹던 것처럼 해봤어.”
……이하생략. 수위 넘겠다(?).
실제 나이완 상관없이 육체는 올리비아나 유실리아와는 비교도 안 되게 성숙한 흙덩이.
그녀는 자신의 특기인 치유능력으로 불릿과 장시간의 성교가 가능했기에 배우지도 않은 온갖 체위를 스스로가 만들어서 시도했다.
그 중 하나가 사탕이나 아이스크림 먹듯이 하는….
이하생략.
“기분 좋긴 한데, 여기서 그만하자.”
“히잉, 하자하자, 응? 나 열심히 할 수 있어.”
“아, 아니, 열심히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덥썩.
“이렇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걸?”
“…….”
흙덩이는 불릿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댔고, 솔직히 가슴이 워낙 풍만해 심장박동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고동을 느끼기 위해선 가슴골 깊숙한 곳에 닿아야 간신히 알 수 있었기에.
불릿도 참기로 결심한 찰나에 계속해서 유혹해오는 흙덩이의 행위에 미칠 듯한 내적갈등이 오갔다.
‘참자, 참아. 흙덩이를 아끼자, 아끼자…, 아끼는 것도 좋지만 사랑해주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미친, 아니다, 아끼자.’
“후우….”
심호흡을 하던 불릿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서 그녀를 품에서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앗?”
탁.
바닥에 내려선 흙덩이가 안타까워하자 불릿은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단호히 말을 내뱉었다.
“유실리아랑 놀아. 아니면 친구들, 그도 아니면 화단이라도 가꿔봐.”
“화단? 흙장난?”
“아니, 넌 그래도 땅의 정령이잖아? 흙덩이는 흙 싫어하니?”
이젠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불릿에게서 정령력을 받아 정령술을 발휘하는 그녀였기에 그 부분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으응, 아니. 흙 좋아해. 촉촉하고, 기분 좋아. 사르륵, 사르륵-, 히.”
반대로 생명이 느껴지질 않는 불모의 황무지의 대지는 별로 좋아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가이아 여신의 자식이라 그런지 생명을 사랑하는 아이였기에.
“…장모님, 흙덩이를 통해 보시는 건 좀 자제했으면 합니다.”
“웅? 왜 혼잣말해? 장모가 어딨어? 어디어디?”
무심코 혼잣말이 밖으로 튀어나오자 흙덩이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는데, 불릿은 개의치 않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꽃이라도 가꿔봐. 그러면 심심하지 않을 거야.”
흙덩이가 불릿에게 자주 안겨오는 이유는 그것을 하면 기분이 좋아서기도 하지만, 심심하다는 것도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니 집중할 수 있는 취미가 생기면 불릿도 일에 전념할 수 있을지 몰랐다.
“오빠랑 노는 것만큼 재밌을까?”
흙덩이가 불릿에게 안겨오며 묻자 불릿도 그녀를 안아주며 이에 대꾸해줬다.
“아니, 나랑 노는 게 당연 더 재밌지.”
“불릿 이상해….”
“후후후, 그래도 한번 해보렴. 의외로 시간가는 줄 모를 거다.”
“불릿이 해보라니까 해볼게. 잘하면 칭찬해줘야 돼?”
스윽스윽.
친밀을 위한 의식, 아마 머리를 쓰다듬어줬던 것은 불릿이 무심코 했던 일들 중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게 이어지고 이어져 결국 흙덩이와 맺어질 수 있게 되었으니까.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불릿이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며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어주었다.
“칭찬에 상까지 주마.”
불릿은 모를 것이다.
이렇게 억지로 참으며 애무나 애정행각 등의 스킨십으로 욕망을 분출하는 게 한번 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을.
덕분에 5공녀와 셰실리코프를 이어주려던 불릿은 그것에 대해 까맣게 잊고 흙덩이의 손을 잡고서 화단을 만들어주러 향하게 되었다.
“하아아….”
광활하고 아름다운 영토가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테라스.
그곳엔 맑은 눈망울을 지닌 여인이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분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
그녀가 말하는 그분이란 게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는데, 몇 마디를 내뱉은 이후론 가녀린 여인이 입을 열지 않았기에 더 이상 알아낼 재간은 없었다.
이토록 전망 좋은 곳에 자리한 방을 가진 그녀, 그리고 그녀가 있는 곳은 투툰 후작령의 성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이라 일컬어지는 ‘써니 로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