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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정령사-188화 (188/241)

00188  불모의 황무지로  =========================================================================

이젠 토벌이 아니라 전쟁준비를 시작하는 바포 변경백. 그곳의 백성들은 아직까지 전운을 느끼진 못했으나 새로이 결성된 신생 라체나의 기사들은 마음가짐이 남달랐다.

“후우우….”

“스으읍!”

“후우우….”

평소라면 훈련과 경계임무로 한창 바빴을 병사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백인장 밑 세스터스 아래 십인장들이 바닥에 앉아 호흡을 고르는 병사들의 사이사이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탁.

“병사, 호흡을 좀 더 깊고 천천히 내쉬어라. 체내에 마나가 머물 수 있도록 조절을 하도록.”

“옛, 알겠습니다.”

“계속하도록.”

“옛.”

한 병사를 지적한 이의 어깨엔 진홍색 케이프가 얹혀있었는데, 이것은 불릿이 군단을 새로이 창단하며 추가한 병사와 간부의 구분법이었다.

십인장의 경우 흰색 줄이 1줄, 백인장은 2줄, 천인자은 3줄이 나와 있었고 군단장의 경우 그러한 것 없이 무릎까지 닿는 기다란 망토를 착용했다.

그리고 이들이 무언가를 지적하며 돌아다니자 그 모습을 약간 떨어져서 지켜보던 세 줄의 흰색 선이 그어진 케이프를 착용한 이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옛 생각이 나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좋네.”

천인장으로 보이는 이들은 총 세 사람이 위치해 있었는데, 그들은 와해되기 전 옛 라체나의 선임기사였던 벤젼스와 일반단원이었던 페릭스, 겔럭서스였다.

“자네들도 창단식이 거행되면 라체나의 선임기사가 될 터이니 후배들에게 부끄럼 없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야.”

그래도 벤젼스는 경험도 많고, 실력도 소드익스퍼트 상급이었다.

비록 검술실력이 바포 변경백에 존재하는 상급의 익스퍼터들 사이에서 가장 낮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의 강함을 표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몇 없는 익스퍼트 상급 중 하나인 벤젼스의 말에 페릭스와 겔럭서스는 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핫, 가슴이 다 떨립니다!”

“그나저나 이제야 마나홀을 생성하려는 수련을 시작했으니 언제 정식기사가 될지 눈앞이 깜깜하군요.”

기사가 되기 위한 최소 조건은 마나를 다룰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일반적인 기준으론 소드익스퍼트 하급은 되어야 기사라 칭할 수 있다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녹록하진 않기에 하향평준화 된 부분이 있었다.

아무래도 흑마법사와의 전쟁 통에 대륙이 쑥대밭이 됐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들의 시야에 보이는 바닥에 앉은 병사들은 이제야 호흡법을 익히는 중이었으니 정예병이라 할지라도 기사의 기준에 근접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마수의 숲에서 마정석을 공급받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솔직히 좀 아깝습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수백 개를 일시에 풀어야 한다니.”

겔럭서스의 대꾸에는 벤젼스도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최하급 마정석만 하더라도 시세가 5실버가량 되었다. 평민 4인가정의 한 달 생활비가 5에서 8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눈살이 찌푸려지게 비쌌다.

이게 한 번만 투입되는 것이라면 괜찮겠지만 어디 재능 있는 자가 아니고서야 한 개 갖고 되겠는가?

적어도 소드유저가 될 때까지는 물량공세를 해야 한다는 점에 벤젼스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각하께 간청하여 허락을 받긴 했으나 여러 사람들이 좋아하진 않더군.”

“우리가 할 말은 아니지만 저라도 그럴 것 같습니다. 그 돈이면 장비를 새로 맞추고도 매일 고기파티를 벌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재무대신인 베니스 남작은 물론이거니와 마수의 숲과 인접한 영지 바스톤의 영주인 브룩 남작, 행정관들은 돈이 되어야 할 마정석이 버려진다고 대부분이 싫어했고, 그들을 지지해주어야 할 호위대장인 크레파토스도 불릿에게 부담이 된다고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끙, 그렇다고 풀떼기만 먹일 수도 없지.”

“후우우.”

“에효효….”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기사가 아닌 이상 매일같이 격렬한 훈련을 해야 했다.

마나가 모자라면 검술을, 검술이 안 되면 체력이라도 뛰어나야 했기에 보리죽, 멀건 스프만 먹어선 감당이 안 돼서 그렇다.

병사들이야 원래 수로 밀어붙이는 군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개개인의 역량은 그다지 상관없지만, 기사는 각 인원이 전투병기가 되어야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무거운 풀 플레이트 메일을 착용한 상태로 전장을 장시간 뛰어다니려면 싫어도 근육을 키워야할 판이었던 것이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단장님.”

“으음…, 아직 그렇게 부르지 마라. 부담스러우니까.”

“지금부터라도 적응하셔야지요.”

“내가 그 자리에 어울리긴 하나 모르겠군.”

페릭스와 겔럭서스의 말에도 벤젼스는 부담감을 떨치지 못했다.

지금이야 그가 최고실력자 중 하나지만, 예전의 대영주 직속기사단 라체나에선 선임기사에 불과했다.

검술실력이야 그렇다 쳐도 누군가를 이끌기엔 지휘능력이 미숙했기 때문인데, 이것은 연습한다하여 느는 것도 아니었기에 여러 상황을 겪어봐야만 했다.

“조장도 아니고 갑자기 단장이라니, 그냥 너희가 하면 안 되냐?”

책임을 떠넘기려는 벤젼스의 물음에 둘은 정색하고서 대답하였다.

“그건 단장님을 임명하신 각하에 대한 모독입니다.”

“단장씩이나 되셔서 엎드려뻗쳐 하고 싶지 않으시면 말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최근의 각하는 혈기왕성하시니까요.”

“이건 뭐 고민상담도 못하게 하는군….”

홀로 중얼거리던 벤젼스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가락을 퉁겼다.

딱!

“맞아, 부스타프가 있지 않은가?!”

벤젼스는 중앙영지의 경비책임자이자 같은 천인장인 욘 부스타프를 떠올리고선 기뻐했다.

“그는 사람을 다룬 경험도 풍부하고 예전부터 경비일을 해왔으니 단장직에 알맞지 않은가?”

단장은 기사단을 대표하는 이이긴 하지만 실력만 높다고 되는 자리가 아니다.

얼마나 단원들의 화합을 잘 이끌고 적재적소에 인원을 배치할 수 있느냐가 바로 단장의 임무였는데, 욘 부스타프라면 그러한 일에 대해선 얼음에 미끄러지듯 훌륭히 수행해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의 발언은 곧바로 부정당했다.

“그럼 성의 경비직은 대체 누가 맡습니까?”

“…? 그야 부스타프가….”

“명색이 백작각하의 얼굴이랄 수 있는 라체나의 단장직을 겸임이라는 형태로 만드실 생각이십니까?”

“…….”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기에 벤젼스의 얼굴엔 아차 싶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겔럭서스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가 그와 친분이 있어서 하는 말인데, 경비책임자의 자리가 그리 쉬운 자리가 아닙니다. 하루 업무량이 저희의 수십 배가 된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헉, 뭐가 그리도 많은가?”

겔렉서스의 말에 깜짝 놀란 것은 벤젼스 뿐이 아니라 가만히 듣고 있던 페릭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업무량도 적은 편은 아니었는데, 이보다 두 배나 세 배도 아닌, 수십 배라는 소리에 놀라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중앙영지가 오죽 넓습니까? 변경백의 주인이신 백작각하도 계시고, 또 귀족들이 대거 모여서 사는 지역인지라 치안유지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아, 이건 제가 그에게서 직접 들은 부분이지요.”

“보고만 받으면 되지 않은가? 자네들도 천인장이니 그쯤은 알잖은가.”

“다릅니다, 달라요. 저희는 기껏해야 혹여 발견될지 모르는 몬스터의 무리와 적군을 경계하는 것이지만 경비대는 주민들의 사소한 분쟁까지도 일임하고 있단 말입니다.”

중앙영지, 이곳은 투툰 후작령을 제외하면 루드밀라 왕국에서 가장 깨끗하고 안정된 지역이라 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던 데엔 경비대의 역할이 지대했다.

“귀족들의 분쟁엔 귀족이, 그것도 콧방귀 좀 뀔 수 있는 직책을 지닌 자가 개입해야 말릴 수 있는데, 그가 빠지면 누가 그 자리를 맡습니까?”

“음, 귀족들이 좀 사소한 걸로도 발끈하는 경향이 있지.”

“…좀이라 하셨습니까? 그 개지랄을?”

이들도 귀족출신이긴 했으나 기사로서 자랐고, 군인으로 생활하다보니 병사들에게 물들어 입이 매우 거칠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누구보다 귀족들의 생리를 잘 알면서도 그들과 어울리는 데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부터 루드밀라 출신인 자들은 그나마 낫지만, 외부에서 들어온 인사들의 경우 잘못 하나만 저질러도 평민의 목을 우습게 베려들잖습니까?”

“아, 나도 그거 봤네. 개새끼, 죽도록 패버렸었지.”

겔럭서스의 말에 맞장구를 치는 페릭스 천인장. 그도 당시의 장면을 회상하는지 입으로 끊임없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미친놈이 찻집에서 점원이 시중들지 않았다고 칼을 빼들더란 말이지.”

“…또 그 얘기인가.”

페릭스의 말에 겔럭서스는 많이 들어봤다는 뉘앙스를 띄웠는데, 이를 듣지 못했던 벤젼스는 흥미가 동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아, 글쎄 그놈이 기사도 아니면서 칼을 차고 다니잖습니까? 그래서 뭐하는 놈이냐고 물었더니 지 애비가 란푸스에서 잘나가던 군인이라 했습니다.”

“미친놈인가, 외국에서 잘나가는 군인이면 우리한텐 적이잖아?”

“그래서 저도 첩자냐고 좀 어루만져주며 물으니 이 새끼가 울먹이면서 지 애비한테 이른다고 합니다.”

“푸훗.”

“언제 들어도 웃기긴 웃기네.”

벤젼스가 웃음을 참지 못하자 겔럭서스도 살짝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그래서 아비는 뭐하는 놈이던가?”

“예, 그놈의 애비가 게슐린 그랩 자작, 지금은 1, 2구역으로 나뉜 곳 있잖습니까? 거기서 한 구역을 담당하는 행정관이랍니다.”

“능력은 있나보군. 그래서 어떻게 됐나?”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여기서 끝날 리는 없었기에 벤젼스가 묻자 페릭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웠다.

“이우우스 행정관이 아비는 해임시키고, 아들은 군단장께서 하위병으로 강제 입대시켰습니다.”

“푸훕!”

“크크큭, 더 웃긴 게 뭔지 아십니까?”

“흐흐흐…, 뭔데 그러나, 겔럭서스?”

고민도 잊은 채 낄낄거리며 웃던 벤젼스가 그에게 시선을 던지자 겔럭서스도 웃음보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아들놈은 살인미수죄로 평생토록 하위병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대하면 사형이니 나갈 수도 없지요. 큭.”

“파하하하! 군단장께서 센스가 넘치시는구나!”

“제가 듣기론 애비놈은 그토록 업신여기던 환경미화일을 하고 있답니다. 그것도 쓰레기만 줍는 담당입죠.”

“푸흐흐! 그만 좀 웃길세! 단장직 그냥 하면 될 거 아냐! 푸흐흐!”

이들이야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지만 실제론 살짝 암울한 주제였다.

바포 변경백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아직도 불순분자들은 존재하고 있었고, 분쟁을 싫어하는 여린 심성의 5공녀로 인해 그런 일들이 사라져버린 투툰 후작령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 대륙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들이었던 것이다.

란푸스 왕국은 예외다. 그곳에선 귀족이라 해도 왕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위를 하면 사형이었으니까.

“으으, 더워…….”

굳이 햇살이 쨍쨍 비추는 한낮의 수련장에서 호흡법을 익혀야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대영주 직속 기사단 ‘라체나’가 다시 결성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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