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7 불모의 황무지로 =========================================================================
불릿이 자신보다 어린 장모(….)를 만나고 있는 사이, 외교대사인 비 아이언 남작은 중요한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투툰이시여, 일단 만남이라도 가져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웬만해선 높은 사람의 앞이더라도 긴장하지 않는 아이언 남작이었으나, 투툰이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는 그도 감당하기 벅찬 것이었다.
“여보게, 사가하라. 지금 저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겐가?”
“투, 투툰이시여….”
“내 발언을 허하지도 않았거늘 멋대로 지껄이는군.”
“…….”
비 아이언 외교대사가 위치한 곳은 투툰 후작령, 그곳에서도 심처라 불릴 수 있는 투툰 후작의 여러 개의 성 중 하나였다.
영토가 어찌나 광대한지 차라리 하나의 국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넓었는데, 왕실도 이정도로 넓진 않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오직 외부인이 출입할 수 있는 성은 여러 용도로 쓰이는 다용도 성이었는데, 이름도 잡종이라는 뜻의 바스타드 캐슬이었다.
이는 투툰 후작이 외부인을 어떻게 여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의 성문을 두드리는 자들은 끊이질 않고 있었다.
“후작님, 일단 얘기를 들어보시지요.”
“하지만 저 개후레자식놈이 지가 오진 않고 감히 아랫것을 보냈지 않은가!”
“비 아이언 외교대사의 명성은 해외로도 널리 퍼져있습니다. 무능한 왕실의 외무대신보다 그 능력이 더욱 뛰어나다고 하니 들어볼 가치는 있다 판단됩니다.”
자신을 두둔해주는 듯한 사가하라 공작의 말에 비 아이언 외교대사는 오히려 경계를 하고 있었다.
‘왕실을 저버리고 투툰 후작에게 붙은 자, 섣불리 믿을 순 없다.’
애초에 왕족인 공작이 후작의 밑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툰 후작도, 사가하라 공작도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며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보니 사뭇 두렵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세를 아는 자들이다.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 뱉으면 경을 칠 것이야.’
“꿀꺽.”
부복해있던 아이언 남작은 투툰 후작의 처분을 기다리며 마음을 다잡았고, 이윽고 결론이 나왔다.
“흥, 그래도 공작이 그리 말하니 내 한번 들어는 보지.”
“감사합니다, 투툰이시여.”
“네놈이 아니라 사가하라 공작이 부탁했기에 들어주는 것이야. 에헴.”
겉으로 보기에 투툰 후작은 가벼운 인물로 착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지금도 계속해서 사가하라 공작을 두둔하며 동시에 그를 경계하는 말을 교묘히 섞지 않았는가?
사가하라 공작의 말에 따라 들어볼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과, 동시에 그에게 있어 빚을 지웠다는 인식을 주어 자신이 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크흥! 어디 한번 그 잘난 주둥이를 놀려보아라.”
드디어 허락이 떨어지자 비 아이언 외교대사는 준비했던 말을 천천히, 그리고 또렷하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어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가 투툰 후작령을 방문하게 된 이유는 수준 높은 검술로 왕국 전역에 이름을 알린 바람의 검사, 삼광(三光) 셰실리코프와 투툰 후작님의 아리따운 영애 5공녀 션샤인 폰 투툰님의 혼약을 위해서입니다.”
“그 놈팡이놈이 직접 와도 모자랄 판에 네놈이 무슨 자격으로 우리 아가와 그놈을 혼인시키겠단 거지?”
쿠구구-
‘크윽.’
투툰 후작은 아무런 기세도 끌어올리지 않았으나 그저 나직이 읊조리는 것만으로 중압감에 짓눌렸다.
투툰이라는 이름의 무게와 그가 여태까지 보인 행보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아이언 남작의 반응.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수완을 건지는 것이야말로 외교대사의 역할일 것이다.
“두 사람의 사랑을 허락해주신다면 투툰께오선 세 가지의 이익을 챙기실 수 있습니다.”
“계속해봐. 들어나 보자.”
흥미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으나 투툰을 상대로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반은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먼저 첫 번째를 꼽자면 5공녀께서 더 이상 슬퍼하지 않으실 수 있고, 첫사랑의 실연이라는 아픔이 멍에로 남지 않으실 겁니다.”
“내가 바포 변경백을 쓸어버리면 없던 일이 되는데 뭣하러?”
오싹.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는 자가 가벼이 내뱉는 말에 비 아이언 외교대사는 소름이 돋았으나 그걸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저희도 그 사실을 인지하곤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5공녀님의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사랑하고 있으니 맺어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리라 생각됩니다.”
결혼은 사랑하는 당사자들이 하는 것이 부모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지 못하고 부모가 결정해주는 자와 결혼해봤자 언젠가 파탄날 것이 뻔했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두고두고 후회할 요소가 생기는 것이다.
“세상이 이상적으로만 흘러가진 않지. 그래서, 두 번째는 무엇인고?”
지루했는지 투툰 후작은 턱을 괴고서 아이언 남작에게 물었는데, 눈동자만은 침잠하게 가라앉은 상태였다.
이에 아이언 남작은 준비해온 교섭내용에 살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는 차세대 소드마스터로 강력히 손꼽히는 인재, 삼광 셰실리코프 실라이온 퓨처 실피드를 사위로 받으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어이어이, 이보게 비 아이언 남작, 받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받아준다고 해야 옳은 말이지? 게다가 난 받아준다고 한 적도 없다고?”
심기가 불편했는지 아이언 남작을 한껏 얕잡아 부르는 어투였으나 투툰 후작이 하위귀족들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선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에 딱히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작금에 이르러선 왕실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투툰 후작이었으니까.
그래도 저런 태도를 보이는 자에게 준비한 대로만 대꾸할 순 없었기에 약간의 수정은 불가피했다.
“물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허나 제 말은 만약이라는 것을 전제로 깔고 있으니 조금만 양해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뭘 준비했는지 다 듣고서 판단하셔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권좌의 옆에서 사가하라 공작이 속삭이자 투툰 후작은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계속하라는 손짓을 했다.
“누구나 아는 사실로 흑마법사와의 전쟁으로 인해 대륙 전역에서 많은 인재가 사그라졌습니다. 이러한 때에 마나만 충족된다면 발군의 검술실력을 발판삼아 벽을 부술 수 있는 셰실리코프는 제가 말씀드리긴 부끄러우나, 감히 장담컨대 탐나는 인재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기사는 돈이 많이 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돈이 안 드는 부분이 없고, 하다못해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행정관을 배출하는 것보다 몇 배, 심하면 수십 배의 금액이 필요하다.
거기다 들이는 시간도 기본 10년은 훌쩍 넘어가니 기사 한 명이 죽을 때마다 그들의 충성을 받는 군주들의 손해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비용으로 보다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재를 찾는 것이고, 이러한 현상은 비단 기사뿐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같은 돈으로 더 좋은 기사를 부리면서 남들보다 앞서나갈 수 있다면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특히 셰실리코프는 5공녀를 사랑하고 있으니 충성 또한 보장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재들은 보다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떠나기 일쑤였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셰실리코프는 투툰 후작의 입장에선 군침 도는 음식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이란 것이 계획적인 접근이라면? 아니면 한 순간의 실수를 모면하려고 거짓된 행동을 보이는 거라면? 왜 내 딸의 인생을 걸고 그런 모험을 벌여야 하지? 여기도 익스퍼트 쯤은 널리고 널렸다만?”
“하오나….”
“뭔가 더 매력적인 조건 제시는 없나? 이것 참, 왕국 제일의 교섭가라더니 헛소문인가보군.”
투툰 후작에게 있어 군침 도는 음식은 매일 먹는 평범한 식사나 마찬가지였기에 이게 끌리느냐 묻는다면, 글쎄라고 답할 수 있겠다.
두 번째 제시까지 무시당하자 비 아이언 외교대사는 절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으나 아직 세 번째가 남아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선 투툰 후작이라 할지라도 거부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그에겐 있었기에.
생각을 정리한 아이언 남작은 서서히 그 입을 떼었다.
“세 번째, 진(眞)의 이름을 계승 중인 ‘상급 정령사’ 불릿 폰 바포 백작각하와 사돈이 되실 수 있습니다.”
움찔.
“…다시 말해보게. 아니, 처음부터 다시. 똑바로, 내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여태까지 보이던 나른한 태도와는 다르게 백팔십도 변한 투툰 후작의 모습에 비 아이언 외교대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먼저….”
“그만, 기다리시오. 후작님, 잠시만….”
사가하라 공작은 투툰 후작이 민감하게 반응하자 그가 성급한 판단을 내릴까봐 대화를 중단시켰고, 투툰 후작은 자신의 허락도 없이 그가 난입하자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사가하라.”
“방금 보이신 반응은 좋지 않습니다. 혹시 흥분하신 겁니까?”
“…크흥.”
“여러모로 놀라운 이야기가 속출하고 있지만 침착하셔야합니다. 당신이야말로 투툰 그 자체이시니까요.”
“아네, 알어. 알고 있다고.”
왕족인 사가하라 공작의 충언에 알퐁스 드미리치 폰 투툰 후작은 숨을 길게 들이마신 후 그를 뒤로 물렸다.
“자네가 말해줄 순서를 일러주겠다. 처음은 상급 정령사라는 부분, 둘째로 사돈이 된다는 부분, 셋째.”
“…….”
뜸을 들이는 후작의 말에 아이언 남작은 대꾸도 못하고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말을 하다말고 멈춘 투툰 후작은 언제 그랬다는 양 말을 이어갔다.
“셋째, 진(眞)의 이름을 언급한 점, 비 아이언 외교대사. 자네는 이 점들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본 후작에게 고해야 할 것이야.”
위엄 가득한 투툰 후작의 웅변에 비 아이언 외교대사는 부복한 상태에서 다시금 고개를 숙인 후 크게 외쳤다.
“명심하겠습니다, 투툰이시여!”
“좋다, 이제 본좌에게 고해보도록.”
“먼저 저희 각하께오선…….”
* * *
풀썩!
“하아, 하아! 부, 불릿님!”
“후욱, 오라버니라고 부르라 했지!”
“흐잇…오, 오라버니!”
불릿에 의해 침대에 던져진 유실리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촉촉한 눈망울을 드러냈다.
그런 그녀를 불릿은 체취란 체취는 모두 맡겠다는 것처럼 냄새를 쓸어갔고, 유실리아는 아래에서 코를 박고 미칠 듯이 킁킁대는 불릿의 행위에 파르르 떨었다.
“후욱, 후욱. 장모님이 아이를 많이 낳으시라고 했잖아? 후욱!”
“그, 그건…읍, 흐읏.”
유실리아는 못 참겠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입술은 연지라도 바른 것처럼 변했으니, 그것을 불릿은 단숨에 위로 올라오며 손바닥 사이로 핥아갔다.
“이, 이러시면 안돼요!”
“뭐가, 아이? 낼름낼름!”
“하악! 저, 저는 마님보다 나중에…히끅….”
“그럼 기분만이라도 내자고. 미래를 대비해서 연습한다 생각, 후욱! 넣는다.”
유실리아는 그런 불릿의 과격한 행동에 차마 말도 못하고 더욱 시뻘게진 얼굴로 신음까지 참아내며 부드러운 손길로 불릿의 등을 얼싸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