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86 불모의 황무지로 =========================================================================
“…제가 내린 결론이 아닙니다. 오해마시길.”
“그래서, 자네는 책임이 없으시다?”
“그런 게 아니질 않습니까.”
“그럼 마법사의 탑은 죄다 바보병신 쓰레기, 쥐새끼보다 못한 놈들로 이루어졌다 생각해도 되겠는가?”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아는 새끼가 그따위로 발언해?!”
쾅!
“자네가 말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본인이 묻지 않았다면 이러한 사항에 대해서 언급이라도 했을 것인가? 어!”
“……했을 겁니다.”
“지랄 말라고 전해라. 마탑 본령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기 전에.”
국가도 아닌 일개 변경백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리는 없으나, 그의 분노를 자베르도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항상 침착해야할 마법사인 자베르는 여름이지만 시원함을 유지하고 있는 실내에서 슬쩍 맺히는 땀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백작님께 유감이 없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왜 이곳에 와있고, 도움을 드리려 발품을 팔겠습니까?”
자베르가 자신의 억울함을 강조하자 불릿도 화를 풀며 내려친 주먹이 아팠는지 반대쪽 손으로 매만졌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자네도 당시 현장에 있어서 알겠지만 흙덩이가 아니었으면 우린 모두 죽었네. 아, 이건 우리 아가를 자랑하는 게 아니라 사실일세, 알지?”
은근슬쩍 흙덩이 자랑에 나서는 불릿이었으나 사실은 사실인지라 자베르도 이에 동의했다.
“물론입니다. 골드클래스인 제가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 점에 대해선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됐네, 됐어. 사과받자고 한 말이 아니니까.”
“역시 작은아씨는 비밀을 공유해도 좋으신 분 같습니다. 2세 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
“험험, 나중에, 아직은 좀 더 사랑하며 지내고 싶군.”
아부를 할 때엔 상대방이 관심을 쏟는 분야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불릿에게서 그것을 꼽자면 흙덩이에 대한 무한애정이 아닐까 싶다.
그가 흙덩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는 회의실에서 회의 중에 가신들이 직접 밖으로 나가야할 정도로 응응(?)에 집착하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베르의 속셈은 성공적으로 통했다.
“크흠. 그래도 이번은 사안이 다르네. 최종결전만 하더라도, 무슨 마족인지는 알 수 없으나 72군주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함을 자랑했네. 우리 모두가 라그나로크를 통해 모든 기운을 남김없이 사용했을 정도니까.”
말은 좀 유순해졌으나 물러서지 않는 불릿, 하지만 자베르도 여기까진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지부로 그때의 일에 대해선 결과를 전달받았었습니다. 백작님의 고충, 충분히 이해하고 저도 모른 체 하기엔 저희의 관계가 돈독하니 본령에서 직접 나설 수 있도록 힘써보겠습니다.”
“그래준다면 매우 고맙겠네. 괜찮다면 식사라도 하고 갈 텐가?”
시작은 지하공동에 대한 보고였으나 어느새 협상이 되어버린 대화에서 자베르는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땀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초대해주신다니 저로선 영광입니다. 식사를 하면서 계획에 대해서 틀을 잡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지금이 점심이니 가볍게 들고 저녁까지 들고 가시게. 자네의 지부에서 이곳은 머니까 말이지.”
“배려에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예, 말씀하시지요.”
불릿은 훈훈해진 분위기 속에서 잠시 뜸을 들인 후 말을 이었다.
“저녁엔 좀 더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으니 다른 이들은 모두 물리고 자네, 본인, 그리고 흙덩이 이렇게 셋이서 식사를 하는 게 어떻겠나?”
“작은아씨 말이십니까?”
“아직 조금 챙겨줘야 할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머리는 좋다네. 이해하는데 모자람은 없을 것이야.”
“아닙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걱정은 없습니다. 흐음.”
그는 다른 부분을 고민하는 듯 생각을 이어가다 입을 떼었다.
“석식엔 이곳의 지부장을 불러도 되겠습니까?”
“이유를 알 수 있는가?”
뭘 하는 인물인지는 알지만 자신의 사람이 아니기에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기에 물음을 던지자 자베르가 자신의 생각을 내놓았다.
“이곳 바포 변경백에 파견된 지부장은 저와 이곳, 중앙영지의 지부장 아크 체인 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저와는 달리 인챈트에 특화된 마법사니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군, 그러고 보니 본인의 영토에 보급되는 대부분의 마법물품을 그가 만들고 있었군.”
원래 대부분의 지부장은 게이트웨이학파가 맡고 있었으나, 이렇게 중앙영지처럼 텔레포트가 치명적인 요소로 자리 잡는 곳엔 다른 학파계열이 종종 맡기도 했다.
그 중에서 아크 체인은 마법도구를 만드는 장인으로 불릿의 영토에서 벌어지는 내전에서도 별달리 관심을 갖지 않은 인물이었다.
인챈트학파야 돈만 제때 준다면 손님을 가리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중립을 표방하는 인물을 부른다니 의심이 갈 만도 했지만 지금으로썬 사람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불러보시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군.”
“제가 힘 좀 써보겠습니다.”
“믿어보지. 할인이 된다면 물품을 대량으로 구매할 의양도 있다 전해주시게.”
“그 점을 밀어보겠습니다.”
협상이 거의 끝나가자 불릿도 자리에서 일어나 자베르와 함께 나서려했다.
“나가시렵니까?”
“자네는 하녀의 안내를 받게. 본인은 갈 데가 있어서.”
뚜벅, 뚜벅.
달칵.
불릿이 문을 열어주자 자베르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섰고, 복도에서 대기하던 지크테와 함께 앞장서는 하녀와 사라져가자 불릿은 발길을 재촉했다.
“이런, 늦었군.”
어딜 그리 급히 가는 것인지 불릿은 서둘러 발길을 재촉해 그들과는 반대편으로 점점 멀어져갔다.
* * *
“나 화장 뜨진 않았니?”
“엄마도 참, 괜찮다니까요?”
“그래도….”
“눈썹도 예쁘고 입술도 귀엽고, 젊어보이세요.”
“호호, 얘도 참.”
모녀가 훈훈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달카닥-.
“늦어서…흠흠, 늦어서 죄송합니다, 장모님.”
“아휴, 주인님, 아니에요, 장모라니요.”
“아닙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불릿님 오셨어요?”
“늦어서 미안하다, 유실리아.”
“아니에요. 얼마 안 지났는걸요?”
불릿은 환대를 받으며 들어섰는데, 그가 품격있는 방에 자리한 소파에 앉자 비로소 서있던 중년여성과 유실리아도 자리에 앉았다.
“그게 문제야. 이런 중요한 자리에 늦다니, 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호호호, 아니에요, 아유, 주인님이 엄청 젊어지셨네요?”
지금 불릿과 대화를 나누는 이는 유실리아의 어머니이자 20여 년 전 아직 영주가 되지 못했던 직스 주니어에 의해 팔려나갔던 16에서 18세 사이의 처녀였던 것이다.
지금이야 세월이 지나 어느새 40에 근접한 중년여성이 되었지만 그때만 하더라도 꽤나 예쁘장했기에 팔려나갈 만했다.
그 미모를 고스란히 물려받고 뭔가를 더했는지 더욱 예뻐 보이는 유실리아는 청초한 미모를 뽐내며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그동안 일이 바빠 찾아뵙지 못한 점, 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꾸벅.
무려 백작의 작위를 지닌 자가 평민, 그것도 하녀에게 고개를 숙이니 유실리아의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
“그러지 마세요, 주인님! 에구, 유리야, 어떻게 좀 해보렴!”
“불릿님, 어머니가 곤란해 하세요. 말을 낮추시면 안 될까요…?”
아무리 유실리아의 어머니라 해도 격이 달랐기에 무척 부담스러워했는데 이에 불릿이 완강히 거부했다.
“배리나, 나에게 유실리아라는 아리따운 따님을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주인님… 제 이름을 기억해주셨군요….”
불릿은 자주 마주치는 인물들의 이름은 잘 외우고 다녔다.
더구나 그녀들은 자신이 직접 구해주고 성에서 일하도록 일자리를 만들어준 여자들이었으니 특별히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의 기억 속엔 언뜻 기둥 모퉁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자신을 쳐다보던 유실리아가 떠올라 입가에 웃음이 맺혔다.
“하하, 그나저나 유실리아의 애칭이 유리입니까?”
“에휴, 말을 낮추시라니까요…, 네, 맞아요. 우리 기특한 딸내미를 저는 그렇게 부른답니다.”
“그럼 나도 그렇게 불러봐야겠군. 유리?”
화아악-.
“네, 넷, 부, 불릿님….”
항상 이름을 불러주던 불릿이 어머니만 불러주던 애칭을 사용하자 단숨에 확 붉어지는 유실리아의 얼굴.
그 때문인지 그녀의 어머니와 불릿이 동시에 웃었다.
“호호호.”
“하하하.”
그러다 문득 생각이 불릿은 배리나에게 말을 걸었다.
“거처를 성내로 옮겨야겠군요. 장모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아휴, 주인님이 그래주신다면야 저희야 좋지요. 유리도 자주 볼 수 있고, 또…호호.”
“주인님이라 부르지 마시고 편하게 사위라 하십시오. 당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제가 무슨 자격이 있겠어요….”
아무래도 팔려가다 구출 당했던 기억과 하녀라는 자격지심이 뒤섞여 존대를 해주는 불릿의 자세에도 좀체 허리를 펴지 못하는 배리나였다.
이런 배리나에게 불릿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실리아에게로 다가갔다.
뚜벅, 뚜벅.
“불릿님? 무슨 용무라도…으븝!”
“쮸웁, 츄-읍, 츕, 쪽.”
“어머어머! 세상에 어머!”
불릿은 유실리아의 어머니인 배리나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턱을 치켜든 후 당당히 키스를 가했는데, 어찌나 진하게 빨아먹는지 그가 입술을 떼었을 땐 유실리아의 화장품이 덕지덕지 묻은 상태였다.
할짝.
“…이처럼 저는 유리를 사랑합니다. 그러니 말씀 편하게 하시지요. 공적인 자리에선 서로 존대를 하더라도 이곳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뭐라 할 수 없습니다.”
“부, 불릿님….”
“유리, 너도 나에게 편히 말해라. 님자를 빼도 좋고, 올리비아나 흙덩이처럼 오빠라 불러도 좋다. 개인적으론 그게 더 좋고.(?)”
“그, 그럼…오, 오… 오라버니….”
푸시식-
머리에서 김이 올라오는 유실리아를 보며 불릿은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것도 나쁘진 않군…. 실례했습니다. 장모님 앞에서 보여드릴 모습은 아니었지만 제가 얼마나 유실리아를 사랑하는지 보여드리고 싶었기에.”
다시 한 번 꾸벅 머리를 숙이는 불릿에게 배리나는 허둥대며 그를 말렸다.
“머리 숙이지 마세요!…어휴, 그, 그럼…사위…님?”
“아직은 어려우신가 보군요. 편해지실 때 마음껏 부르시길.”
“그렇게 할게요, 사위님. 오호호.”
보통 귀족이 평민처녀를 첩으로 삼을 때 그들의 부모에게 존대를 하는 경우는 없다.
배려를 해주더라도 돈 몇 푼 던져주거나 잘해야 저택에 머물게 해주는 정도.
그나마도 온갖 멸시와 눈치를 받다 독살당하거나 스스로 집에서 나가게끔 만들었기에 불릿의 이런 행동은 파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대영주의 위치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저어되는 것이었지만, 그가 누구인가?
근래 반역에 연루된 자들 모두에게 엄벌과 함께 사형을 지시한 자가 불릿이었고, 언제나 발로 뛰어다니며 모두에게 타의의 모범이 되는지라 이런 거 가지고 뭐라 할 이는 몇 없었다.
설사 뭐라 하더라도 부인들에 대한 문제는 절대 물러섬이 없는 불릿이었으니 유실리아, 그녀는 복 받았다.
“오라버니…?”
여전히 김이 솟아오르는 유실리아가 조심스레 그를 부르니 배리나와 불릿은 동시에 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호호호호! 애는 숨풍숨풍 낳으렴!”
휘이잉-
“어, 엄마!”
“…….”
안 해도 될 소리를 하여 찬바람이 불게 만드는 유실리아의 어머니, 배리나였다.
========== 작품 후기 ==========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