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125화
하준은 국가적 재난에 대한 성금 기부는 굳이 감추지 않았지만, 자잘한 기부는 일부러 감추는 편이었다.
하준은 노인분들을 위한 기부도 종종 했지만, 평소에 아이들을 위한 기부를 자주 했다. 보통 보육원이나 소년소녀가장들을 돕는 기부를 많이 했는데, 이런 경우 드러나지 않도록 최대한 숨겼다.
기부받은 아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일단 하준은 기사를 빠르게 확인해보았다.
다행히 구체적으로 어느 보육원인지는 나와 있지 않았고, 기부받은 한 아이의 짤막한 인터뷰만 나와 있었다.
하준은 기사를 후루룩 읽은 후, 곧바로 최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저 하준인데요, 제 기부 기사 난 거 보셨어요?”
-아, 나도 좀 전에 봐서 알아봤는데, 기부받은 애가 얘기해서 알려진 건가 봐. 인터뷰한 애가 직접 제보했대. 고맙다고 꼭 말하고 싶다고.
“아······ 그래요? 흠.”
-응, 나도 기사 내려달라고 요청하려고 했는데, 인터뷰한 애가 알리고 싶어 했고, 또 구체적인 사안들이 드러난 것도 아니라서······. 이번엔 그냥 두는 게 어때?
“······네. 아이들이 피해 입지는 않겠죠?”
-그렇지는 않을 거야. 벌써 교복 산 애들도 많을 거고. 개학 얼마 안 남았잖아.
“네, 알겠어요.”
하준은 최 대표의 자초지종을 듣고 이번 기사는 그냥 두기로 했다.
“하준아, 무슨 일 있어?”
하준이 최 대표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은 최선희가 방문을 빼꼼 열고 물었다.
“별일 아니야. 기부 기사가 떠서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봤어. 기부받은 애들 신상 드러난 건 아니라서 그냥 두기로 했고.”
“그랬구나. 아, 심심하면 이거 볼래?”
최선희가 낑낑대며 하준의 방으로 웬 서류박스를 끌고 들어왔다.
“이게 뭔데?”
하준이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얼른 엄마를 도와주었다.
“네 팬레터. 너 외국 가 있는 동안 엄청 많이 왔거든. 선물은 따로 선물방에 갖다 놨는데, 팬레터는 여기 모아뒀어.”
박스를 열어보니 각양각색의 편지봉투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와, 나 해외 나간 한 달 동안 온 거야?”
“응, 이번엔 더 많아진 거 같아. 오랜만에 네가 드라마도 찍고 그래서 그런가 봐.”
“이 많은 걸 언제 다 읽지? 하하.”
하준은 난감해하면서도 활짝 웃었다.
“이제 뭐 시간 많잖아?”
“그건 그래. 그럼 어디 읽어볼까?”
하준은 팬레터 읽는 게 취미였다.
그는 기억력도 좋아서 팬레터를 보낸 사람과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했다가 팬사인회 등에서 만나면 알아봐주곤 했다.
그 덕분에 팬들은 하준에게 더 친근감을 느끼며 하준에게 빠져들었다.
또한 팬레터를 빠짐없이 읽는다는 소문에 팬들은 더 열심히 하준에게 팬레터를 보냈다.
“어? 이 편지봉투는 지윤인데!”
하준은 항상 똑같은 빨간색 리본 모양의 편지봉투에 편지를 담아 보내는 팬의 편지를 가장 먼저 꺼내 들었다.
그녀는 거의 5년 된 하준의 오랜 팬이었다.
-오빠! 저 지윤이에요. <우리들의 학교> 너무 너무 재밌게 잘 봤어요. 제 친구들은 사실 오빠 팬 아니었는데, 이번 드라마 보고 다들 팬 됐대요! 그래서 저한테 오빠에 대한 것들 이것저것 다 물어봐요. 전 신나서 다 대답해 주고요. 제가 이래봬도 오빠의 진성팬이잖아요. ㅎㅎ
지윤이는 2장의 편지 내내 하준을 찬양하다가 언제나처럼 PS. I LOVE YOU로 편지를 끝냈다.
하준은 지윤이의 편지를 다시 그대로 접어 편지봉투에 넣었고, 하준의 침대 옆에 놓인 읽은 팬레터를 넣는 박스에 편지를 담아두었다.
그리고 다른 편지들을 읽기 시작했다.
-하준 오빠!! 너무 잘생겼어요!!(사실은, 저 누나임.. 하지만 잘생기면 다 오빠ㅋㅋ)
오빠, <신비종>에서도 멋있었지만, <우리들의 학교>에서도 너무 멋있었어요. <우리들의 학교>도 그렇고, <신비종> 시즌 7도 수능 끝나고 해서 완전 좋았어요. 고 3 때는 오빠 노래 들으면서 공부 열심히 했는데, 수능 끝나니까 딱 맞춰서 오빠 드라마가 똭!^^
참, 전 이번에 K대에 붙었답니다!
다 오빠 덕분이에요~ 이상하게 오빠 노래 들으면 공부가 잘 돼요~ㅎㅎ 그래서 말인데요, 다음 앨범은 언제······?
-오빠, 저 연예인한테 팬레터 쓰는 거 처음이에요.. 오빠가 너무 좋아서 안 쓸 수가 없네요.(부끄..)
우리 학교에는 왜 오빠처럼 멋있는 남자애가 없을까요? 오빠가 고등학교 다녔으면 전 그 학교로 전학갔을 텐데.. (아.. 이래서 오빠가 고등학교를 안 가셨겠구나..)
아무튼 <우학> 보면서 공감도 많이 되고 위로도 많이 됐어요. 저는 이제 고2가 되는데, 엄마가 이번 <우학>이 마지막 드라마랬어요. 대학 가서 드라마 보래요ㅜㅜ
2년 동안 공부만 죽어라 하라는 거 있죠.. 우리 엄마는 <우학>보고도 깨달은 게 없는 듯..
근데 오빠는 대학 안 가요? 대학 갈 거죠?
어느 대학 갈 거예요? 저도 오빠가 가는 대학 가고 싶은데..
-하준 배우님, 지금 해외를 돌고 계시겠지요? 저는 열심히 하준님이 나온 영상들을 찾아보고 있어요. 노래도 듣고요. 하준님은 끊임없이 활동을 해주셔서 너무 좋습니다. 노래, 영화, 드라마, 복습할 게 너무 많아서 좋아요. 근데 초등학교 때 앨범, 중학교 때 앨범은 있는데, 고등학교 때 앨범은 안 내시나요?
지금은 중학교 때랑 목소리가 조금 달라지셨잖아요. 그 목소리로 앨범 좀 내주세요. 고등학교 때 목소리도 저장하고 싶습니다~^^
“앨범 내 달라는 얘기가 많네. 흠······.”
팬들은 하준의 이번 <우리들의 학교> 드라마가 너무 재밌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거기에 더해 이제 드라마는 하나 찍었으니 앨범도 하나 내 달라고 슬쩍 부탁했다.
하준은 편지를 몇 개 읽다가 최선희에게 가서 물었다.
“엄마, 나 중학교 때랑 목소리 많이 달라?”
“응? 음, 좀 더 굵어지긴 했지?”
“그래서 이상해?”
“아니지, 멋있어졌지. 중학교 때까지는 그래도 아이 같은 목소리가 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아이 같진 않아. 부드럽지만 멋진 목소리야. 근데 그건 왜 물어?”
“팬들이 앨범 내 달라면서 내 고등학교 때 목소리도 수집하고 싶대서.”
“오, 진짜 그렇네! 지금 네 목소리는 지나면 다시 들을 수 없잖아.”
최선희는 팬들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내 하준에게 물었다.
“근데 너 이제 수능 공부 시작해야 하잖아? 앨범 낼 시간이 있겠어?”
원래 하준은 19살 때는 수능 준비를 하기 위해 아무 활동도 안 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음, 근데 또 팬들 얘기 들어보니까 앨범 하나 내면 좋을 것도 같아. 내 노래 들으면서 공부하는 데 힘낸다는 팬들도 있고 그렇거든.”
“뭐, 엄마는 뭐든 네 결정을 존중해. 앨범 내고 그 이후에 공부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되고, 힘들 것 같으면 공부만 해도 되고.”
최선희는 하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처음에 하준을 입양했을 때에는 하준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하준의 자유를 보장해주었고, 그렇게 뒀더니 혼자서도 너무 잘하기에 그 이후로는 아예 하준을 믿고 스스로 결정하도록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음, 어쩔까······.”
하준은 생각에 잠겼다.
***
일주일 뒤.
“응? 미니 앨범을 내겠다고?”
최 대표가 깜짝 놀라서 하준에게 물었다.
“네, 낼까 말까 고민했는데, 마침 좋은 악상이 떠올라서요.”
“너 공부 시작한 거 아니었어? 목표가 한국대라며? 근데 굳이 지금 앨범을 내겠다는 거야? 대학 가서 내도 되잖아?”
최 대표는 한국 사회에서는 대학 타이틀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올해는 하준이 입시에만 열중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활동은 안 하고 그냥 앨범만 내려고요. 팬들이 제 앨범 엄청 기다리기도 하고, 저도 지금 제 목소리 남기고 싶거든요. 제 목소리의 기록 삼아 내고 싶달까요?”
“목소리의 기록······이라? 음, 하긴 지금 지나면 또 목소리가 좀 바뀌긴 하지······.”
최 대표는 활동은 안 하고 앨범만 내는 거면 하준에게 그리 시간을 많이 뺏지는 않을 테니 괜찮을 것 같았다.
녹음도 금방 하는 하준이었으니까.
“그래, 그래도 노래가 좋은지 들어봐야 하니까, 일단 불러봐. 유택아, 박 피디 좀 오라고 해.”
월드 엔터의 전속 작곡가인 박성배는 새로운 사옥에 마련된 작업실에서 음반 작업을 하다가 대표실로 불려왔다.
“하준이가 앨범을 낸다고요? 고3인데요?”
박 피디 역시 대표실에 들어오자마자 놀라며 물었다.
“활동은 안 할 거래. 이미 작사, 작곡 다 해왔다니까, 일단은 들어보자구.”
최 대표는 박 피디에게 간략히 정보를 준 다음 하준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하준은 자신의 노래에 대해 먼저 설명했다.
“곡은 2곡인데요, 하나는 발라드고, 다른 하나는 락이에요. 둘 다 힘든 학생들을 위로하는 노래인데요, 발라드는 공감에 초점을 둔 곡이고, 락은 밝은 미래를 꿈꾸라는 희망에 초점을 둔 곡이에요.”
“뭐야, 2곡이나 만들었어? 허허.”
“곡 기획의도부터 기대가 된다. 얼른 불러봐.”
“네, 먼저 발라드곡 ‘알아’부터 불러볼게요.”
하준의 아름다운 기타 선율이 울려 퍼지고, 곧 하준이 입을 열었다.
“알아 네가 힘들다는 걸~ 캄캄한 어둠 속을 지나고 있다는 걸~”
하준의 부드러운 음색이 잔잔하게 깔리며 최 대표와 박 피디의 귀를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서로의 눈빛을 읽었다.
‘첫 소절만 들어도 좋다!’
물론 하준의 노래는 첫소절만 좋은 게 아니었다.
뒤로 갈수록 더 좋았다.
“그래도 그 길 끝에서~ 널 기다리고 있어~ 너를 사랑하는 내가~ ”
하준의 노래가 끝나자, 최 대표와 박 피디는 기립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와, 너무 좋은데?!”
“뭐야, 하준이 목소리 왜 이렇게 성숙해졌어? 노래랑도 잘 어울리고, 완전 힐링 보이스야!”
두 사람의 극찬에 하준은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정말요? 다행이에요.”
“응, 진짜 좋아. 진짜 막 위로가 되는 느낌이야. 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듯이 노래하니까 더 마음에 와닿는다.”
“맞아, 이건 통과! 다음 곡 불러줘 봐.”
최 대표가 궁금함에 하준을 재촉했다.
“다음 곡은 ‘날아올라’라는 곡이에요. 그럼 불러볼게요.”
이번 곡은 반주부터 이전 곡과 전혀 달랐다.
아까는 기타줄을 하나하나 튕겼지만, 지금 하준은 피크로 한 번에 여러 기타줄을 긁으며 힘 있고 신나게 기타를 연주했다.
노래 역시 아까와는 달리 힘차고 강렬한 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나를 찾아다녔지~ 지친 나는 대답조차 할 수 없었어~”
이 노래 역시 멜로디가 두 사람의 귀에 강렬하게 꽂혔다.
또한 더 놀라운 것은 하준의 색다른 목소리였다.
아까 발라드를 부를 때와는 전혀 다른 터프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자 이제 날개를 펼치고 한번 해보는 거야~ 세상을 향해 날아올라~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 Fly!”
게다가 하준은 마지막 고음 부분에서 진짜 록커처럼 목을 긁는 소리까지 냈다.
최 대표와 박 피디는 이렇게 훌륭한 노래를 발매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준아, 당장 녹음하자!”
흥분한 박 피디는 하준을 당장 녹음실로 끌고 갔다.
그렇게 하준의 앨범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하준의 앨범 발매 소식에 팬들은 만세를 불렀고, 약 3주 후, 팬들의 열렬한 기대 속에 하준의 디지털 미니 앨범이 발매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