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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만 걷는 천재스타-15화 (15/150)

15화

15화

“안녕하세요.”

최선희와 함께 촬영장에 들어선 하준이 배꼽인사로 등장을 알렸다.

그러자 스태프들이 난리가 났다.

뮤직비디오 감독인 송무흥이 미리 엄청난 애가 올 거라고 예고를 해놓은 탓이었다.

“오, 네가 하준이구나!”

“어머, 너 진짜 멋있다.”

“네가 요즘 핫하다는 바로 그 아역 애니? 귀여워라!”

송 감독도 하준의 목소리를 듣고 반갑게 달려와 하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준아, 오늘 잘해보자. 이번 뮤직비디오는 정말 너 하나만 믿고 가는 거거든.”

“네······ 어깨가 살짝 무겁네요.”

하준이 엊그제 읽은 책에서 본 관용 표현을 활용해 부담스러움을 표시하자, 송 감독은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을 번복했다.

“엇, 내가 부담을 줬구나. 미안, 그냥 네가 연기할 때처럼 편하게 표현만 잘해주면 돼.”

“네, 열심히 해볼게요.”

“응, 그럼 돼. 아, 콘티는 한 번 보고 왔지?”

콘티는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등의 영상을 제작할 때 장면 구도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카메라에 어떤 식으로 화면이 들어갈지 컷으로 나눠 그려져 있었다.

“네, 만화책 보는 것 같아서 재밌었어요.”

“재밌었다니 다행이다. 특별히 표정을 잘 살려서 그렸는데, 각 장면이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어?”

“네, 거의 이해했어요.”

“오, 좋아. 그럼 일단 여기 앉아 볼래?”

하준은 촬영장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 오늘 뮤직비디오 콘티를 보면서 촬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송 감독으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잠시 후, 하준은 의상을 갈아입었고, 스태프들은 소품, 카메라 등 촬영 준비를 마쳤다.

그러고는 막 촬영을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촬영장 입구 쪽이 아까 하준이 등장했을 때처럼 시끌시끌해졌다.

발라드 가수 한범우가 촬영장에 등장한 것이다.

“어? 범우 씨? 범우 씨가 어떻게······?”

송 감독이 깜짝 놀라 한범우에게 다가갔다.

송 감독이 놀란 이유는 원래 한범우는 스케줄이 맞지 않아, 하준과 따로 촬영을 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 감독님, 안녕하세요! 앞 스케줄이 빨리 끝나서 잠깐 짬이 나서 와봤어요. 하준이가 궁금해서요. 오, 네가 하준이구나! 나보다 훨씬 잘생겼네?”

“안녕하세요, 아역 배우 하준입니다.”

하준이 배꼽인사를 하자, 한범우가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여워했다.

“아휴, 네가 그렇게 연기를 잘한다면서? 부럽다, 아저씨. 아니 삼촌은 연기 진짜 못하거든.”

한범우의 말대로 한범우는 연기를 잘 못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 노래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나'로 단 하루만 돌아가서, 떠나가는 연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다채로운 연기가 필요한 건 ‘어린 시절의 나’ 역할을 맡은 하준이고, 한범우는 무표정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현재 어른인 나’만 연기하면 되었다.

“한범우 삼촌은 노래를 엄청 잘하시잖아요.”

“하하, 너 내 노래 알아? 들어 봤어?”

“네, ‘달빛 아래’, ‘사랑하니까 그래’ 그런 거랑 이번 노래 ‘단 하루만’도 알아요. 노래가 너무 좋더라고요. 삼촌 목소리도 좋고요.”

하준은 자기가 출연할 뮤직비디오의 노래니까 당연히 ‘단 하루만’을 열심히 들어보았다. 그리고 그 노래가 꽤 마음에 들어서 한범우의 다른 노래들도 여러 곡 찾아서 들어봤다.

“크, 삼촌 좀 감동 먹었다. 고마워. 오늘 뮤비 촬영 잘 부탁해.”

한범우는 하준의 손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다정하게 부탁했다.

그러더니 자기는 잠시 촬영을 구경하다가 가겠다면서 카메라 옆쪽에 자리를 잡았다.

한범우는 하준의 연기도 확인하고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 그럼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촬영장에는 감정의 종류에 따라 다르게 구성해 놓은 세트가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는데, 첫 번째로 하준이 촬영한 세트는 설렘 세트였다.

하얀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하준은 핑크색 방에 엎드려서 8절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려져 있는 그림을 그리는 척하면서 설레는 표정 연기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들 기대한 것과는 달리, 하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설레는 표정이 아니라 심각한 표정이었다.

‘음, 감정을 잡느라 그런가?’

송 감독은 그래도 하준을 믿었기에 아직 컷을 하지 않고 일단 좀 지켜보았다.

하지만 좀처럼 하준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송 감독은 컷을 외치려 했는데, 그때 하준이 갑자기 먼저 손을 들었다.

“감독님, 잠시만요. 저, 이 그림 제가 직접 그리면 안 될까요?”

송 감독은 일단 컷을 외치고 나서 하준에게 되물었다.

“직접?”

“네, 그리는 척하는 게 더 어려워서요. 뭔가 좀 어색하고요.”

“직접 그리면 당연히 더 좋기야 한데, 그렇게 비슷하게 그릴 수 있겠어?”

“네. 그렇게 어려운 그림은 아니라서요.”

하준이 그리던 그림은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아야 하기에 세밀한 그림은 아니었다.

단순화해서 그린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손을 잡고 있고, 그 가운데에 하트가 그려진 그림.

그리고 그 아래에는 ‘슬기야, 너무 너무 좋아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사실 이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 고백용 그림 편지였던 것이다.

“오, 그럼 우린 활용할 컷이 많아지니까 더 좋지. 철민아, 하준이 새 도화지 좀 가져다줘.”

송 감독이 한 스태프에게 지시했고, 곧 하준의 앞에는 하얀 도화지가 세팅되었다.

하준의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최선희는 그러고 보니 하준이 그림을 그리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우리 아들이 그림도 잘 그리나?’

촬영이 시작되자, 최선희는 너무 궁금해서 고개를 빼고 하준의 도화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다른 스태프들도 하준이 과연 그림을 잘 그려낼까, 또 이번에는 그림을 그리면서 설레는 마음을 표정에 잘 담아낼 수 있을까, 무척 궁금해하고 있었다.

하준은 대본을 기억한 것처럼, 혹은 읽은 책을 기억하는 것처럼, 방금 본 그림이 머릿속에 그대로 기억되어 있었다.

‘손만 좀 따라주면 되는데······.’

하준은 손을 한번 풀고 크레파스를 잡았다.

살색으로 얼굴을 칠하고, 머리를 땋은 여자아이와 레고 머리를 한 남자아이를 슥슥 그려나갔다.

이 그림 편지를 받고 좋아할 여자아이를 상상하며.

‘오, 그래 이거지!’

아까와는 전혀 다른 감정선을 보여주는 하준을 보고 송 감독은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하준이 그림을 완성해감에 따라 송 감독은 만족스러움을 넘어 경악하는 수준에까지 다다랐다.

그림을 처음 그리는 순간부터 완성되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높아지는 하준의 설렘 수치가 표정에 점진적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런 세밀한 표정 변화는 대배우들도 하기 힘든 건데! 와······!’

스태프들도 이제야 송 감독이 왜 하준을 연기 천재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하준의 천재적인 연기 실력을 본 스태프들은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나오려고 했는데, 촬영 중이라 꾹꾹 참으며 입만 떡 벌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림도 정말 아까 그려둔 그림과 어쩜 그렇게 똑같이 그리는지, 깜짝 놀랄 지경이었다.

놀라움의 연속 속에서 드디어 설렘 촬영이 끝났다.

“컷! 너무 너무 잘했어!!”

송 감독은 컷과 동시에 박수를 마구 치며 하준을 칭찬했다.

다른 스태프들 역시 이 어린 연기 천재에게 박수갈채를 보냈고, 연기에 대해 잘 모른다는 한범우까지도 기가 막히다면서 극찬했다.

“아니, 근데 하준아, 너 손이 복사기야? 그림도 어쩜 이렇게 똑같이 그렸어?”

송 감독이 원래 그려놓았던 그림과 하준이 방금 촬영하면서 그린 그림을 동시에 들어 올리며 감탄했다.

“와, 하준이는 잘하는 것도 많네.”

“그림도 잘 그려, 연기도 잘해······.”

“게다가 잘생겼어.”

겨우 첫 번째 감정 촬영이 끝났는데도 스태프들은 하준의 연기력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물론, 이어진 슬픔, 분노, 행복 감정 촬영에서도 하준은 계속해서 칭찬과 감탄을 받았고, 하준을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촬영이 끝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온 최선희는 남편 윤기철을 보자마자 흥분해서 외쳤다.

“여보! 우리 하준이, 피카소야, 피카소!”

“피카소? 천재 화가 말하는 거야?”

“응! 우리 아들이 그림을 얼마나 잘 그리는지 몰라. 당신이 직접 봤어야 하는 건데! 진짜 천재 화가 뺨친다니까! 화가를 시켜야 하나?”

하준은 솔직히 오늘 그림을 똑같이 그리기는 했지만, 자기가 천재 화가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선희는 아들의 재능을 맘껏 펼치게 해줘야 한다며 다음 날 즉시 하준에게 미술 재료를 한가득 선물해 주었다.

***

며칠 후 늦은 밤.

“으아앙. 엄마아······.”

갑자기 자고 있던 하준이 울면서 방을 나왔다.

하준의 울음소리에 안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던 윤기철과 최선희가 후다닥 뛰쳐나왔다.

“하준아, 왜, 왜 그래?”

“우리 아들 왜 울어? 응?”

눈물을 펑펑 쏟고 있던 하준을 본 윤기철과 최선희가 놀라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었다.

“으아앙, 엄마, 가지 말아요!”

하준이 최선희에게 와락 안기며 오열했다. 최선희는 하준이 악몽을 꾸었나보다고 직감했다.

“엄마 여기 있잖아. 엄마 아무 데도 안 가. 우리 이쁜 하준이를 두고 어딜 가. 그러니까 뚝 하자, 뚝.”

최선희는 서럽게 우는 하준을 꼬옥 안아주며 등을 토닥였다.

윤기철도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

“그래, 우린 하준이와 평생 함께할 거야. 걱정하지 마.”

“으흐흑.”

하준은 손까지 벌벌 떨 정도로 심하게 울다가 최선희가 한참 동안 안아서 달래주자 겨우 울음을 그쳤다.

“하준아, 좀 진정이 됐어? 여보, 미지근한 물 좀 갖다 줘.”

“어어. 알았어.”

윤기철은 얼른 달려가서 하준이 전용 물컵에 물을 따라왔다.

최선희는 하준이에게 물을 마시게 하고 부드럽게 배를 쓸어주었다.

물을 마시고 안정이 된 하준은 드디어 자신이 왜 울었는지 말해주었는데, 역시 최선희의 추측이 맞았다.

“꿈을 꿨어요······ 엄마랑 아빠가 저 버리고 가는 꿈을요. 그때랑 똑같았어요. 그전 양부모님 때랑······.”

하준은 꿈 이야기를 하면서 다시 그 장면이 떠오르는지 눈물이 차올랐다.

그 모습을 본 최선희는 얼른 하준의 말을 잘랐다.

“하준아, 꿈은 반대래. 그러니까,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알겠지?”

“네······.”

하준은 일단 대답은 했지만, 최선희의 말을 100%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윤기철이 갑자기 외쳤다.

“어? 하준아, 눈 온다, 눈! 창밖에 봐봐!”

윤기철의 말에 하준의 고개가 창 쪽으로 홱 돌아갔다.

정말 창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우와······!”

눈을 본 하준은 순식간에 최선희의 품에서 빠져나와 홀린 듯이 거실 창가로 다가갔다.

새하얀 눈송이가 하준이의 악몽을 하얗게 지워버린 듯, 하준은 정신없이 창밖의 눈을 구경했다.

최선희는 윤기철에게 잘했다고 윙크를 보냈다.

아이들은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리면 금방 그전 일은 잊어버린다. 하준이는 꽤 의젓하지만, 아직 아이였기에 이 방법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눈 진짜 많아 온다! 엄마, 벌써 많이 쌓였어요! 우와, 온 세상이 다 하얘요!”

“그렇네. 너무 예쁘네. 저기 봐, 차 위에도 눈이 엄청 쌓였어.”

최선희가 하준의 옆으로 다가가 함께 눈을 구경했다.

“우리, 눈사람 만들러 갈까?”

윤기철이 불쑥 제안했다.

“응? 이 밤에?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최선희는 혹시라도 하준에게 위험할까 봐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하준은 펄쩍펄쩍 뛰며 찬성했다.

“네네! 좋아요. 저 눈사람 만들래요! 아빠, 엄마랑 같이 눈사람 만드는 거, 그거 제 소원이었어요. 전 한 번도 못 해 봤거든요······.”

최선희는 하준의 소원이었다는 말에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오케이를 해버렸다.

“소원? 그래, 내가 우리 아들 소원 하나 못 들어 주겠어? 가자, 눈사람 만들러! 대신 완전 무장하고 가야 돼. 모자도 쓰고, 귀마개도 하고, 장갑도 다 끼고 가는 거다?”

“네에! 우와, 신난다!”

윤기철은 최선희보다 먼저 순식간에 나갈 채비를 마친 후, 하준이 입고 나갈 두툼한 패딩 점퍼와 장갑, 털모자, 귀마개까지 다 가져와서 하준에게 입히고 씌웠다.

“준비 됐나?”

“준비 됐어요!”

“그럼, 가자아! 레츠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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