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16화
하준은 가운데에서 양쪽에 최선희와 윤기철의 손을 하나씩 잡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파트 단지에는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부신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와, 아름다워요······!”
하준이 반짝이는 눈밭을 보자마자 후다닥 달려나갔다.
“하준아, 우산 써야지. 눈 맞으면 감기 걸려!”
최선희는 얼른 커다란 우산을 펼치고 하준의 뒤를 따랐다.
하준은 최선희의 부름에 발걸음을 늦추고 천천히 눈밭에 작은 발자국을 찍어나갔다.
뽀드득, 뽀드득.
최선희는 하준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그 옆을 나란히 걸었다.
그 사이 윤기철은 하준을 위해 눈을 뭉쳐 굴려왔다.
“하준아, 이걸로 눈사람 만들자.”
“좋아요!”
하준은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휴, 여보, 눈 다 맞았잖아. 그러다 당신이 먼저 눈사람 돼. 여기 우산 안으로 들어와.”
최선희가 윤기철의 어깨와 모자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주며 말했다.
“내가 눈사람 되면 좋지. 우리 하준이가 좋아할 테니까. 하하!”
"당신도 참."
윤기철이 아들 바보 같이 농담을 하자, 최선희는 피식 웃어버렸다.
“자자, 하준아, 하준이는 그걸로 머리 만들어. 아빠가 몸통 만들게. 알겠지?”
“네에!”
윤기철과 하준은 각자의 눈을 열심히 굴리고 다녔다.
최선희는 두 사람이 눈을 많이 맞을까 봐 우산을 받쳐주느라 이쪽저쪽으로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아빠, 이만하면 돼요?”
하준의 눈덩이는 하준이 양팔을 벌려 안을 수 없을 정도로 제법 커져 있었다.
“와, 우리 하준이가 아빠보다 먼저 크게 만들었구나! 잠깐만 기다려봐. 아빠가 얼른 몸통 완성해 올게.”
윤기철은 하준이 기다리니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헉헉대며 아까보다 더 빨리 몸통을 굴려댔다.
“헉헉. 자, 몸통 대령이요.”
“감사합니다, 아빠. 이제 머리 여기다 같이 올려요.”
“그래. 하나, 둘, 셋! 으쌰!”
하준과 윤기철은 합심해서 눈사람 머리를 몸통 위에 올려놓았다.
다음으로는 눈사람의 팔과 눈코입을 만들 나뭇가지들을 모았다.
다행히 나뭇가지들을 모으러 다닐 즈음에는 눈이 그쳐서 훨씬 수월하게 나뭇가지를 모을 수 있었다.
“하준아, 여기 나뭇가지로 눈사람 얼굴 만들자. 하준이가 해봐.”
최선희의 말에 하준은 신중하게 나뭇가지를 고르기 시작했고, 그 사이 윤기철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자리를 떴다.
잠시 후, 하준은 마음에 드는 나뭇가지들을 다 골랐는지 눈사람에게 표정을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최선희는 하준이 과연 어떤 표정의 눈사람을 만들지 궁금해서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마침내 하준의 첫 눈사람이 완성되었다.
눈사람은 하준과 최선희를 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때요, 엄마?”
“너무 좋구나. 눈사람이 무척 행복해 보여.”
“그쵸? 눈사람은 지금 엄청 행복해요. 저처럼요.”
“우리 하준이, 행복하니?”
“네, 너무 너무요!”
하준이 팔을 넓게 펼치며 행복을 표현했다.
최선희는 그런 하준이 귀여워서 와락 안아주었다.
“우리 가족은 이렇게 매일 행복할 거야. 항상 오늘처럼.”
“네, 감사합니다, 엄마. 아! 그런데요······.”
하준이 갑자기 무엇이 생각난 듯 최선희의 품에서 떨어졌다.
“응, 왜?”
“우리는 가족이라 안 외로운데, 얘는 혼자라서 어쩌죠?”
하준이 눈사람을 가리키며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 생각을 못 했네! 그럼 눈사람을 더 만들어줘야 하나?”
최선희와 하준이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윤기철이 불쑥 나타나 두 사람의 눈앞에 양손을 내밀었다.
그 양손 위에는 눈으로 만든 오리가 한 마리씩 올려져 있었다.
“오리 친구들을 만들어주는 건 어때?”
“와! 진짜 귀엽다! 아빠, 이 오리 어떻게 만든 거예요?”
하준이 행여 찌그러질까 눈오리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물었다.
“짜잔! 요걸로 만들었지.”
윤기철이 눈오리를 만들 수 있는 집게를 보여주었다.
윤기철은 화장실에 가려고 집에 올라갔다가 문득 창고 어딘가에 눈오리를 만드는 집게가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창고를 뒤져 가져온 것이었다.
“우와, 이거 어떻게 하면 오리 만들 수 있어요?”
하준은 너무 신기해하며 윤기철에게 눈오리를 빨리 만들어보라고 재촉했다.
윤기철은 집게로 눈을 집는 시범을 보였고, 집게를 열자 그 안에는 귀여운 눈오리가 탄생해 있었다.
“대박! 저도 해볼래요.”
“그래, 자. 하준이가 눈오리 많이 만들어서 눈사람 안 외롭게 해줘.”
“네, 좋아요!”
“아참, 그거 자동차 위에다 하면 안 돼. 자동차가 집게에 긁힐 수 있거든.”
“네!”
주의사항을 숙지한 하준은 윤기철에게서 눈오리 집게를 받아들고 신나게 눈들을 집어 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그렇게 하준은 눈사람의 친구로 삼을 눈오리를 백여 마리나 만들어 눈사람의 주변에 가득히 놓아주었다.
“이제 절대 안 외로울 거예요.”
“그래, 하준이 덕분에 눈사람은 안 외롭겠네. 잘했어, 하준아.”
최선희가 하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하자, 하준이 배시시 웃었다.
하준의 볼은 추위 때문에 빨개져 있었는데, 그래서 더 귀여웠다.
“우구, 귀여워라. 근데 하준아, 이제 들어가자. 너무 오래 밖에 있어서 감기 걸릴까 걱정돼.”
“네, 이제 들어가요.”
최선희와 윤기철은 처음 밖에 나올 때처럼 양쪽에서 하준의 손을 잡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윤기철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하준에게 물었다.
“하준아, 배 안 고프니?”
“좀 고파요.”
“그치? 아빠도. 우리 라면 먹을까?”
“좋아요, 라면 먹을래요!”
하준의 대답에 윤기철이 슬쩍 최선희의 눈치를 보았다.
최선희는 원래 몸에 해롭다면서 하준에게 라면은 거의 먹이지 않았다.
하지만 최선희는 오늘은 특별히 허락했다.
“그래, 오늘은 밖에서 추웠고, 힘도 들었을 테니까 라면 허락할게. 뜨끈한 국물 먹어야 몸이 좀 풀리지.”
“좋았어!”
윤기철은 하준과 기쁨의 하이파이브를 나눴고, 뜨끈한 라면으로 몸을 녹인 다음 천천히 잠자리에 들었다.
다시 잠이 든 하준은 이번에는 악몽이 아니라 엄마, 아빠와 즐겁게 눈사람을 만드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
***
‘스타우드에서 하준이를 탐내고 있단 말이지?’
월드 엔터테인먼트의 최원상 대표는 스타우드 엔터에서 하준이에게 접촉했다는 소문을 듣고 고민하고 있었다.
‘솔직히 스타우드가 우리보다 하준이를 더 잘 키워줄 수도 있을 텐데······.’
스타우드 엔터는 자신의 월드 엔터테인먼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 회사였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스타우드가 하준에게 더 해줄 게 많았다.
그래서 최 대표는 하준을 월드 엔터테인먼트에 붙들고 있는 게 자신의 욕심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맨 처음에 하준의 연기를 보고 하준을 키워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는 하준에게 대형 기획사의 컨택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니 하준이나 월드 엔터테인먼트나 서로 윈윈하자는 느낌으로 계약을 했다.
그런데 벌써 이렇게 하준의 입지가 커져버렸으니 하준을 더 좋은 곳으로 보내 날개를 달아 주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우리 하준이는 크게 될 아인데······.’
최 대표가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들어오세요.”
최 대표가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대표실 문이 열리자, 하준과 최선희가 밝게 인사하며 들어왔다.
최 대표는 두 사람에게 차를 대접하고 천천히 말을 꺼냈다.
“저, 스타우드에서 영입 제안을 했다면서요?”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괜히 신경 쓰이실까 봐 말씀 안 드렸는데······.”
“여기는 소문이 빠르잖습니까.”
“혹시 그것 때문에 오라고 하신 거예요?”
“꼭 그런 건 아니고요, 겸사겸사······. 아무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준이의 앞날을 위해서 더 좋은 쪽으로 결정을 하시라는 거예요.”
“네?”
“스타우드로 가고 싶으시다면 위약금 없이 계약을 해지시켜 드리겠다는 말씀입니다.”
최 대표의 뜻밖의 말에 최선희가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그때, 하준이 훅 치고 들어왔다.
“왜요? 아저씨는 제가 싫으세요?”
“아니, 절대 아니야. 아저씨는 하준이 엄청 좋아해.”
최 대표가 깜짝 놀라 손을 휘저으며 얼른 답했다.
“근데 왜 저 보내려고 하세요?”
“아니, 스타우드가 워낙 큰 회사니까, 하준이가 더 잘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아저씨가 더 잘 되게 해주시면 되잖아요. 전 대표 아저씨를 믿어요.”
하준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내뱉은 말에 최 대표의 고민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그래, 우린 할 수 있어. 하준이가 이렇게 믿고 있는데!’
최 대표는 마음을 바꿨다.
스타우드 엔터가 하준에게 서포트 해줄 수 있는 것보다 더, 우리 월드 엔터에서 최선을 다해 하준을 서포트 해주리라 다짐했다.
“그래, 알았다. 방금 아저씨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주렴. 작가님도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최 대표는 하준과 최선희에게 차례로 말했다. 그리고 솔직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저 사실 하준이 놓치고 싶지 않은데, 겁이 나서 그런 겁니다. 혹시나 우리 회사가 하준이를 많이 못 밀어줄까 봐서요. 하지만, 하준이가 이렇게 절 믿어주니 자신감이 생기네요.”
“다행이에요. 하준이가 최 대표님을 무척 따라요. 좋은 분이라고요.”
“하하, 쑥스럽네요. 자! 그럼 스타우드 얘기는 치워버리고, 우리 얘기 하겠습니다.”
최 대표는 벌떡 일어나더니 자기 책상에서 프린트된 종이 몇 장을 들고 와 하준과 최선희 앞에 내밀었다.
“이번 달에 드라마 아역 오디션이 2건 있습니다. 하나는 현대극이고 다른 하나는 사극이에요. 둘 다 1화나 2화 정도 출연하는 건데요, 주인공의 아역을 뽑는 오디션입니다. 한번 훑어보세요.”
하준과 최선희는 최 대표가 준 프린트를 통해 세부적인 사항을 읽어보았다.
최선희는 내용을 모두 훑어본 다음, 최 대표에게 의견을 물었다.
“음, 대표님이 보시기에 하준이한테 둘 중 어떤 게 더 나을까요?”
“사실 둘 다 욕심나긴 하는데, 두 작품 촬영 시기가 비슷해서 둘 다 하는 건 불가능해요. 그래서 저라면 사극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 하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근데요, 저 사극 연기는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잘 할 수 있을까요?”
사극은 말투도 좀 다르고 목소리 톤 자체가 현대극과는 달랐다. 그러니 하준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물론 연습은 조금 해야겠지만, 하준이는 잘할 수 있을 거야. 우리 연기 선생님이 사극 연기 지도해주실 거니까.”
“아하, 다행이네요! 그럼 저 사극 오디션 봐요?”
“그게 나을 것 같아. 아저씨 생각에는 사극이 네가 조금 어려울 수 있어도 만약 잘 해내면 첫 드라마 출연으로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 같거든. 게다가 이 사극 주인공이 서재혁이잖아.”
“서재혁 형이 인기 많으니까요?”
“뭐, 서재혁이 톱스타인 것도 이유긴 하지만, 솔직히 네가 서재혁이랑 닮았잖아.”
“제가요?”
하준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물었다.
최선희는 정말 그런가 하면서 하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곧 박수를 짝 치며 외쳤다.
“어머, 그렇네! 우리 하준이 서재혁이랑 느낌 비슷해!”
“그쵸! 아역은 닮은 것도 굉장히 플러스 요소거든요. 옛날에 어떤 사극에서 아역들은 쌍꺼풀이 하나도 없는데. 어른 역들은 죄다 아주 굵은 쌍꺼풀이 있어서 단체로 쌍수했냐고 좀 황당해했던 적도 있었죠.”
“아, 그거 저도 봤어요. 아역과 성인은 닮은 느낌 있는 게 확실히 몰입도 잘 되고 좋긴 하더라고요.”
“게다가 첫 드라마 출연에 사극 연기도 잘하고, 서재혁 아역으로도 찰떡이고 그러면 대중에게 얼굴 알리기에 너무 좋은 기회예요.”
최선희는 최 대표의 의견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하준에게 의견을 물었다.
“하준아, 사극 연기 할 수 있겠니? 세자 역할이라 더 어려울 것 같긴 한데······.”
“네, 어차피 나중에는 이런저런 다양한 연기에 도전해 봐야 할 테니까, 빨리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떨어져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저, 사극 오디션 볼래요.”
“그래, 오디션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니, 너무 부담은 갖지 말고. 알겠지?”
“네!”
이렇게 하여, 하준은 일주일 뒤 사극 오디션을 보기로 결정했고, 일주일 간 <죽지 않는 백화점> 촬영이 없을 때는 무조건 사무실로 찾아와 연기 지도를 받았다.
일주일은 순식간에 지나, 드디어 오디션 당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