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14화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조용히 해주세요. 레디······ 액션!”
조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하준은 차에서 내리며 대사를 시작했다.
“아빠도 와야 되는데. 엄마는 내 마음에 드는 거 못 사게 하잖아.”
“그야, 엄마가 보기에 더 좋은 게 있으니까 그렇지.”
“치이, 내가 쓸 건데 내가 더 보기 좋아야 하잖아. 아빠는 무조건 내가 사달라는 거 사주는데.”
“그래, 그래. 오늘은 네가 원하는 거 무조건 사줄게. 됐지? 그러니까 그만 툴툴 대.”
“정말이지? 약속한 거야.”
도진은 툴툴대다가 엄마의 약속에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엄마가 뻗은 손을 기분 좋게 잡고 신나게 흔들며 두 사람은 함께 걸어갔다.
“컷! 오케이. 클로즈업으로 한 번 더 갈게요.”
윤기철 감독이 만족스럽게 컷을 외쳤다.
동시에 아까 하준의 연기에 관심을 보였던 백화점의 직원들이 감탄하며 다시 수군거렸다.
“오, 연기 잘하는데? 엄청 자연스러워.”
“맞아. 발음도 또박또박 잘하고. 나중에 서재혁 아역 해도 잘 어울리겠어!”
어떤 여직원은 벌써 이모 팬의 마음으로 하준이 잘 자라길 기원하기도 했다.
“잘생겼는데, 아까 툴툴댈 때 표정은 또 너무 귀엽더라. 역변 안 하고 저대로 잘 자라면 좋겠어.”
“저대로 잘 자라면 진짜 대박이겠다!”
스타우드 엔터테인먼트의 캐스팅 팀장 임효연 또한 속으로 무척 놀라고 있었다.
‘민혁이가 밀릴 만하네······. 쟨 뭐 저렇게 연기가 자연스럽지?’
스타우드 엔터 소속의 아역 배우인 이민혁은 하준에게 밀려 ‘안도진’ 역할을 따내지 못했다.
이민혁은 스타우드의 아역 배우 중에서도 연기력으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말이다.
도대체 이민혁을 밀어내고 역할을 따낸 하준이라는 애는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지, 임 팀장은 매우 궁금했다.
그런데 하준의 연기를 본 임 팀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바로 옆에 있던 뮤직비디오 감독 송무흥이 임 팀장에게 속닥였다.
“괜찮죠?”
“아, 네.”
임 팀장이 짧게 답했다.
사실 임 팀장은 송 감독을 따라 이곳에 온 것이었다.
스타우드 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발라드 가수 한범우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송 감독에게 맡겼는데, 컨셉 상 아역 배우가 필요했고, 마침 송 감독이 하준의 마스크가 마음에 든다며 연기력을 확인해보자고 했다.
그래서, 안 그래도 하준이 궁금했던 임 팀장은 직접 하준을 보기 위해 송 감독과 동행한 것이다.
두 사람은 하준의 연기를 한동안 지켜본 후, 슬그머니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어떠셨어요?”
송 감독이 임 팀장에게 물었다.
“얼굴도 잘생겼고, 연기도 자연스럽고, 성격도 무던한 것 같고, 여러모로 괜찮더군요. 탐날 정도로요.”
임 팀장은 하준이 훌륭한 아역 배우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쵸? 요즘 업계에 서서히 저 아이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더군요. 얼굴도 이미 완성형인데, 연기까지 완성형이라고요. 저도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 오늘 직접 보니 대단하네요. 마스크만 느낌 있고, 연기는 못하면 아주 아까울 뻔했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엄청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럼 이번 한범우 뮤비 주인공은 하준이로 확정인가요?”
“하준 군한테 제안해서 오케이를 받아야 확정이죠. 제발 승낙해야 할 텐데······.”
송 감독은 하준을 반드시 캐스팅하고 싶었다. 그래서 벌써 조바심이 났다.
“아까 현장에 하준 군 어머님도 같이 계시던데 바로 컨택하는 게 좋겠죠?”
“네, 빠를수록 좋죠. 혹시 컨택 전에 다른 스케줄이 많이 잡혀서 못한다고 하면 안 되니까요.”
“그럼 기다렸다가 촬영 철수할 때 공략해보기로 합시다. 후, 벌써 긴장되네요.”
송 감독은 마음에 쏙 드는 아역을 만났다는 것이 벌써 설렜다.
그는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하준을 주인공으로 한 뮤직비디오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대충만 그려봐도 화면이 무척 아름답게 나올 것이다.
송 감독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편, 그 사이 임 팀장은 잠깐 따로 나와 스타우드 엔터테인먼트의 남 대표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대표님, 그 하준이라는 아이 말입니다, 실제로 보니 연기도 잘하고, 목소리도 또랑또랑하고, 얼굴도 사진보다 더 잘생겼어요. 아역 말고도 조금만 더 크면 아이돌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임 팀장이 그렇게 말하면 진짜 그런 건데······. 어떻게, 영입은 안 되겠나?
임 팀장은 원석을 찾아내기로 유명했다. 이번에 스타우드에서 데뷔한 남자 아이돌 그룹도 멤버 전원이 임 팀장의 작품이었는데,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그녀는 20대 배우들도 발굴해 스타우드는 임 팀장 덕분에 다수의 톱스타를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니 남 대표는 임 팀장에 대해 무한 신뢰하고 있었다.
“월드 엔터 소속이긴 한데, 제가 무리를 해서라도 데려올까요?”
-앞날이 창창하다, 이거지?
“분명 크게 될 아이예요.”
임 팀장의 확신에 찬 대답에 남 대표는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 그럼 무리를 해서라도 어디 한번 영입해 봐.
“네!”
잠시 후, 드디어 촬영이 마무리되었고, 송 감독과 임 팀장은 차에 타려는 최선희와 하준을 붙잡았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하준 군. 저는 뮤직비디오 감독 송무흥이라고 합니다.”
송 감독은 최선희에게 자신의 명함을 내밀며 인사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최선희와 하준은 뮤직비디오 감독이라는 말에 조금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혹시 뒤에 스케줄 없으시면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이번에 찍는 뮤직비디오에 하준 군을 캐스팅하고 싶어서 그러거든요.”
송 감독의 말에 최선희와 하준은 새로운 기회이니 일단은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송 감독과 임 팀장, 최선희와 하준은 함께 근처 카페에 들어가 대화를 시작했다.
“이쪽은 스타우드 엔터의 임효연 캐스팅 팀장님이신데요, 제가 이번에 찍을 뮤직비디오가 한범우 씨 노래인데, 한범우 씨가 스타우드 소속이라서 함께 왔습니다.”
송 감독의 소개에 임 팀장은 자신의 명함을 주며 간단히 인사를 했고, 송 감독은 뮤직비디오 이야기에 앞서 하준에게 폭풍 칭찬을 건넸다.
“아까 촬영하는 거 살짝 봤는데, 하준 군이 연기를 정말 잘하더라고요. 특히 표정 연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뮤직비디오는 대사가 있는 게 아니라서 표정 연기가 무척 중요하거든요. 사실 대사보다 표정 연기가 훨씬 어려워서 이 정도로 표정 연기를 잘하는 아역 배우는 매우 드물어요. 아드님이 정말 희귀한 겁니다.”
“호호, 감사합니다.”
자기 자식이 칭찬받는데 기쁘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으랴.
최선희는 송 감독과 대화하며 연신 함박웃음을 지었다.
폭풍 칭찬으로 분위기를 말랑하게 만든 송 감독은 뮤직비디오 설명으로 넘어갔다.
“한범우 씨의 이번 노래가 ‘단 하루만’이란 노래인데, 어릴 적 솔직한 모습으로 단 하루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거든요. 그래서 다양한 연기를 잘할 수 있는 아역 배우가 필요했는데, 그게 딱 하준 군이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캐스팅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일단 저희 아이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은 뭐라 확답을 드릴 수가 없네요. 하준이와도 의논하고, 소속사와도 상의를 해봐야 해서요. ”
최선희의 말에 송 감독은 이해한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저희도 당연히 소속사로도 연락을 취할 예정인데, 먼저 당사자인 하준 군과 어머님께 직접 말씀을 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아 이렇게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 네. 배려 감사드립니다.”
그때, 하준이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질문이 있음을 알렸다.
“하준 군, 뭐 궁금한 거 있어요?”
“네, 그럼 오디션은 안 보고 그냥 바로 뮤직비디오를 찍는 건가요?”
“맞아요. 우리 뮤직비디오에 주연이 하준 군으로 확정이 난 거죠.”
“와······. 감사합니다.”
하준은 오디션도 안 보고 자신을 뽑겠다는 건 자기 연기력을 그만큼 믿는다는 뜻이었으니 무척 뿌듯했다.
게다가 같은 연기지만, 영화가 아니라 뮤직비디오라는 새로운 분야를 접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
“하준 군은 우리 뮤직비디오 하고 싶어요?”
송 감독이 은근슬쩍 하준을 떠봤다.
하지만 하준은 최선희, 최 대표와 상의를 한 후에 답을 주어야 하기에, 조심스러운 화법을 구사했다.
“음, 제가 뮤직비디오는 한 번도 안 해봐서 궁금하기도 하고, 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네요. 아직은 확실히 답을 못 드리지만, 제안은 정말 감사합니다.”
송 감독은 하준이 연기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구사력이 어른 같고, 똑똑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와, 하준 군, 말도 참 잘하네요. 아무튼, 꼭 좋은 답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님, 하준 군.”
뮤직비디오 이야기가 마무리된 듯하자, 이번에는 임 팀장이 말을 꺼냈다.
“저, 하준이 어머님, 혹시 저희 스타우드 엔터테인먼트가 대형 기획사인 거 아시나요?”
“네, 압니다. 유명한 분들 많으시잖아요.”
“알고 계셨군요. 음, 저희가 대형 기획사다 보니까 어느 정도 파워도 있고, 또 투자도 많이 해서 소속 연예인들에게 노래, 춤, 연기, 외국어 등 다양한 걸 가르칩니다. 우리 스타우드에 오면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가 될 수 있죠. 그리고 끼가 있는 아이들은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준답니다. 그래서 말씀인데요, 혹시 하준 군 소속사를 저희 쪽으로 옮기는 건 어떠신가요?”
임 팀장이 스타우드의 장점을 어필하며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건······ 곤란할 것 같습니다. 저희가 월드 엔터와 계약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파기하기는 좀 그렇죠. 죄송합니다.”
“저희 측에서 위약금을 모두 물어드린다면 어떠실까요? 하준 군은 크게 될 아이라서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전폭적인 지원으로 반드시 톱스타로, 아니 월드 스타로 만들어 놓겠습니다, 어머님!”
임 팀장의 강력한 의지에 최선희는 곤란한 듯 하준을 쳐다보며 눈빛으로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하준이 대신 단호하게 답했다.
“그건 배신이잖아요. 전 월드 엔터가 마음에 들어요. 우리 아빠가 추천해준 곳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지금은 월드 엔터가 작지만, 나중에는 얼마나 커질지 아무도 모르거든요.”
똑 부러지는 하준의 대답에 임 팀장은 더이상 설득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월드 엔터가 나중에는 얼마나 커질지 모른다는 말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하준이라는 이 아이가 왠지 그렇게 만들 것만 같아서.
임 팀장은 아쉬움을 삼키고, 남은 기회라도 예약해 두기로 했다.
“그럼 이번에 맺은 월드 엔터와의 계약이 끝날 때, 꼭 저희 스타우드를 기억해 주세요. 그때 다시 제안 드릴 테니, 그때는 꼭 긍정적인 대답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때는 심사숙고해 보겠습니다. 아무튼 우리 하준이를 그만큼 좋게 보셨다는 것이니 제안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만간 소속사로 뮤직비디오 출연 제안이 갈 테니, 꼭 긍정적인 답변 부탁드립니다.”
송 감독은 마지막까지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고, 송 감독과 임 팀장은 떠나는 하준과 최선희에게 깍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이 떠난 후, 송 감독이 인간적으로도 하준이 마음에 든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지었다.
‘애가 아주 똑똑하네. 의리도 있고. 나중에 크게 되겠어.’
***
월드 엔터테인먼트의 최 대표는 하준의 뮤직비디오 출연에 적극 찬성했다.
그 이유는 먼저, 한범우는 13년 차 최정상급 발라드 가수로,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었고, 감미로운 목소리 덕분에 팬이 아닌 일반인들도 그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게다가 요즘은 가수들의 뮤직비디오가 너튜브에 다 공개되기 때문에 뮤비 출연은 국내외에 얼굴을 모두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하, 우리 하준이는 내가 뭐 해줄 게 없네. 일이 알아서 들어오니 말이야.”
최 대표는 신이 나서 뮤직비디오 계약 체결과 스케줄 조율을 일사천리로 마쳤다.
그리고 얼마 후, 하준은 생애 첫 뮤직비디오 촬영을 진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