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13화
하준의 대답에 최선희는 속으로 실력이랄 게 있긴 할까 의아했지만, 일단 하준이 오케이 했으니 실력테스트를 받아보기로 했다.
하준은 테스트를 위해 금발의 외국인 선생님이 있는 교실로 들어갔다.
상담실장과 최선희는 멀찌감치 뒤쪽에 앉아 원어민 교사와 하준의 테스트를 지켜보기로 했다.
“Hi!(안녕!)”
“Hi!(안녕하세요!)”
먼저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인사를 주고받았다.
다음으로 원어민 선생님은 간단한 질문을 시작했다.
“Do you speak English?(너 영어 할 줄 아니?)”
“Yes, a little bit.(네, 조금 해요.)”
“Wow, your English is good!(와, 너 영어 잘하는구나.)”
“Thank you, ma’am.(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정도 대화에도 이미 최선희는 입이 쩍 벌어졌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알파벳도 모르던 아이였다. 근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외국인과 대화를 할 수 있다니, 너무 놀라웠다.
엄마들도 아이들의 실력을 정확히 모를 수 있다던 상담실장의 말이 진짜였던 것이다.
‘어머, 우리 하준이 정말 천재인가?’
대본도 잘 외우고, ‘영화의 이해’ 같이 어려운 책들도 읽어내는 하준이었지만, 배운 적도 없는 영어를 이렇게 잘할 줄은 정말 몰랐다.
최선희가 이렇게 경악을 금치 못하는 와중에도 원어민 선생님은 하준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이어갔다.
“What’s your name?(네 이름은 뭐니?)”
“My name is 하준 강.(제 이름은 강하준이에요.)”
“How old are you?(몇 살이니?)”
“I’m eight years old.(8살이에요.)”
“Who is she?(저 여자분은 누구시니?)”
“She’s my mom.(그녀는 우리 엄마예요.)”
하준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게다가 발음도 좋았다.
상담실장님은 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테스트 평가란에 무언가를 계속 적고 있었다.
원어민 선생님은 하준에게 영어를 잘한다며 ‘Wow!’, ‘great!’ 등의 감탄과 칭찬을 계속했다.
그러고는 대화는 어느 정도 됐다 싶었는지,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다음은 그림을 보고 영어 단어를 말하는 테스트였다.
“apple, telephone, leopard······.”
하준은 그림을 보면서 하나씩 단어를 말해나갔다.
하준이 꽤 어려운 단어까지도 알고 있자, 원어민 선생님은 정말 8살이 맞냐며 또 한 번 감탄했다.
테스트를 모두 마친 뒤, 상담실장은 최선희에게 결과지를 내밀었다.
“어머님, 하준이가 영어를 굉장히 잘하네요. 바로 A반으로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이에요.”
“정말요? 와······.”
최선희는 하준이 놀랍고 기특해서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매번 자신을 감동시키고 행복한 놀람을 주는 하준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럼 반은 A반으로 배정할게요. 이제 여기 등록 카드 작성 해주세요.”
“아, 네.”
최선희는 상담실장에게서 학원 등록 카드와 펜을 받았다.
그런데 성명란에 하준의 이름을 쓰려던 그녀가 갑자기 멈칫했다.
잠시 그 자세 그대로 멈춰있던 최선희는 곧 펜을 내려놓았다.
“음, 죄송한데, 며칠 후에 다시 올게요. 등록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아, 네. 그럼 그러세요.”
상담실장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두 사람을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하준은 최선희의 행동이 의아했으나, 순순히 그녀를 따라 영어학원을 나왔다.
“엄마, 등록하기 전에 해결할 일이란 게 뭐예요?”
차에 오른 하준이 최선희에게 물었다.
“아빠랑 엄마랑 상의할 게 좀 있어서. 오늘 아빠 오시면 상의해서 너한테도 알려줄게. 그런데 엄마도 물어볼 게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게 된 거니? 혹시 원래 영어를 할 줄 알았던 거니?”
“그건 아니고요, 엄마가 알파벳 알려주신 다음에 너튜브도 보고, 영어책도 좀 보고 그랬어요. 모르는 단어는 인터넷 사전에서 검색하고요.”
“어머, 세상에······! 하준아, 너 천재니?”
하준이 영어를 잘하게 된 이유를 들은 최선희는 감탄하며 물었다.
“에이, 천재는 아닐 거예요.”
하준은 손사래를 쳤지만, 하준의 목소리에 확신은 없었다. 스스로도 자기가 갑자기 천재가 된 것이 아닌가 약간의 의심이 들고 있긴 했으니까.
“그래, 천재이건 아니건,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아무튼, 우리 하준이 대단하다! 스스로 공부하고 익히는 거, 그거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기특해.”
최선희는 하준이 예뻐서 어쩔 줄 몰랐다.
“아, 근데, 그럼 하준이 학원은 안 다녀도 되겠니?”
“음, 그래도 학원은 다니고 싶어요. 외국인과 직접 대화도 나눠보고 영어 동화책도 읽고 그러면 더 영어를 잘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 그래. 네 말이 맞구나. 그럼 조만간 다시 학원에 등록하러 가자.”
최선희는 하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고, 곧 차를 몰아 집에 돌아왔다.
그날 저녁, 최선희는 윤기철에게 오늘 영어학원에 갔던 일을 신나게 얘기했다.
“우리 하준이가 얼마나 영어를 잘하던지, 다들 입이 떡 벌어졌다니까! 원어민 선생님은 막 엑설런트, 그뤠잇! 계속 이러면서 눈이 이만해져서는······.”
“와, 정말? 근데 당신이 알파벳 가르쳐준 지 얼마 안 됐다며?”
“그러니까 우리 하준이가 천재라는 거야. 글쎄, 혼자 너튜브랑 책보고 공부했대. 너무 기특하지 않아? 호호호.”
최선희는 팔불출처럼 아들 자랑을 신나게 하더니 행복하게 웃었다.
그런 최선희를 본 윤기철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당신, 하준이가 우리 집에 온 후로 웃음이 많아진 것 같아. 나도 너무 좋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네! 맞아, 하준이는 항상 날 행복하게 해. 그냥 보기만 해도 너무 훈훈한데, 하는 행동도 의젓하고, 똑똑하고, 든든해.”
최선희는 입이 마르도록 하준을 칭찬했다.
윤기철은 하준이 복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기철에게는 영화의 부족한 캐스팅을 메워주었고, 최선희에게는 웃음을 가득 채워주었다.
또한 아이가 없던 두 사람에게 좋은 아들이 되어주고 있었다.
“하준이한테 너무 고맙다. 우리의 부족한 부분이 하준이로 인해 가득 채워지는 것 같단 말이야.”
“맞아, 맞아!”
최선희는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부부는 한참을 하준이 칭찬을 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윤기철이 문득 다시 생각이 났는지 영어학원에 대해 물었다.
“참, 그래서 영어를 잘해서 영어학원은 안 다니기로 한 거야?”
“아니, 하준이가 그래도 학원에서 배우는 게 더 빨리 실력도 늘고 실전 경험도 쌓을 수 있다고 다니고 싶대.”
“그래, 그건 하준이 말이 맞지. 그래서, 등록했어?”
“아니, 안 그래도 그 얘기 하려고 말 꺼낸 건데, 하준이 칭찬하느라 말을 못 했네. 거기서 실력 테스트할 때, 원어민 선생님이 이름을 물었거든? 근데 하준이가 ‘하준 강’ 이렇게 대답했거든. 그때 깨달았어. 하준이 성을 빨리 바꿔주는 게 좋겠다고 말이야.”
“아!! 그렇네. 성이 강으로 알려졌다가 다시 윤으로 알려지는 것도 문제지.”
“응, 그래서 그 문제를 당신과 좀 상의하려고.”
최선희와 윤기철은 어떻게 하는 것이 하준에게 더 좋을지 함께 고민했다.
그리고 하준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하준아, 아까 엄마가 등록 카드를 안 쓴 이유는 하준이 성 때문이야. 지금 네 성은 ‘강’이고, 아빠 성은 ‘윤’이잖아?”
“아하. 그럼 저 이제 성이 윤으로 바뀌는 거예요?”
“바꿔도 되고, 안 바꿔도 돼. 근데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아빠 성은 윤이고 아들 성은 강이면 네가 입양자라는 게 자연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거라서······.”
“엄마, 아빠 생각에는 네가 괜한 스트레스를 받느니, 성을 아빠 성으로 바꾸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사실 학교에서도 친구들이 알면 안 좋기도 하고.”
“그럼 바꿀래요. 윤하준이 될래요! 저도 진짜 아빠, 엄마 아들이 되고 싶거든요.”
하준은 전혀 고민 없이 대답했다.
사실 전 양부모는 하준의 성을 양부 성으로 바꾸지 않았다. 하준이 입양자라는 사실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준이 좋아서 먼저 엄마, 아빠라고 불렀으나, 전 양부모는 그다지 하준을 아들처럼 대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하준은 양부모가 진짜 자신의 부모 같지 않고 뭔가 어려웠다.
그 이유가 비록 성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하준의 입장에서는 성도 그 거리감에 조금은 영향을 주었다고 느꼈다.
그러니 하준은 윤하준이 되고 싶었다.
“그래준다니 엄마, 아빠는 너무 고마워.”
윤기철 부부는 고민 없이 단박에 답하는 하준에게 고마워 하준을 꼬옥 안아주었다.
또한 그들을 이렇게 믿고 따르는 하준에게 더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준의 확고한 의견을 들은 윤기철 부부는 이제 다른 문제로 넘어갔다.
“근데 문제가 하나 있는데, 입양이 확정되어야지만 그 후에 성씨 개명을 신청할 수 있어. 근데 그러면 네가 학교를 다니는 중간에 성이 바뀌게 돼. 입양 절차가 오래 걸려서 6개월 이상 걸린다고 하거든.”
“아······. 그럼 어떻게 해요?”
“우리가 생각해봤는데, 법적으로는 그때 바뀌게 되더라도 지금부터 네가 윤하준인 걸로 하자. 영어학원도 윤하준으로 등록하는 거야. 어때?”
“전 좋아요! 아빠, 엄마 말대로 할래요.”
하준은 무조건 오케이였다.
지금까지 함께 지내는 동안 윤기철과 최선희는 뭐든 하준에게 의견을 물었고, 항상 하준을 먼저 생각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준은 믿었다.
윤기철과 최선희는 분명 하준에게 어떻게든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그래, 우리 아들! 하준이는 그냥 앞으로 이름을 강하준이 아니라 윤하준이라고 말하는 연습만 하면 돼. 다른 건 엄마랑 아빠가 알아서 다 해결할 테니까.”
“네, 엄마, 아빠. 감사합니다. 나는 이제 윤하준이다! 윤하준, 윤하준, 윤하준!”
하준은 기분이 좋은지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바뀐 이름을 반복해서 외쳤다.
그런 하준의 모습을 바라보는 윤기철 부부는 행복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해서 살짝 눈물이 고였다.
상의를 마친 윤기철은 월드 엔터테인먼트의 최 대표에게 보도자료에 실린 이름을 성을 빼고 하준으로 바꿔 달라고 연락해 두었다. 방송 활동은 그냥 '하준'으로 해도 되니까.
그리고 학교의 경우, 입학 전에 윤기철 부부가 직접 학교에 찾아가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
“도진아, 안녕!”
<죽지 않는 백화점>에서 안도진의 엄마 역할인 김지숙이 촬영현장에 도착하자마자, 하준을 보고 반가워하며 달려와 손을 잡았다.
“안녕하세요, 엄마.”
하준 역시 익숙하게 김지숙을 엄마라고 부르며 인사했다.
원래 드라마나 영화 촬영 때는 극 중 역할대로 서로 부르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벌써 여러 차례 함께 촬영을 한 배우들은 익숙하게 서로를 극중 배역 이름으로 불렀다.
이 점은 성이 바뀐 하준에게는 훨씬 편한 부분이었다.
“자, 다들 오셨으니 모여 주세요.”
조감독이 배우들을 불러 모아 촬영 동선과 순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촬영은 진짜 백화점의 지하주차장에서 진행됐는데, 도진과 도진 모가 백화점으로 들어가다가 고등학생인 서연주와 우연히 부딪히는 장면을 촬영할 예정이었다.
오늘은 백화점의 휴무일이라 지하주차장에는 스태프들과 배우들, 엑스트라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백화점 인테리어 보수를 위해 온 인부들 몇 명과 휴무일임에도 일이 있어 백화점에 온 몇몇 직원들이 슬쩍 발길을 멈추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김지숙 맞지? 실물이 훨씬 날씬하네. 차우민이랑 같이 찍는다는 그 좀비 영화 찍는 건가 봐.”
“차우민은 안 왔나?”
“그러게, 안 보이네. 근데 저 옆에 있는 애는 아역인가 봐. 처음 보는 앤데 잘생겼다. 그치?”
“응. 얼굴만 보고 뽑았나 봐.”
“잘생긴 게 꼭 서재혁 느낌 비슷하다. 서재혁 아역 해도 되겠어.”
서재혁은 요즘 굉장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잘생기고 연기도 잘하는 톱스타였다.
“근데 연기를 잘해야지. 요즘은 아역도 발연기하면 몰입 깨서 별로야.”
“뭐, 연기도 잘할 수도 있지. 한번 보자.”
사람들은 처음 보는 아역 배우인 하준의 연기력이 어떨지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백화점 관련 직원들 사이에서 더 큰 목적을 가지고 하준의 연기를 기다리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국내 3대 기획사 중 하나인 스타우드 엔터테인먼트 소속 직원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