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3일 요리.
128, 3일 요리.
한 달 후 무림대회가 열린다.
수많은 강호인이 모여 괴겁천마와 사령신을 상대하기 위한 계획을 세울 것이다.
다행히 괴겁천마와 사령신은 중지봉 혈사와 제갈세가의 혈겁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하나 알만한 자들은 직감하고 있을 터였다.
폭풍전야(暴風前夜).
언제 무슨 일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 바로 지금이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남천휘는 전방을 응시한 채 넋나간 사람처럼 읊조렸다.
‘현재 오후 일과 중 여섯 번째인 동문 순시 중입니다. 반 시진 후 일곱 번째 일과로 산서성의 용문방주와 접견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재이는 중지봉의 실책을 만회하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허공에 둥둥 떠서 뭐라고 적혔는지 알 수도 없는 책을 살피며 내뱉는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멍청아,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재이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리며 자취를 감췄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남천휘는 천수련의 물음에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자신의 가슴께 밖에 오지 않는 작은 체구의 여인이 올려다보며 묻는 모습은 귀여울 수밖에 없다. 심지어 천하에 손꼽힐 만큼 아리따움 외모를 지녔다면 더더욱 그러할 터였다.
“저기 봐.”
“오호.”
동문 인근의 저자를 지나는 이들은 하나같이 이쪽을 바라봤다. 하나 그들의 시선은 남천휘의 얼굴이 아니라 가슴께 인근을 스쳐갈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월회는 산동성을 넘어 천하에 명성을 떨친 거대방파가 되었다. 하나 회주인 남천휘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심지어 그런 대단한 사람이 호위도 없이 평범한 무복을 걸친 채 저자를 걸어가고 있을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었으리라.
그렇기에 사람들은 천수련의 외모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런 미인과 함께 걷고 있는 사내를 부러와 하고 있으리라.
남천휘도 사내인 이상 어깨가 으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문제는······.’
때마침 곁을 지나치던 상인이 남천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런 미인을 두 명이나······.”
상인의 곁에 붙어 있던 기녀가 더욱 찰싹 매달리며 아양을 떨었다. 상인은 못이기는 척 그녀의 몸을 감싼 채 걸음을 옮겼다.
그래, 두 명이다.
남천휘는 좌측의 천수련과 우측의 연하연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천하에 손꼽히는 두 여인과 함께 길을 걷고 있음에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
‘세 명입니다!’
남천휘의 눈동자가 슬쩍 위쪽을 향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재이를 보고 있자니 불편함을 넘어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다.
‘이게 다 네 탓이잖아!’
재이는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지었다.
‘주인님과 비슷한 경우를 남위기에 검색했을 때 천백오십이 회가 등록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경우 가장 평화롭고, 효과적인 판단의 결과는······.’
그래, 소혜였지.
남천휘가 생각해도 참으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무당제일검인 청송진인이 선물한 옥정환은 세 여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혜와 심력의 수치를 올려주는 기물인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생김새가 너무 아름다웠다. 굴곡 없이 매끄러운 옥 반지는 일견하기에도 천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기물이었다.
천수련은 노골적으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고, 연하연은 평소와 달리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였다. 반면 소혜는 옥정환(玉靜鐶)과 싸우는 사람처럼 뚫어져라 응시했다.
하나 그래도 소혜였다.
애초에 다른 두 사람은 머리를 쓰는 쪽도 아니거니와 검수가 아니던가.
소혜는 옥정환을 받고, 고개를 꾸벅였을 뿐이다.
남천휘는 소혜를 해결한 대가로 두 여인과 동행할 수 있는 선물이 주어졌다.
‘선물 맞아?’
재이가 두 여인의 미모를 찬양하며 이런 기회는 아무나 얻을 수 없다고 자화자찬을 했다.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오늘 날씨 좋네요.”
천수련은 손을 들어 태양을 가린 채 읊조렸다.
손가락이 부각되어 보이는 건 나만의 착각이겠지.
“그러게요. 그래도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나 봐요. 좀 쌀쌀하네요.”
연하연은 두 손을 내민 채 쥐락펴락 했다.
한쪽은 태양을 정면으로 봐도 거뜬할 만큼 정순한 내력을 지녔고, 다른 한쪽은 한서불침의 경지에 이른 고수가 아닌가.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저들의 목적은 확실했다.
‘해본 적이 있어야지.’
남천휘는 쌀쌀하다는 말을 읊조리며 마냥 걸었다.
이미 저자의 상점을 몇 개나 지나친 후였다.
뭐든 처음이 어렵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도대체 뭐라고 하면서 장신구를 사줘야 하는 건데?’
차라리 ‘재이의 상점’을 소환해서 사주는 편이 서로 깔끔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인상 좋은 중년 여인이 슬쩍 달라붙었다.
“공자, 이렇게 아리따운 소저들과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시나요?”
“아, 뭐, 그냥.”
“포양당은 곡부 인근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물품들만 모아놨답니다. 이대로 계속 가셔도 이런 소저들에게 어울리는 물건을 찾기란 쉽지 않을 거예요.”
“아.”
남천휘는 떠밀리듯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천수련과 연하연도 못이기는 척 뒤를 따랐다.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내가 돈이 없어서 못 사냐?’
이미 곡부남가는 산동성은 물론이고, 하남과 호북 일부에까지 상행을 시작했다. 소혜가 기획하고, 사마의가 만들어낸 ‘무한상사’에 가입한 상단과 표국의 숫자만 해도 일천을 넘길 정도였다. 게다가 남천휘가 제갈세가와 무당파의 일을 해결했기에 새로운 판로까지 열리게 되었다. 그들이 지급하는 수수료와 통행료가 하루에 은자 일만 냥을 넘겼다. 원래 벌어들이는 자금에 수만 냥의 이득이 더해졌으니 곡부남가는 매일 같이 창고를 새로 건립해야 할정도였다.
“천휘, 하고 싶은 거 다 해.”
곡부남가의 가주인 남운군은 장인을 도와 신공부를 재건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기에 가문은 소가주인 남천홍이 가주 대리를 맡아 운영하는 중이다. 그는 곡부남가와 한 몸이나 다름없는 현월회에 무한한 자금을 투입했다.
그러니 남천휘는 포운당의 내실에서 하인들이 가져오는 기물과 패물을 손짓만으로 구경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다음!”
“아니야. 우리 개똥이는 흰 색이 어울려.”
“듣던 것보다 별로인 걸? 제비는 화려한 게 어울려. 검에 매달 수실은 더 없는 건가?”
남천휘의 말이 떨어질 때마다 수십 명의 하인들이 화려한 기물과 패물을 가져왔다. 천수련과 연하연은 때 아닌 호사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휴.”
천수련은 백옥으로 만든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한 숨을 내쉬었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당주!”
중년 여인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공자, 말씀하시지요.”
“우리 개똥이가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는 듯하오?”
“아이고! 최상급이 있기는 한데······.”
남천휘는 눈을 부릅 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게 돈을 논해?
일단 인벤토리를 열었다.
손바닥을 아래로 한 채 전표를 읊조리는 순간 기사가 벌어졌다. 전표가 마치 낙엽처럼 후드득 쏟아지는 것이 아닌가. 중원대전장의 인장이 찍힌 은자 천 냥짜리 전표가 비처럼 쏟아졌다.
“그냥 갈까?”
“아이고! 제가 재신이 강림하신 것도 모르고 추태를 부렸네요.”
중년 여인이 헤죽 웃으며 소매로 전표를 쓸어가려 했다. 한데 소매가 전표에 닿으려는 순간 예기가 번뜩이는 검이 파고들었다.
“잠깐!”
연하연이 무심한 눈빛을 한 채 검을 움직였다.
수십 장의 전표가 남천휘 쪽으로 이동했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일평생 싸움만 하고 살았어도 그렇지. 이런 일로 검을 뽑으면 어쩌자는 거냐?’
그가 사회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제비를 걱정하는 사이 천수련이 연거푸 한 숨을 내쉬었다.
“은공, 천 소저에게 고민이 있는 듯해요.”
“아! 그래?”
“한데 그건 화려한 패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해요.”
남천휘는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호적수 삼아 대치했던 그녀들이 아닌가. 싸우지만 않았을 뿐 내외 했던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세 사람이 함께 나선 외출이 불편했던 것이다.
‘언제 이렇게 친해졌데?’
재이가 전표 위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연 소저가 중지봉 혈사 이후 많이 심란한 듯했어요. 자신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여겼지요. 한때 몰래 떠날 생각까지 했을 정도라니까요. 다행히 천 소저가 그런 연 소저를 다독여 줬어요. 며칠 전에는 둘이 술도 한 잔 하던 걸요.’
그걸 너만 알고 있으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그 날 일은 여자끼리의 비밀이라고 했어요. 저도 명색이 여성의 상태를 띄고 있으니.’
그러더니 검지로 제 입을 막는 것이 아닌가.
‘놀고 있네.’
‘아! 기껏 신뢰를 깨고 할 말이 있었는데······.’
저 녀석에게 감정만 생긴 줄 알았더니 쓸데 없는 것도 많이 생긴 듯했다.
‘업데이트 한 번 할까?’
재이는 꼬았던 다리를 슬쩍 풀더니 무릎을 꿇고 말을 이었다.
‘주인님 욕을 많이 하더라고요. 치사한 놈, 사람 마음도 모르는 놈, 양 다리를 걸치고······.’
그만!
남천휘는 슬쩍 손을 내저어 재이를 치웠다.
그는 슬쩍 개똥이와 제비를 번갈아봤다.
천하에 손꼽힐 만큼 아리따운 여인들이다.
하나 어느 순간부터 친근하게 여겨질 뿐 더 이상 다가설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간혹 소혜처럼 동생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이것 참. 내가 갑자기 고자가 된 것도 아니고.’
◎ 주인님의 연령 대비 성적 활성도는······.
닥쳐.
남천휘는 중년 여인에게 백 냥 짜리 전표를 건넸다.
“당주, 잠시 자리 좀 비켜줘.”
“예, 공자.”
그는 여인과 시비들이 떠난 후 두 여인을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야?”
천수련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좋은 날인데, 좋은 날이다 보니 스승님 생각이 더 나네요.”
남천휘는 탄성을 흘렸다.
“아! 천응검후께서 절강성에 가셨지. 일이 잘 안 되는 거야?”
천수련은 나직이 한 숨을 내뱉었다.
“저도 무심했지요. 생각해보면 달포 전에 온 서찰이 마지막이었어요. 스승님의 무위를 생각하면 별 일이야 없겠지만······.”
남천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맹주와 총군사의 서찰에 의하면 무림맹은 이미 보타암의 부흥을 허가했다. 무림맹의 이름으로 절강 지부에 명령서가 내려갔을 터였다.
제아무리 절강의 터주대감이 천목십이회(天目十二會)라고 해도 맹의 명령을 거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미 가시적인 성과가 났을 때였다.
‘잠깐!’
남천휘는 검지로 이마를 긁기 시작했다.
좋은 수가 생각났을 때의 버릇이다.
‘무림대회가 열리면 주도권을 잡는 쪽의 의지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농후하지. 특히 능력은 없고, 늙기만 한 자들이 고집을 부리면 파행으로 치달을 수도 있어.’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영향력을 넓혀야 했다.
산동성과 호북성은 현월회의 뜻을 따를 터였다.
‘만약 절강의 문제를 해결한다면······.’
이미 천응검후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중이다.
무엇보다 천수련이 있는 이상 천응검후는 현월회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으리라.
천응검후 혼자보다는 천응검후와 절강성인 쪽이 보기 좋았다.
“가자!”
남천휘의 말에 천수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가자고. 절강성에 가자.”
감정 표현에 능숙하지 않은 연하연조차 당황스러움을 금치 못했다.
“은공, 갑자기 절강성에 가자고요?”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바람 쐬러 가는 김에 절강성을 먹고 오자.”
“하지만 절강성에는 천목십이회가 있어요.”
“그들은 폐쇄적인지라 외인을 반기지 않는데요.”
두 여인의 만류에도 달라질 것은 없다.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내 방식대로 하면 괜찮아.”
“하지만 절강성은 하루 이틀에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현월회의 일도 많은데······.”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가는데 하루, 먹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 삼 일이면 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