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아! 이건 아닌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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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휘는 중요 손님을 맞이하며 오전을 보냈다.
사마의에게 남은 빈객을 맡기고, 처소에 돌아오자마자 의자에 몸을 묻었다.
그리고 나직이 읊조렸다.
‘나와.’
재이는 나오지 않았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중지봉의 사건은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당장 따지고, 윽박지르고, 진실을 캐내려 했다. 하나 재이와 척을 질 것이 아니라면 감정적인 대응은 피해야 할 터였다. 그렇기에 최대한 냉정한 상태로 대화를 나누려 했다.
한데 녀석이 나오지 않았다.
남천휘는 조금 더 불쾌함을 담아 읊조렸다.
‘나오라고 했다.’
이번에도 나오지 않았다.
한데 갑작스럽게 옆에서 모기가 왱왱거리는 듯한 한 마디가 들렸다.
‘아까부터 나와 있었는데요.’
남천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재이를 보며 하마터면 경기를 일으킬 뻔했다.
“크흠. 왔으면 말을 했어야지.”
‘주인님을 만족시켜드리지 못한 죄인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천첩을 죽여주소서.’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재이는 VIP5단계를 통해 증강현실로 구현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 후로는 어여쁜 외모와 어울리게 감정 또한 풍부하게 드러났다.
간혹 진짜 사람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한데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성장이 너무 빨랐다.
‘어디서 무슨 연애담이라도 보고 온 건가?’
남천휘는 경극의 대사를 방불케하는 재이의 자아비판에 한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보다 천첩(賤妾)은 부인이 남편에게 자신을 낮춰서 부를 때 쓰는 말이 아니던가. 게다가 재이는 자신이 일명 재이의 상점에서 사준 기포(旗袍)가 아니라 누더기를 걸치고 있었다.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속셈일 터였다.
‘기포를 입고, 무릎을 꿇으면 허벅지까지 다 드러날 텐데······.’
동정심 대신 아쉬움을 불러일으킨 건가?
남천휘는 황급히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재이의 연기에 휘둘리면 제대로 된 것을 묻지도 못한 채 다독이다가 하루가 지나갈 것이다.
“앞으로 와.”
재이는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듯 스르륵 움직이더니 전면으로 자리를 옮겼다. 저거 무릎을 꿇은 척 하지만, 땅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자! 변명해 봐.”
몰랐다고 하겠지.
‘저는 모르는 일이었어요.’
그럴 줄 알았다.
‘이제는 주인님도 아시다시피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는 시스템의 일부 기능을 활용하기 위하여 기획이 됐습니다. 그렇기에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를 벗어난 정보 공개는 저조차 미리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는 건 무극중사가 시스템조차 찾아낼 수 없을 만큼 고수였다는 거야?”
‘그건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주인님께서 부외 존재를 인지하시는 순간 지도에 표시된 것으로 보아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는 명확합니다.’
상념이 길어진다.
제갈세가의 명언 중 과거를 비추어 오늘을 보고, 내일을 기다리는 구절이 있다. 그 말에 재이와의 과거를 비춰보면 믿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무극중사에게 시스템을 벗어날 능력이 있다고 봐야 할 터였다. 또한 그가 사라졌던 광경은 인세의 능력으로 보이지 않았다.
‘사령신조차 그 정도는 아니었어. 그렇다는 건 무극중사, 또는 괴겁천마가 그만한 능력을 지녔다고 봐야겠지.’
아무래도 산혼자와 산신자의 차이가 아닐 듯싶다.
어찌됐든 몸만 남은 사령신보다 영혼만 남았다는 괴겁천마가 더 상대하기 난해할 터였다.
남천휘는 남위기를 검색했다.
남위기는 그야말로 정보의 바다였다.
하나 그 바다를 헤쳐 나가려면 배가 필요했다.
최소한 통나무라도 있어야 그것을 붙잡고 헤쳐 나갈 수 있는 게다. 무극중사와 동황제군이라는 단어는 돛단배가 아닐지언정 뗏목 정도는 될 터였다.
지금껏 남천휘가 알지 못했고,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가 쏟아져 나왔다. VIP 5단계로 인해 고급 보안 인가를 획득한 상태였다.
‘혼백이 하늘과 이어지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야.’
저자의 흔한 설화만 봐도 죽은 이가 천상을 오가는 장면이 없지 않았다.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흐음, 내가 우위에 있다는 거지.’
한 마디로 남천휘는 대문을 향해 들어갔고, 괴겁천마나 무극중사는 개구멍을 통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렇기에 시스템의 맹점을 찌르고 움직일 수도 있었겠지.
‘낙인은?’
남천휘의 물음에 재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칭찬을 바라듯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네! 현재 정상 작동 중입니다.’
한 시름 놨다.
남천휘는 무극중사를 대면했을 때부터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연하연에게 무슨 수를 쓰려 했으나,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아쉬움도 내비치지 않았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다행히 무극중사는 남천휘의 현월강기를 어렵지 않게 막아냈음에도 한 걸음 물러섰다.
남천휘는 그 때 A급 특기 ‘추노’를 발동했다.
신공부주를 해치울 때 얻은 추노는 적이 도주의 의사를 보였을 때 활성화된다. 그리고 추노가 발동하면 부가 기능이 활성화될 터였다.
바로 낙인(烙印)이다.
이십 장 이내에서 낙인을 찍는 것이 가능했고, 낙인이 찍힌 대상은 영역 안에서 자동으로 지도에 표시가 될 터였다. 결국 다시는 무극중사의 등장에 놀랄 필요가 없다. 놈도 이제 다른 하찮은 적과 마찬가지로 지도의 끝에서부터 등장해야 할 것이다.
‘빵이라고 말할 때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
‘그렇습니다. 무극중사의 가슴에 붉은 점이 찍힌 것을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대상자의 감정 변화는 전무했습니다.’
재이는 사면이라도 받으려는 사람처럼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하, 이 녀석을 어째야 좋을까?
‘너, 내가 두고 볼 거야.’
‘헤헤, 그럼 다시 환복해도 될까요?’
환복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어차피 겉으로 보이는 것만 누더기일 뿐 속에는 기포를 입고 있을 터였다.
남천휘가 손을 내젓자, 재이의 몸은 안개를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발끝부터 기포로 뒤바뀌는 야릇한 광경을 선보였다.
한데 흙 묻은 맨발이 애처롭다.
‘좋은 당혜라도 사주기는 개뿔! 애초에 흙을 밟고 다닐 일이 없잖아?’
그래도 기포를 입고 희희낙락하는 재이를 보고 있자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자는 여자로구나.’
그러다 불현 듯 자신도 모르게 재이를 여성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그건 주인님의 내재된 자아가 여성형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데요?’
아! 내 탓이로구나.
남천휘가 버름함에 헛기침을 하는 사이 밖에서 소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오셨어요.”
“오후 일정은 사 군사에게 맡겼는데?”
소혜의 담담한 목소리가 계속됐다.
“공자께서 직접 만나셔야 할 것 같아요.”
남천휘는 손을 내저어 재이를 돌려보낸 후 밖으로 나왔다.
소혜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뭐야? 내외하는 거야? 예전에는 마음대로 드나들었잖아.”
남천휘의 말에 소혜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손님이 있으신 것 같아서요.”
아! 혼잣말이 너무 컸구나.
“아, 그래.”
애써 변명하지 않았다.
차라리 손님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정상적으로 여겨질 터였다.
“누군데 그래?”
남천휘가 화제를 돌리자, 소혜가 뒤따르며 대꾸했다.
“무당에서 손님이 오셨어요.”
다른 곳도 아니고 무당이라면 나가봐야지.
남천휘는 대전에 들어선 후 눈을 휘둥그레 떴다.
“회주, 며칠 사이에 큰일을 치르느라 고초가 심하였겠소.”
무당제일검 청송진인이 먼저 공수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에 대전에 모인 현월회의 수뇌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천휘가 제갈세가의 위난을 해결하는 가운데 무당파와 교분을 맺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한데 무당제일검이 먼저 공수할 정도라면 얼마나 깊은 교분이란 말인가.
특히 사마의는 눈을 빛냈다.
‘이거 무당파와 제대로 된 협약을 맺는다면······.’
현월회의 성세를 호북성은 물론이고, 장강까지 넓히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왜 이러십니까?‘
남천휘는 무당제일검의 손을 맞잡고, 상석으로 안내했다. 청송진인은 많은 사람이 지켜봄에도 불구하고, 방문 목적을 숨기지 않았다.
“서찰을 한 통 가져왔습니다.”
“장문인의 것인가요?”
청송진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광목진인께서 보냈습니다. 본파의 장문인과 맹의 총군사가 어떤 사이인지는 아실 겁니다.”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맹 총군사인 광목진인은 무당장문인인 청적진인의 사형이다. 광목진인은 본래 청우라는 도명을 썼지만, 맹에 투신할 때 도명을 바꿨다. 행여 무당파에 혜택을 줄수도 있다는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함이다. 그렇게 지난 삼십 년 간 무당의 큰 어른이라는 지위를 버리고, 맹을 운영한 사람이 바로 광목진인이다.
한데 그가 삼십 년 간 내외했던 무당 장문인을 통해 서찰을 보낸 것이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겠군요.”
“아마도요.”
남천휘는 서찰을 펼친 후 내용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서찰에는 무림대회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서찰을 확인한 후 사마의에게 건네며 청송진인의 의중을 살폈다.
“괜찮습니다. 회주께 전달하는 것까지 제 역할이었습니다. 서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회주의 몫이지요.”
남천휘는 침음을 내뱉었다.
청송진인은 무당제일검답게 속내를 숨기는 것에 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지를 남기는 대화법을 보면 영락 없는 무당의 제자였다.
“어때?”
사마의는 서찰의 내용을 신중하게 확인했다.
한 달 후 무림대회가 열린다는 내용과 더불어 맹주의 이름으로 초청한다는 초청장이 동봉된 상태였다.
그는 잠시 미간을 좁혔다가 되물었다.
“이거 받은 사람이 몇 명입니까?”
청송진인은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흘렸다.
“그것을 빈도가 어찌 알겠소.”
사마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한 명이겠군요.”
서산노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사, 그게 무슨 말인가? 괴겁천마와 사령신을 상대하기 위하여 무림의 전력을 집결시키기 위함이 무림댕회의 목적일 것이야. 하면 구파오가를 비롯한 명숙들에게 보낸 초청장만 해도 수십 장일 텐데.”
사마의는 고개를 내저었다.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하나 구파오가를 비롯한 강호의 명문거파는 대부분 맹에 소속된 상태입니다. 그러니 맹주의 이름으로 굳이 초청장을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다는 건 이 초청장은 ‘특별히’ 회주에게만 보내진 것이겠지요.”
청송진인은 사마의가 특별히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어색하게 웃었다.
“허허, 맹에서 그만큼 회주를 각별하게 여기는 듯하외다.”
하나 사마의는 냉정했다.
“이거 자칫하면 힘은 힘대로 쓰고, 구파오가의 수족 노릇이나 하다가 버려질 수도 있어요.”
대전에 모인 수뇌부는 표정을 굳혔다.
사마의의 말이 과하기는 하나, 그렇지 않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허허, 사람 일을 어찌 그렇게 단정하시는가.”
“진인, 그만 하시고, 진짜 목적을 말씀하시지요.”
청송진인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품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철패를 하나 꺼내놓았다.
“맹주를 대신하는 명패라네. 회주께서 이걸 지니신다면 맹주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명령할 권한이 생기며, 맹주마저 독단적인 행동이 불가할 것이외다. 자! 이제는 마음에 드시오?‘
사마의는 그제야 헤죽 웃으며 조심스럽게 명패를 챙겼다. 그리고 남천휘에게 건네며 호기롭게 외치기 시작했다.
“주군께서는 강호의 안위를 위하여 저 한 몸 바치실 것이 확실합니다!”
“야! 내 몸을 왜 네가 바쳐?”
“그렇다는 거지요.”
남천휘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청송진인이 잊고 있었다는 듯 소매에서 반지를 꺼냈다.
“아! 지난 번에 가져가신 옥정환과 봉황미잠, 단림패가 있었지요. 한데 창고를 정리하다보니 옥정환이 한 개 더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두 개가 한쌍이더라고요. 늦었지만, 이것도 드리겠습니다.”
남천휘는 옥정환을 챙기려다가 멈칫했다.
왜 물건은 하나인데 꽂혀드는 시선은 세 개란 말이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