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83화 (283/305)

127, 아! 이건 아닌데. (2)

*

잔결대노의 등이 손에 잡힐 듯했다.

‘이 새끼만 잡으면 끝난다!’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날파리 같은 놈!’

광혈오주랍시고 버티는 것이 우습다.

지금의 남천휘라면 광혈오주나 사성신위도 두렵지 않았다. 아홉 명이 모두 덤벼도 시간이 걸릴지언정 마지막에 서 있는 건 자신일 터였다.

하나 강호인에게 광혈오주나 사성신위는 악귀와 다를 것이 없다. 그들 중 한 명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도 한 성이 피로 물들 것이 분명했다.

빠각!

남천휘의 칼끝이 잔결대노의 머리를 스쳤다.

그는 그것만으로도 바위에 얻어맞은 것처럼 튕겨나갔다.

“백 년 넘게 살았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추해?”

촤악!

잔결대노의 목을 잘랐다.

악인이라고 해도 언제나 피는 붉은 법이다.

남천휘는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그 때 잔결대노가 입과 목으로 피를 쏟아내며 저주하듯 외쳤다.

“크흑! 혈인교주 따위를 이겼다고 기고만장해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죽는 놈은 알 수 없으리라.

S급 특기 ‘불굴’이 있는 이상 저주는 귓등으로 흘릴 뿐이다.

그 순간 예기치 못한 불길함이 뇌리를 스쳤다.

‘아까 그 시뻘건 놈은 대장이 아니었던가?’

사고의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졌고, 영역 또한 거미줄처럼 뻗어나갔다.

‘대장이 없어?’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강호인은 둘만 모여도 우열을 정하려는 경향이 짙다. 태생적으로 강자존을 숭상하니 선악을 떠난 자연스러운 반응일 터였다. 그러니 숫자가 늘어날수록 부리는 자와 부림을 당하는 자가 명확하게 구분된다.

곡부남가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위에 남천휘가 있고, 그 아래 사마의가 있으며, 구백 명의 무인들마저 신분의 고하를 나눴다.

이것이 강호 조직의 기본적인 관계였다.

남천휘는 강호에 출도한 이후 수많은 적과 싸워왔다. 그 때마다 수괴가 존재했다. 이름 없는 산의 하찮은 산적들마저 채주가 있을 정도였다.

일원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음모를 주재하고, 혈겁을 치렀을 때 언제든 누군가의 명령으로 움직였다.

백결공과 광혈오주와 같은 수장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남천휘는 중지봉 혈사의 수장을 당연하게도 혈인교주라 여겼다. 그가 광혈주에게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한데 아니란다.

진짜는 따로 있다는 의미였다.

남천휘는 재빨리 지도를 살펴본 후 인상을 썼다.

여전히 중지봉 내의 붉은 점의 대부분 사라졌고, 정상 인근에는 곡부남가의 가솔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무형장막으로 보호받고 있을 연하연의 위치도 여전했다.

‘제비는 멀쩡한데?’

하나 남천휘는 생각과 달리 대지를 박찼다.

만에 하나 적의 수장이 존재한다면 지금 이 순간 제비를 노릴 것이 분명했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경우가 존재해?’

재이는 대답이 없다.

대신 변화가 일어났다.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붉은 점이 등장했다.

그것도 연하연과 지척이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마치 자신이 외인의 존재를 인지하는 순간 적용이 되는 듯했다.

‘너는 일단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남천휘는 연하연을 향해 달렸다.

머리가 복잡했다.

그는 지금껏 시스템을 하늘의 힘으로 여겼다.

그리고 재이는 천신의 대변자라고 믿었다.

천의는 본래 엉성한 듯보여도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기에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작금의 상황은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무너트리는 계기였다.

파팟!

경공을 펼치는 가운데 예기치 못한 가설이 뇌리를 스쳐갔다.

‘하늘이 아니라면······.’

시스템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그렇다면 애초에 백파도 남추의 정체는?

머리가 더욱 복잡했다.

‘축지지책!’

현재 남천휘의 이동 경로는 여전히 대화동과 대두동 사이의 직선 경로였다. 중지봉이 중간에 위치했으니 자연스럽게 비책이 발동했다.

이동 속도가 두 배는 빨라졌다.

그리고 숲을 한달음에 뛰어넘는 순간 외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외인은 흑의가 아니었다면 길을 잃은 촌부로 보일만큼 평범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남천휘에게는 느껴졌다.

흑의인의 무한한 살의와 분노.

만약 지금도 적의 레벨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색깔은 세상 그 무엇보다 새빨갈 것이다.

파팟!

거리를 더욱 좁혔다.

그 순간 재이가 경고했다.

◎ 무형장막이 23000의 타격을 흡수했습니다.

◎ 무형장막의 피해흡수량이 모두 소진되었습니다.

◎ 무형장막이 해제됩니다.

지풍(指風)의 위력이 엄청났다.

절대지경의 고수가 아니라면 선보일 수 없는 무위였다. 그러나 단순히 무형장막을 파괴했다는 사실보다 무형장막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적은 무형장막이 지풍을 흡수했음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이격을 준비할 따름이다.

남천휘는 적의 손끝이 연하연에게 향하는 것을 보고 일갈을 내질렀다.

“멈춰!”

동시에 현월강기를 발출했다.

반월형의 강기가 출렁거리듯 공간을 휘저었다.

흑의인은 남천휘의 등장을 예상하지 못한 듯 당황해했다. 하나 황망한 와중에도 가볍게 손가락을 연이어 튕겼다.

터터터터터텅!

점점이 뻗어나간 반투명한 기운이 산탄의 형태로 전방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현월강기는 물건이 으스러지는 것처럼 형체를 잃더니 소멸됐다.

‘이게 말이 돼?’

강기는 말 그대로의 기의 집합체였다.

그러니 충돌로 인해 응집력이 사라졌다면 당장 흩어졌어야 했다. 한데 마치 형체가 있는 물건처럼 바스러지면서 산산조각 나는 것이 아닌가.

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는 일이 발생했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슬쩍 물러났던 적은 공격의 의사가 없는 것처럼 뒷짐을 지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이 상황을 즐기듯 입꼬리를 올렸다.

“너 정체가 뭐냐?”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한데 대답이 돌아왔다.

“초류탄. 한 때 빙궁의 주인이었지.”

남천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괴겁천마의 수족이었던 사성신위 중 북해빙궁의 주인이라는 말이 아닌가.

“괴겁천마의 수족인 북위 동황제군!”

“맞아. 지금은 중사라 불리지.”

낯선 직위였다.

무극중사는 매담자라도 되는 양 순순히 말을 이었다.

“일원은 괴겁천마를 중심으로 좌사와 우사, 그리고 내가 있단다. 네가 알다시피 천마신의는 우리 쪽에 없다. 네가 백결공을 상대했으니 이제 사성신위와 일원의 구조를 쉬이 파악할 수 있을 게야.”

틀린 말은 아니다.

남천휘가 지금껏 상대했던 일원의 무리는 서위라 불렸던 흑천괴뢰의 꼭두각시였다. 한데 북해빙궁주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우사라 불리는 자는 분명 동위 마천종일 것이다. 한때 천산마교의 교주였던 자가 여전히 적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설마 천마신의를 찾으려고 이 사달을 벌인 건가?”

무극중사의 주름진 눈매를 좁히며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아주 똑똑하구나.”

“칭찬은 됐어. 한데 일원은 점조직으로 장막에 쌓여 있었잖아. 내게 순순히 알려주는 이유가 뭐지?”

“어차피 알게 될 일이 아니더냐. 시간을 단축했을 뿐 대세에는 변화가 없다.”

남천휘는 슬쩍 연하연의 앞을 가리며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 놈이 혼절한 여인을 노려?”

무극중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또한 대세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저 계집에 손을 써서 시간을 단축하려 했을 뿐이야.”

“시간! 시간!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려는 게냐?”

남천휘의 일갈에 무극중사는 애매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 또한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슬쩍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한 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남천휘의 안력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할아버지가 천주봉 정상에서 공간을 열고 나왔을 때에도 이렇게 빠르지는 않았어.’

마치 안개처럼 흩어진 게다.

사령신을 만났을 때에도 지금처럼 놀랍지는 않았다.

남천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읊조렸다.

‘도대체 저 새끼 뭐야?’

한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그 순간 미약한 신음이 들렸다.

점혈로 인해 눌렸던 혈도가 서서히 깨어나는 듯했다.

남천휘는 연하연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힘없이 늘어진 그녀를 보고 있자니 연민의 감정이 절로 피어났다. 만약 자신이 조금만 늦었어도 그녀는 죽은 목숨이었으리라. 하나 애초에 자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런 위험에 처하지 않았을 게다.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던 거야.’

남천휘의 눈매에 서늘한 기운이 스쳐갔다.

그는 곡부남가가 성세를 넓힐수록 안전해질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가솔을 안전하게 만드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따로 있었다.

적을 없애야 했다.

‘무적(無敵)은 무적(無敵)이니 무적(無籍)으로 족하다.’

남천휘가 중지봉에서 깨우친 한 가지였다.

적이 없으면 무적이니 적이 없어도 족한 게다.

“만렙을 찍어야겠어.”

그리고 모든 적을 없앤다면 다시는 가문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잠시 후 중지봉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혈인교의 잔당들을 모두 제거하고, 사마의가 종전을 선언한 것이다.

“주군! 연 소저는 무사하군요. 완벽한 승리입니다!”

하나 남천휘는 사마의를 비롯한 현월사대의 대주들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

곡부남가는 중지혈투를 통해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광혈오주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승리는 곧 증명이 되기에 충분했다.

백 년만의 쾌거였다.

사마천세 시절에 일어났던 신마대전은 엄밀히 말했을 때 마도와 사파의 싸움이었다. 괴겁천마와 사령신을 상징으로 하는 사마외도의 전쟁이었다.

정파는 그 사이에 끼어 생존을 걱정해야 했다.

그렇기에 정파는 부끄러운 과거를 청산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정천칠공이다.

정천칠공은 제각기 고강한 무예로 수많은 정파인을 구했다. 그리고 간혹 사마외도와의 싸움에서 정파를 이끌고 승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마천세를 끝낸 건 그들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사라졌고, 수족들이었던 사성신위와 광혈오주도 자취를 감췄다.

복수조차 하지 못한 채 모든 게 끝난 셈이다.

한데 백 년 동안 자취를 감췄던 사령신이 갑자기 등장했고, 광혈오주가 대규모 혈겁을 일으켰다.

중원의 절반이 피로 물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한데 남천휘가 사령신을 물리쳤고, 곡부남가는 광혈오주를 없앴다. 광혈오주 중 세 명이 죽었다는 소식에 강호인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그리고 너나 할 것 없이 곡부남가를 찬양하기 위해 말을 아끼지 않았다. 마치 남천휘의 승리가 자신의 승리인 것처럼, 곡부남가의 승전이 정파의 승전인 것처럼 여겼다.

남천휘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저들이 뭘 했다고 내 명성에 업혀가려는 거야?”

하나 사마의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곡부남가의 성세는 산동성을 넘어 중원 전체에 퍼졌다. 이제는 오대세가 위에 곡부남가가 있다는 자들이 즐비했다. 심지어 구파조차 곡부남가의 덕을 봤다는 소문이 회자될 정도였다.

“클클, 이제 시작입니다! 수많은 자들이 주군의 등에 업힐수록 덩치는 거대해집니다. 그리고 이내 주군은 거인이 되어 강호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되실 겁니다.”

소문은 소문으로 끝나지 않았다.

구파오가는 저마다 대표를 보내 축하를 했고, 중소방파의 주인들은 곡부남가에 줄을 대지 못하여 안달을 했다.

“이것을 그대들의 주인께 전하시오.”

사마의는 곡부남가를 찾아온 구파오가의 대표들에게 같은 내용이 적힌 서찰을 건넸다. 괴겁천마와 일원의 관계를 비롯하여 저간의 사정을 적었다.

“이번이야 말로 백 년 간의 수치를 털어낼 기회다!”

구파오가는 일제히 성명을 발표하여 강호 전체에 적의 정체를 알렸다.

그리고 마침내 무림맹이 반응했다.

- 천지에 상쾌하고 맑은 기운이 가득한 청명절(淸明節)에 강호의 존립을 논의할 무림대회를 열겠다!

무림맹주의 선언에 수많은 강호인이 호남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나 같이 정마대전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자들로 가득했다.

‘내가!’

‘내가!’

‘영웅이 되겠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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