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삼생삼사 십리도화(三生三死 十里刀火).
106, 삼생삼사 십리도화(三生三死 十里刀火)
일청대사는 맥차로 입을 헹궜다.
“구파오가에 이어 각성에 자리한 방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소. 한데 이렇듯 현월회가 시작하는 순간을 마주하니 감회가 새롭구려.”
서산노옹은 옅은 웃음을 보였다.
“그 사이 산동에는 많은 일이 있었지요. 삼정이 이렇게 재편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황보세가의 소가주에게는 미안하지만, 차라리 잘 됐다고 보오.”
일청대사의 말에 황보장천은 급히 목례를 했다.
“괜찮습니다.”
“당분간 산동에는 혈풍이 불지 않겠지.”
서산노옹이 일청대사에게 물었다.
“대사, 제 견식이 높지는 않으나, 다른 곳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됐다고 들었습니다만······.”
배분과 연차가 가장 높은 두 사람의 대화였다.
자연스럽게 좌중은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했다.
“사람의 마음이 어찌 다 같겠소이까. 정파의 세상이 되었지만, 저마다 욕심을 버리지 못했소. 강호는 고인 물이 되었고, 그러다보니 산동과 같은 폐해를 금치 못하는 게지. 다른 성이라고 해서 다르겠소이까?”
여기까지는 남천휘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행위였다.
일청대사는 한 숨을 내쉬었다.
“정파가 올곧지 못한 까닭에 지금껏 억눌렸던 사마외도가 발호하고 있으니 탄식을 금치 못하겠소.”
서산노옹은 침음을 흘렸다.
“뭐라고요? 사황련은 와해되었고, 마교는 천산산맥에서 내려오지 않았소이다. 한데 발호라니요.”
일청대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보이는 적이 전부이겠소. 과거에는 광명회가, 당금에 이르러서는 일원이라는 세력이 암암리에 강호를 도탄에 빠트리고 있소이다.”
연회장에 모인 이들은 저마다 산동 곳곳에서 힘깨나 쓰는 명숙들이다. 하나 그들에게 광명회와 일원의 이름은 생소하기만 했다.
일청대사는 반대편에 앉아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는 백결군을 흘겨봤다.
‘동요하지 않는군.’
그는 버릇처럼 맥차로 입을 헹군 후 말을 이었다.
“당시 사마천세를 거론할 때 일선에서 혈겁을 일으킨 건 괴겁천마와 사령신이 아니었네.”
서산노옹이 말을 보탰다.
“그렇지요. 사성신위와 광혈오주로 인한 시산혈해가 펼쳐졌었지요.”
“그 중 괴겁천마의 수족인······.”
사성신위(四聖神位)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동위(東位)의 마천종(魔天從)은 천산마교(天山魔敎)를 이끌었다.
서위(西位)의 흑천괴뢰(黑天傀儡)는 모산칠곡(茅山七谷)의 수장이었다.
남위(南位)의 천마신의(天魔神醫)는 생사림(生死林)의 림주였다.
북위(北位)의 동황제군(凍荒帝君)은 북해빙궁(北海氷宮)의 주인이다.
“실제로 괴겁천마의 시신을 본 자가 없고, 사성신위도 마찬가지외다. 그리고 사령신의 광혈오주 또한 사성신위에 뒤지지 않소이다.”
일청대사는 옛 이야기를 하듯 덤덤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문상 백결공을 끊임없이 살폈다.
‘조금의 변화라도 보인다면 백결공의 뿌리를 알아낼 수 있을 텐데······.’
하나 백결공은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서산노옹이 눈짓을 했다.
두 사람이 백결공을 앞에 두고 연극을 한 까닭은 일원을 뿌리 뽑기 위함이다. 백결공이 비록 문상의 자리에 올랐다고는 하나, 일원의 수뇌부일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 아닌가. 만약 백결공을 잡았는데 점조직의 일부라면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는 꼴이다.
그러나 백결공은 노련했다.
자신이 아는 것을 조금씩 풀며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니 일청대사와 더불어 강호의 안위를 걱정하는 호협의 기상이 엿보였다.
“하하하! 됐습니다. 백주대낮에 얼굴을 내밀지도 못하는 잡배들을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남천휘가 불콰해진 얼굴로 술잔을 꺾었다.
일청대사의 제자인 회종선사가 우려 섞인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남 대협, 아니 이제는 회주라고 해야겠군요. 회주, 그리 쉽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괴겁천마! 사령신! 말 안 듣는 아이에게는 즉효일 만큼 두려운 이름이 아닙니까.”
남천휘는 회종의 말에 웃음을 참기 위해 애썼다.
회종의 달마십삼수도 분위기를 띄우는 재주만큼은 아닌 듯했다.
좌중의 명숙들은 회종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남천휘는 일부로 취객처럼 과장되게 손을 내저었다.
“어허! 언제 적 마두랍니까? 그들은 죽어서 뼈마저 사라졌을 것이고, 일원이 존재한다 한들 잔당에 불과하잖습니까.”
솨아아아아-
연회장의 상석을 중심으로 강맹한 기세가 퍼졌다.
일견하기에는 남천휘가 호방함을 드러내기 위해 내공을 사용한 듯했다. 장내의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나 마음속에는 미세한 불쾌함이 물에 떨어진 먹처럼 퍼져나갔다.
‘현월회주가 취했는가?’
‘강호의 선배들을 앞에 두고 내공을 자랑하다니.’
‘경박한 줄은 알았으나, 오만하기까지 하군.’
일청대사가 헛기침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림의 고승으로서 저런 오만방자한 모습은 참기 힘들었으리라.
“피곤하니 먼저 들어가겠소.”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손을 모았다.
“연회는 칠일밤낮으로 계속되니 내일 또 재밌는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백결군은 남천휘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일청대사가 칠일 동안 떠나지 않는다고?’
남천휘가 취하고, 일청대사가 자리를 뜨니 장내는 빠르게 정리됐다.
백결공은 신경질적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달마시안이 있으면 망자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혼자 있을 때를 노려야 하는데······.’
하나 이곳은 황보세가다.
게다가 현월회로 인해 평소보도 서너 배는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 힘들 터였다.
백결공은 술 병을 기울이다가 멈칫했다.
술에 취한 남천휘가 휘적거리며 어디론가 향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가 등장하자, 근처를 지키던 황보세가의 가솔들이 예를 표한 후 사라졌다.
“소가주.”
황보장천은 자신을 길가의 자갈 보듯 하던 문상이 손짓을 하자 반색을 했다.
“공께서 하실 말씀이라도?”
“현월회주와 한 잔 더 하고 싶었는데 보이지 않는군. 어디로 간 줄 아는가?”
그 순간 황보장천이 자연스럽게 남천휘가 사라졌던 방향을 힐끔거렸다.
“아! 글쎄요. 볼 일이 있겠지요.”
백결공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군. 하나 남천휘의 성정 상 이런 놈에게 일일이 목적지를 알릴 까닭이 없다.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건가?’
황보세가의 요처를 드나들기 위해서는 소가주의 허락이 필수였다. 한데 경계를 서던 무인들이 비켜선 것을 보니 이미 이야기를 끝낸 듯했다.
“공께서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술을 한 잔 올리겠습니다. 사실 저도 알고 보면 쓸 만한······.”
하나 백결공은 황보장천의 손이 무색할 만큼 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피곤하군. 나도 좀 쉬겠네.”
황보장천은 병째 술을 들이켰다.
그리고 수하를 불러 귀엣말을 건넸다.
“만서각으로 갔냐?”
“예, 말씀하신대로 가솔들을 물렸습니다.”
“황보 숙부에게 입구를 잘 살피라고 전해라. 변화가 있다면 반드시 알려야 해.”
“존명.”
같은 시각 백결공 역시 남천휘의 행적을 밝히려 했다.
“연회장에서 북서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 줄 아느냐?”
[내원으로 가는 입구입니다. 한데 며칠 전부터 만서각 주변이 소란스러웠습니다. 뭔가를 찾는 것처럼 분주했다더군요.]
백결공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만서각이라면 들어본 기억이 있다.
‘황보세가의 시조가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지었던 서고가 아닌가. 소림이나 제갈, 심지어 무림맹에 비해서 질적으로 값어치가 없는 허울 좋은 장소일 뿐. 잡서만 가득할 텐데?’
그는 의구심의 방향을 바꿨다.
‘어찌됐든 놈의 자만심은 극에 달했다. 하긴 세상이 제 것처럼 여겨질 것이야. 놈이 혼자 남는다면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수만금을 들여서 지은 만서각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쉬이 알려지지 않을 터였다.
생각을 끝낸 그의 입가에 혈소가 머물렀다.
[일청대사의 위치가 확인되면 만서각에서 목표를 제거한다.]
*
남천휘의 표정은 만서각에 들어서는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평소보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쯤 되면 백결공도 미끼를 물었을 텐데······.’
일부러 빈틈을 보이고, 칠일이라는 시간을 주었다.
이제 일청대사를 비롯해 자신의 사람들로 함정만 만든다면 백결공은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기어들어올 것이다.
“그나저나.”
남천휘는 만서각의 전경을 살피며 탄성을 흘렸다.
“어마어마하게 넓잖아.”
만서각의 장서가 어느 정도의 값어치를 지녔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하나 규모만은 지금껏 보았던 전각군 중에서도 으뜸이라고 칭할 만 했다.
입구부터 규칙적으로 불을 밝히는 등잔의 개수만 해도 수십 개에 이르렀다. 그것이 책을 읽는 중실로부터 사방으로 뻗어나가니 서가만 해도 백여 개가 넘었다.
‘이거 완전 미로나 다름없잖아.’
남천휘는 입구에 놓인 배치도을 건드렸다.
◎ 만서각의 배치도를 획득했습니다.
‘각인.’
잡다한 특기 중 하나였던 각인(刻印)을 사용했다.
그러자 배치도가 사라졌고, 각인 목록에 배치도가 그대로 새겨졌다. 이제 배치도를 소환하면 유형의 물품이 아니라 시야 구석에 지도처럼 등장할 것이다.
남천휘는 뒷짐을 지고 산책을 하듯 걸었다.
지도 대신 배치도를 띄워놓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초행이면서도 막힘이 없다.
“우리도 나중에 이런 걸 만들어 볼까?”
◎ 상징과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장소가 늘어날수록 성소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남천휘는 탄성을 흘렸다.
황보세가는 만서각의 기둥마다 오묘한 문양을 새겨놓았고, 서가의 테두리에는 옥을 장식해 놓았다. 한 마디로 책을 보관하는 역할보다 자랑하기 위한 건물이었다.
그렇게 몇 개의 서가(書架)를 돌아 나왔을 때였다.
만서각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낡은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성소(聖所)였다.
‘왜 안 떠?’
성소가 분명하거늘 경외를 표할 예(乂)자 표식이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예기치 못한 퀘스트가 등록됐다.
《삼생삼사 십리도화》
- 만서각 전체가 전장으로 설정되었습니다.
- 조상을 공경하여 천외(天外)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전장? 천외?
남천휘가 미간을 좁히는 사이에도 퀘스트가 이어졌다.
- 정사마는 꼬리를 문 뱀처럼 이어집니다.
- 정사마는 거미줄처럼 얽힌 은원을 지닙니다.
- 정사마를 상징하는 세력이 전장에서 자웅을 겨루게 됩니다.
※ 승리 조건.
1, 대상자를 제외한 세력의 전멸.
2, 대상자를 제외한 세력의 전멸과 패퇴.
마지막 줄이 의미심장했다.
‘이번 퀘스트를 끝으로 3막이 시작된다고?’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삼생삼사라면 셋은 살고, 셋은 죽는다는 소리잖아. 십리도화는 칼과 불이 십 리를 간다는 소리인가?’
퀘스트는 발동했지만, 진행 상황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듯했다. 일단 이번 퀘스트의 핵심은 정사마(正邪魔)의 세 세력이 격돌하는 것이다.
정(正)은 자신을 포함하여 일청과 검후를 뜻할 터였다. 백결공과 일원은 사(邪)와 마(魔) 중 하나일 것이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히다가 허공을 흘겨봤다.
‘내가 제멋대로 살기는 하지만, 마도는 아니잖아. 설마 내가 사파 성향인 거냐?’
*
저자에서 때 아닌 울음이 들려왔다.
아이가 여인의 소매를 잡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어머니, 사줘요. 먹고 싶단 말이에요.”
눈물이 턱 밑으로 뚝뚝 떨어지며 내뱉는 애절한 한 마디에도 여인은 완고했다.
“당과는 어제도 먹었잖니. 그리고 이미 시간이 늦었단다. 하늘을 보렴. 벌써 해가 반쯤은 사라졌잖니. 당과 장수도 이미 들어갔어.”
하나 아이는 여인의 소매를 흔들며 떼를 썼다.
“그럴 리가요. 당과를 먹고 싶은데.”
여인은 아들을 달래며 말했다.
“아까 이 어미가 보았단다. 네가 조금만 빨리 얘기했으면 사줬을 텐데 아깝구나. 그러니 당과는 다음에 먹자꾸나. 알았지?”
아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진짜요?”
여인은 아들을 설득하기 위해 쐐기를 박았다.
“그럼. 이 어미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걸 보았니?”
이제 아이는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렇게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하루가 계속될 터였다. 그 순간 일상을 깨는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닌데.”
여인과 아이의 시선이 같은 곳을 향했다.
대머리 중년인이 당과를 할짝거리며 웃고 있었다.
“뭐라는 거예요?”
여인은 당장 꺼지라는 의미의 눈짓을 보였다.
하나 대머리 중년인은 오히려 허리를 숙이더니 아이 앞에서 당과를 맛있게 할짝거리는 것이 아닌가.
“아이야. 저기 골목을 돌아가면 당과 장수가 있단다.”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진짜요?”
대머리 중년인은 헤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방금 샀는걸! 아마 네 어머니는 모르셨나보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여인은 주먹을 쥔 채 억지웃음을 지었다.
“그러네. 몰랐네. 대인 덕분에 우리 아이가 당과를 먹게 되었군요.”
아이는 여인의 속내도 모른 채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매를 잡아당겼다.
“어머니! 당과 사러 가요!”
대머리 중년인은 여인의 싸늘한 눈빛을 뒤로 한 채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는 당과를 다 먹고 남은 막대기를 이빨 사이를 긁적이며 키득거렸다.
“아이! 기분 좋아.”
그런 그가 인적이 드문 골목에 들어섰을 때였다.
“죽어라!”
복면을 한 십여 명의 무인이 하늘을 뒤덮을 기세로 쇄도했다.
중년인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막대기를 튕겼다. 손을 떠난 막대가 저절로 산산조각이 나더니 암기라도 되는 것처럼 꽂혀든다.
파파파파파파팟!
그 순간 십여 개의 피분수가 솟구쳤고, 가슴에 주먹만한 구멍이 뚫린 몸뚱이가 나뒹굴었다.
“사부. 네 놈을 용서하지······.”
대머리 중년인은 원한 가득한 적의 읊조림에 사뿐히 머리를 밟아주었다.
콰직.
저 멀리서 장사치의 외침이 들려왔다.
“곡부에서 가장 맛있는 당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