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41화 (241/305)

106, 삼생삼사 십리도화(三生三死 十里刀火). (2)

*

산동성의 관도는 제남에서 곡부로 이어진다.

그러니 제남과 태산 사이의 제연평은 관리가 되지 않아 돌산이 많고, 척박했다. 양민조차 살지 못했으니 지명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하나 신마대전 당시 정파를 상징했던 정천칠공 중 제룡검야의 고향이 제연평이다. 그렇기에 강호인이라면 제연평을 지날 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소림을 앞에 두고 말에서 내리거나, 무당산을 오를 때 무기를 내려놓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오늘의 제연평은 그 어느 때보다 고즈넉했다.

그것은 제룡검야의 후예가 머물던 제룡장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평소와 다르게 피 냄새가 낭자할 뿐이다. 수십 구의 시신이 연무장을 가득 채웠고, 그 사이로 피투성이의 사내가 산책을 하듯 걸었다.

사부(邪否)라 불린 자였다.

사파를 부정한다는 이름을 지녔으면서 보보마다 사기(邪氣)가 퍼져나갔다. 요사스러운 기운이 피 냄새와 어우러져 공간을 장악했다.

끼익-

장주의 처소에 발을 들이는 순간 불규칙한 호흡이 들려왔다.

사부는 점혈을 당하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제룡장주를 앞두고 입을 열었다.

“이제 대화를 하고 싶어졌는가?”

제룡장주는 제룡검야의 유지를 지키며 욕심 없이 살던 노인이다. 그렇기에 천진난마한 아이처럼 맑은 눈빛으로 남천휘를 대했고, 선대의 인연이 이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마봉파를 내어줬다.

그랬던 제룡장주의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다 죽인 거냐?”

사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건 모르지. 어딘가 마루 밑에 누군가 숨어 있을 수도 있겠지. 자! 이제 대화를 해보자. 마봉파는 어디 있느냐?”

장주는 마봉파라는 단어가 흘러나오는 순간 눈을 부릅떴다.

“여기 없군.”

사부의 눈빛은 세상 모든 것이 뒤섞인 것처럼 혼탁했다. 그는 장주의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속내를 꿰뚫어봤다.

“당신 누구요?”

“마봉파의 봉인은 범인이 깨트릴 수 없는 것. 한데 그것이 깨졌다. 신검을 녹여 항아리를 만든 것이 철신과 청염진군일 터,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제룡검야에게 맡겼겠지. 한데 그것이 갑자기 풀려난 이유가 무엇이더냐?”

제룡장주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친우인 천응검후에게도 비밀로 했던 야사가 생면부지의 사내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군. 남천휘라는 놈에게 줬군. 그가 만병보고에서 신검을 울린 건가?”

사부는 당황스러워하는 제룡장주를 보며 빙긋 웃었다.

“칠야호리술에 걸린 이상 우리는 이미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라네.”

제룡장주는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외쳤다.

“칠야호리술이라면 사령신의 비의 중 하나가 아닌가. 네 놈은 사파의 개종자로구나! 사령신과 무슨 관계더냐?”

“대화는 여기까지만 하지. 나는 사파를 부정하는 정인군자답게 약속을 중요하게 여기지. 대가 끊이지는 않을 것이다.”

사부는 손가락을 튕기며 돌아섰다.

제룡장주는 해혈과 동시에 주저앉았다.

“네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냥 보낸다면 수많은 인명이 해를 입을 터!”

사부가 고개를 돌렸다.

제룡장주는 탁자의 팔걸이를 부여잡은 채 이를 갈았다.

“네 놈이 마봉파를 안다면 청염진군과 철신이 제룡장에 만근의 화약을 묻어놓은 것도 알겠구나.”

사부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몰랐는데.”

“크흑! 그럼 지금부터 알아라. 제룡검야의 후손으로서 치욕은 참을지언정 사마의 창궐만은 용납할 수 없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마루 밑에는 네 혈육이 남아있단 말이다!”

제룡장주의 눈동자의 한순간 망설임이 스쳐갔다.

하나 그는 이내 미련을 털어내고 팔걸이를 비틀었다.

콰직!

그 순간 부서진 팔걸이 안에서 불똥이 튀었고, 도화선을 따라 불꽃이 빠르게 퍼졌다.

“제마멸사!”

콰콰콰콰콰쾅!

장주의 처소에서 시작된 폭발은 빠르게 제룡장 전체로 이어졌고, 이내 제연평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폭연이 솟구쳤다.

한데 그보다 빠르게 튕겨나온 인영이 존재했다.

파팟!

대지에 발이 닿는 순간 더욱 빠르게 튕겨나갔다.

마치 이형환위를 방불케 하는 십여 회의 움직임으로 백여 장 가까이 질주했다. 마지막에 이르러 허공에서 몸을 세 번이나 비튼 후 내려선 것은 사부였다.

옷은 갈가리 찢겼으나 탄탄한 육신에서 피의 흔적을 찾기란 요원했다.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청년을 내려놓았다.

제룡장주를 닮은 얼굴로 보아 혈육일 터였다.

“쯧, 쓸데없는 짓이라니까.”

사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제룡장을 보며 말했다.

“어쨌든 약속은 지켰다.”

그는 멋지게 돌아섰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혼절한 청년의 옷을 벗긴 후 자신의 몸에 걸쳤다.

잠시 후 사부는 어둠의 장막을 열어젖힌 후 자취를 감췄다. 그가 향하는 곳은 황보세가였고, 목표는 신검을 울린 자였다.

*

벌써 삼일 째다.

백결공은 식은 찻잔을 매만지며 석풍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만서각 방향으로 사라졌습니다.”

“만서각이 확실하냐? 남천휘라면 너희들의 이목을 속일 수 있지 않은가.”

석풍은 잠시 머뭇거렸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남천휘가 아니라 황보장천을 살펴봤습니다. 그는 남천휘가 사라질 때마다 수하들을 만서각 쪽에 배치했습니다. 그리고 남천휘가 다시 돌아오면 수하들에게 만서각의 변화를 물었고, 심지어 몇 번이나 만서각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석가장의 장로이면서도 백결공에게 의탁한지 오래였다. 그러니 자신의 일처럼 모든 것을 조사했을 것이 분명했다.

백결공은 침음을 내뱉었다.

“만서각에 뭐가 있기는 있나 보군.”

“알아보겠습니다.”

“되었다. ‘하늘’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면 이미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인세의 하찮은 기물은 하늘이 내려줄 비의와 비교할 가치도 없을 터!”

찻잔을 돌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고민이 깊어진다.

“일청대사와 회종은?”

“오늘도 서산노옹과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어제부터 천응검후가 합류하여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천응검후도 비경회와 끈이 닿았을 게다. 그러니 남천휘가 혼자인 것은 확실한데······.”

빙글빙글 돌던 찻잔이 멈췄다.

“후인통에게 일러서 무림맹의 이름으로 연회를 열게 해라.”

사절단에서 가장 높은 직위를 지닌 건 문상 백결공이다. 하나 대표는 무림맹의 장로인 전륜검객 후인통이 아닌가. 그가 연회를 개최한다면 명숙들은 너나할 것 없이 참석할 것이다.

‘아예 방해가 될 만한 자들은 모조리 떼어놔야겠어.’

백결공은 석풍이 처소를 나간 후 허공을 향해 손짓했다.

“망자를 불러라.”

호위의 기척이 사라졌다.

잠시 후 호위의 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처소에는 망자 셋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금산혈주는 수판(數板)과 철척(鐵尺)을 꺼냈다.

법륜살은 테두리가 날카롭게 갈린 쌍륜(雙輪)을 쥐었다. 무명초자는 대부(大斧)를 품에 안은 채 백결공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백결공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망자는 주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을 한다.

역혈구체대법 자체에 섭혼술을 가미했다.

그렇기에 내공을 버리기 전에는 섭혼술의 위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데 자의를 잃은 저들이 무기를 꺼냈다.

투기가 극에 달하여 살심이 동한 게다.

애초부터 사마외도 중에서도 악랄한 자들만 모아놓은 것이 십이망자였다. 며칠 동안 자리만 보전했으니 오래 참기는 했다.

“부리는 자는?”

금산혈주의 새빨간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서른 명 정도 됩니다.”

법륜살이 되도 않는 불호를 외며 이빨을 드러냈다.

“열두 명의 제자가 대기 중입니다.”

무적초자는 자신의 대부를 두드릴 뿐이다.

금산혈주가 망자를 대표하여 물었다.

“오늘입니까?”

백결공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후인통의 연회가 시작되면 석풍이 뒷문을 열어줄 것이다. 그들이 만서각에 도착하면 바로 시작한다.”

세 명의 망자는 동시에 살기를 보였다.

백결공조차 눈살을 찌푸릴 만큼 음습하고, 탁한 살기가 아닌가.

‘며칠 시간을 끈 것이 차라리 잘됐군.’

그는 망자들에게 당부했다.

“이번 일은 비경회의 등장 없이 빠르고, 은밀하게 끝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불을 지르거나, 큰 소리를 내지 마라. 만서각은 수백 명이 들어가도 될만큼 넓고, 수십 명이 길을 잃을 만큼 구조가 복잡하다. 놈은 혼자이니 조급해하지 않으면 제한 시간 내에 목을 벨 수 있을 것이다.”

“존명.”

백결공은 손을 내저었다.

망자들은 나타나을 때보다 더욱 은밀하게 자취를 감췄다.

“우리도 가자.”

[주군께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위험합니다.]

“왜인지 모르게 찜찜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대사형이 시일을 정하지 않았다면 조금 더 지켜봤을 것이야. 그러니 최소한 경계에서는 지켜봐야겠다. 변수가 생기면 영향을 끼치기 전에 없애버리면 될 것이야.”

[망자가 만서각에 돌입할 때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방해꾼들은 연회에 빠져 있을 테니 내 곁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하나 백결공은 알지 못했다

남천휘는 이미 석자경을 통해 석풍을 움직였다.

그로 인해 백결공과 석풍의 연결고리를 확신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일청대사와 검후는 남천휘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석풍의 움직임만 눈여겨보고 있을 뿐이다.

*

남천휘는 만서각의 꼭대기나 다름없는 창틀에 기대앉은 채 술병을 기울였다.

만 권의 책이 있다는 만서각에 출입한 게 벌써 삼일 째다. 하나 지금껏 단 한 권의 책도 펼쳐보지 않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자신이 떠난 후에 만서각을 수색하는 황보장천을 보고 있자니 기가 찰 노릇이다.

“하아. 얼마나 남았지?”

◎ A급 성소 ‘황보세가’와 동기화 중입니다.

- 잔여 시간은 10:21:15:55입니다.

열흘이면 동기화도 끝이다.

남천휘는 잔여 시간을 확인한 후 피식 웃었다.

‘성소가 거대하니까 이런 장점도 있네.’

예 표식 대신 퀘스트가 뜬 이유를 알게 됐다.

만서각 전체가 거대한 성소였기에 예전과 달리 별다른 행동이 필요치 않았다. 그저 만서각 내에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동기화가 진행됐다.

“그나저나 허여멀건 하게 생겨서 의심은 더럽게 많네.”

마음만 먹으면 동기화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하나 백결공과 일원의 처리를 우선시 했기에 느긋하게 관망하는 중이다.

“응?”

남천휘는 술병을 꺾다가 슬그머니 밖을 살폈다.

일부러 만서각을 감싸고 있는 후원의 문을 열어놓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적은 굳이 힘들게 담을 넘지 않고, 문을 통해 등장했다.

무복을 걸친 서른 명이 먼저 들어섰다.

그리고 특이한 승복을 걸친 자가 열 명이다.

‘장천아, 장천아. 너희 집을 어쩌려고 이러냐?’

명색이 오대세가라면서 내외원의 경계까지 적이 나타났다. 한데 호각을 울리는 경비나, 경계하는 무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남천휘가 쓸데없이 황보세가의 미래를 걱정하던 중 음습한 기운이 사방에서 들이쳤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들과 달리 노골적으로 부정한 기운이 전해진다.

이런 게 말로만 듣던 마기(魔氣)가 아닐까 싶다.

‘오호! 큰 덩어리가 셋. 백결공이 믿는 건 저것들이겠군.’

큰 덩어리 셋을 필두로 적이 움직였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정원을 지나 만서각에 들어섰다.

끼익-

문이 닫혔다.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만서각에 들어섰던 적들의 이목이 한순간에 집중됐다. 그들은 지금까지 은밀하게 접근한 것이 무색할 만큼 달빛을 등진 남천휘를 보며 살기를 보였다.

금산혈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천휘를 올려다봤다.

“함정?”

남천휘는 품에서 화살촉이 뭉툭한 화전을 꺼냈다.

“크큭! 그래, 함정이다.”

인벤토리에서 화섭자를 꺼낸 후 화전(火箭)의 끝에 있는 심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것을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피이잉-

화전은 십 장 정도 높이에서 폭발할 것이다.

그리고 일청대사를 비롯한 정파의 무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들이닥치리라.

핑-

금산혈주가 수판의 알을 튕겨냈다.

붉게 번들거리는 알이 솟구쳤지만, 화전을 따라잡기에는 무리였다.

남천휘는 화전이 폭발할 시기를 노려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피려 했다. 입으로 내는 폭발음까지 더해지면 격장지계로는 차고 넘칠 터였다.

‘셋, 둘, 하나.’

남천휘는 입을 뻥긋거리려다 멈칫 했다.

폭발도 없었고, 불꽃도 없었다.

그저 지금껏 그 누구에게서도 느낄 없었던 기이한 기류가 먹물처럼 퍼져나갔다. 마치 밤하늘에 어둠의 장막이 덧씌워진 것처럼 어깨를 짓눌렀다.

동시에 밤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말 그대로 달빛보다 환하게 번쩍이는 무언가가 만서각의 창문을 향해 내리꽂힌 것이다.

‘대머리?’

남천휘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대머리 중년인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중년인은 남천휘와 망자 사이에 내려선 후 주먹을 쥐었다.

파스슷-

화전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여기 남천휘라고 아는 사람?”

대머리 중년인이 친근하게 묻는 순간 뾰족한 알림음이 뇌리를 강타했다.

띠링-

◎ 정사마(正邪魔)가 집결했습니다.

- 퀘스트 ‘삼생삼사 십리도화’가 발동합니다.

- 현재 시각으로 전장이 통제됩니다.

- 정사마의 전장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우리 편 아직 안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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