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분홍신. (2)
지옥귀(地獄鬼)는 벌써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길을 잃었다. 어디로 가야 할까?’
여덟 개로 갈린 조각난 갈림길.
어디로 가야 목표를 만날까.
‘운명으로 친다면, 내 운명을 고르지만 지금껏 눈을 감고 걸어도 맞는 길을 골랐지.’
그랬기에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곡부남가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판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하나 지금은 스스로를 돌이켜본다.
‘어디서부터였지?’
그는 백결공의 명령으로 곡부남가의 수뇌부를 쓸어버리러 온 길이 아닌가. 한 명도 아니고 성이 남가인 자는 모조리 죽이려 했다.
어려울 것도 없다.
며칠 전 받아든 곡부남가의 가계도에는 직계의 상황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큰 놈은 돼지에, 둘째는 행방불명, 셋째는 부재 중.’
그렇기에 겸사겸사 불까지 질러볼까 고민하던 상태였다.
기회를 엿봐 재물도 적당히 챙기려 했다.
그렇게 외원의 입구를 지날 때만 해도 별다를 것이 없었다. 정보대로 부를 자랑하듯 솟을대문과 낮은 담장이 시선을 끌더라.
그렇기에 거침없이 들어섰다.
하나 손님을 처음 맞이하는 거래소와 접객원을 지나는 순간 높은 담과 월동문이 그를 맞이했다.
그래도 월동문은 열려 있었다.
문제는 월동문을 지난 후였다.
작은 마당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에는 팔각지붕을 올린 정자가 위치했다.
한데 공교롭게도 마당의 벽 또한 여덟 개였다.
팔각(八角)의 공간.
그리고 여덟 개의 벽마다 같은 모양의 월동문이 뚫려 있었다.
벽에 새겨진 문양은 같았다.
좌우측에 석등(石燈)이 놓였고, 정자 근처에는 각(角)마다 나무를 심었다.
북쪽으로 들어왔으니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북쪽의 월동문을 지나는 순간 지옥귀는 미간을 좁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익숙했다.
팔각 정자와 팔각의 벽, 여덟 개의 문.
일견하기에도 진법을 흉내 낸 것이었으리라.
하나 지옥귀의 감각은 범인과 격이 달랐다.
동수의 무위를 자랑하던 자들도 지옥귀의 살인감각에 앞에서는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뭐가 됐든 정면으로 향하면 될 뿐!’
코웃음을 치며 나아갔다.
그러다 지금에 이르렀다.
‘아홉 개.’
지옥귀는 아홉 번째로 마주한 팔각정자를 보고 침음을 흘렸다. 정자의 모양도, 벽에 새겨진 문양도 같았다. 심지어 석등과 수목의 위치마저 동일하게 여겨졌다.
점점 자신감이 하락했다.
눈앞의 정자가 새로운 것인지, 이미 지나쳤던 것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잠깐, 아홉 번째가 맞는가? 열 번째 아닌가?’
그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지나왔던 길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확신이 깨졌음을 의미했다.
어디를 보아도 똑같았다.
꽈득-
생각지도 못한 암초에 울화가 치밀었다.
‘흥! 꼴에 진법이라도 펼쳐놓은 겐가.’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떤 미로라고 해도 한쪽만 붙잡고 계속 이동한다면 출구가 나올 터였다. 이 또한 수많은 살행을 통해 체득한 능력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벽에 대고 움직였다.
주변의 경관을 신경 쓰지 않고 손끝의 감각에만 의지했다. 똑같은 구조라고 해도 결국 생문(生門)과 사문(死門)이 있지 않던가. 그는 자신이 생문에 도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순간 미세한 파열음이 들렸다.
끼릭-
지옥귀는 본능적으로 벽을 짚고, 몸을 띄웠다.
파파팟!
달빛 아래 무언가 번뜩였다.
그는 석등에 박힌 철시를 뽑은 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손가락 끝에서 손목 정도 길이의 철시였다. 한데 철시의 상태는 병기로 써도 좋을 만큼 훌륭했다.
‘돈이 얼마나 많기에 이런 좋은 철을 쓰는 거야.’
그는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은 후 철시가 튀어나왔던 구멍을 살폈다.
잔디에 가려져 있던 구멍이 한두 개가 아니다.
심지어 벽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구멍이 존재했다. 같은 색의 흙으로 구멍을 살짝 막았기에 대낮에도 쉬이 눈치를 챌 수 없었으리라.
‘보통 기관이 아니야.’
지옥귀는 어깨를 슬쩍 움츠렸다.
지금껏 단지 방향을 헷갈리게 만드는 정도의 진법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기관까지 섞여 있으니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는 시야가 탁 트인 담장 위로 오르려다 멈칫했다.
담장의 기와를 슬쩍 걷어내고 안력을 돋웠다.
‘여기도 암기가 숨겨져 있어.’
한순간 등허리가 서늘했다.
이미 담장에 올라섰던 경험이 있지 않은가.
운이 좋았던 게다.
꽈득-
지옥귀는 이를 갈았다.
산책 삼아 나섰던 길이 어느새 안개가 자욱한 어둠으로 뒤덮인 듯했다.
‘기관에 진법까지. 좋아! 오랜만에 의욕이 생기는군.’
지옥귀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역혈구체대법의 힘을 보여주마!’
잠시 후 귀화(鬼火)처럼 붉은 빛이 아른거렸다.
그는 벽에서 손을 떼고 걸었다.
오감이 극에 달하여 기감까지 강제로 개방한 상태였다. 이제 기관의 미세한 소음과 진법으로 인한 기류의 변화에도 멈추지 않으리라.
‘다 죽었어!’
그렇게 두어 개의 월동문을 더 지났을 때였다.
솨아아아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과 함께 안개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부는 바람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흘러갔을 뿐 뭉쳐들지 않았으리라.
‘저건 뭐지?’
만약 그에게 재이와 대화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했으리라.
◎ 팔괘석병진(八卦石竝陣)이 발동합니다.
- 석등의 불빛과 수목의 내음이 자동으로 조절됩니다.
진법 곳곳에 퍼져 있던 나노 플레이트가 석등의 불꽃과 반응했다. 진법의 운용에 따라 어느 것은 키우고, 어느 것은 줄였다. 동시에 장식처럼 심어놓은 수목의 향이 지옥귀를 휘감았다.
◎ 혼무운해진(混霧雲海陣)이 발동합니다.
- 팔괘정(八卦亭)에 비축한 약재가 자동으로 발화합니다.
그것을 알 리 없는 지옥귀의 눈앞에서 기사가 벌어졌다. 마치 정자에서 불을 피운 것처럼 연기가 퍼져나갔다. 연기는 안개와 뒤섞여 시야를 가렸고, 이제 확인할 수 있는 건 기껏 해야 석등의 불빛과 월동문이 전부였다.
지옥귀는 한순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백 회가 넘는 살업을 치르면서 별의별 장소를 지나쳤다. 거대방파도 있었고, 유서 깊은 명문정파도 있었다. 그러니 이처럼 신묘한 진법의 변화를 처음 겪는 건 아니다.
하나 낯설지 않을 뿐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런 진법이 왜 변경의 이름도 없는 방파에 설치되어 있단 말인가.’
이곳은 무림맹의 내원도, 제갈세가의 천무각도, 소림사의 조사동도 아니었다.
달포 전만 해도 생소하기만 했던 방파였다.
그는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달을 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역혈구체대법(逆穴具體大法)으로 인해 극대화됐던 오감과 심력의 수준이 예전 같지 않았다.
‘대법마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라니.’
자만심을 버렸다.
그리고 무림맹의 맹주를 암살한다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딛었다. 다행히 온몸을 휘감은 안개는 그 자체만으로 악영향을 주지 않았다.
‘흔들리지만 않으면 시간이 걸릴 뿐 통과할 수 있다!’
그는 기관이 없는 벽에 표시를 했다.
그리고 움직였다.
이제는 살행을 끝낼 생각보다 탈출을 염두에 뒀다.
내일 제대로 준비를 한 후 다시 도전할 요량이다.
어차피 경계를 서는 무인조차 없는 장소였다.
그렇기에 방향을 개의치 않고 벽면을 따라 이동했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자신이 새겨놓은 표식이 나타났다.
이제는 표식의 반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안개가 처음 흘러나왔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상태에서 남쪽으로만 이동하면 출구다!’
그는 눈을 빛내며 걸음을 내딛었다.
한데 월동문에 발을 들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살기(殺氣).
역혈구체대법으로 인해 기감이 예민해지지 않았다면 눈치 채지 못했을 만큼 정제된 기운이다.
그가 발을 빼는 순간 좌우에서 예기(銳氣)가 번뜩였다.
쇄애애액!
지옥귀는 물러섰던 것보다 빠르게 월동문을 통과했다. 그리고 상체를 비틀며 양손에 쥔 암기를 흩부렸다.
쉭쉭쉭쉭쉭!
우모침이다.
지금처럼 바람이 멈췄고, 안개가 자욱하며, 거리까지 가깝다면 최고의 암기였다.
하나 상대는 천마신의의 진전을 이은 혈검살의가 아니던가.
마이와 홍칠은 검을 휘돌리며 우모침을 튕겨냈다.
숫자가 많을 뿐 암기에 실린 경력은 없다시피 했다.
지옥귀는 우모침을 뿌린 후 석등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적이 쓰러질 때까지는 방심하지 않았고, 그러니 멈출 이유가 없다.
그는 허공에 뜬 찰나간 마이와 홍칠을 지켜봤다.
두 사람 다 능숙하게 우모침을 튕겨냈지만, 홍칠 쪽이 조금 느렸다.
당연히 첫 번째 목표를 홍칠로 삼았다.
쇄애애애액!
숨소리마저 잦아들었으니 공간을 가르는 검의 진동이 여실히 느껴졌다.
지옥귀의 검법은 오직 한 가지만을 추구했다.
섬전(閃電)
벼락이 치듯 빠르게 쇄도한 검 끝은 당장이라도 홍칠의 안면을 헤집을 것만 같았다.
한데 홍칠은 아슬아슬하게 검끝을 피해내더니 반격을 하는 것이 아닌가. 동시에 마이까지 지옥귀의 퇴로를 막은 채 합공을 펼쳤다.
채채채채채챙!
지옥귀는 살수다.
그러니 정면 대결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괘념치 않았다.
역혈구체대법을 믿었다.
일원좌사의 대제자인 파진악이 ‘하늘’에게서 받아온 신공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살수이면서도 합공을 받아들였다.
한데 전황은 그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채채채채채채챙!
결국 생사가 결정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지옥귀의 검법이 끊겼다.
“크흑!”
지옥귀는 석등을 사이에 두고 마이와 홍칠을 노려봤다.
“너희들 뭐냐? 마치 내 검법을 알고 있는 것 같군.”
솨라라락!
마이는 멋들어지게 검을 휘돌리더니 등 뒤로 검을 숨겼다. 이 또한 우주류검술의 절초였기에 홍칠이 슬쩍 거리를 벌리며 호응을 준비를 끝냈다.
“너를 알지 못하는데 네 검법을 어찌 알까.”
지옥귀는 흐름이 끊긴 틈을 노려 호흡을 가다듬었다.
“나 또한 너를 알지 못한다. 너뿐이었다면 그렇게 믿었겠지. 하나 저 놈은 네게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내 손에 죽었어야 해. 한데 놈이 살아 있으니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홍칠은 코웃음을 쳤다.
“그래, 이 기회에 통성명이나 하자. 나는 홍칠이고, 저쪽의 대형은 마이다. 혈검살의라는 이름 정도는 알고 있겠지?”
지옥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은거한 기간만 해도 벌써 십 년 전이다.
혈검살의와는 활동 시기가 겹치지 않았다.
마이는 그런 지옥귀의 표정을 살피고는 미간을 좁혔다.
“서위의 후예이면서 남위의 존재를 모르는가?”
“서위? 남위?”
하나 지옥귀는 의아함을 숨기지 못했다.
한데 마이는 안타까운 듯 한 숨을 흘렸다.
“맙소사! 서위의 역혈구체대법을 익혔으면서 남위의 소우주경을 인식하지 못하다니.”
지옥귀의 두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역혈구체대법은 강호사에 거론된 적이 없는 상고의 무학이 아니던가.
‘크흑, 저 놈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마이는 뒤로 숨겼던 검을 늘어트렸다.
“어처구니가 없군. 본체가 아니라 그저 역혈구체대법을 익힌 쭉정이에 불과했다니. 너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꼭두각시로구나.”
지옥귀의 몸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흥! 네 놈의 개소리는 더 이상 지루해서 들어줄 수가 없구나. 역혈구체대법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으나, 제대로 된 위력을 지금부터 보여주마.”
하나 마이는 여전히 검을 늘어트린 채 고개를 내저을 뿐이다.
“아니. 너는 그럴 수 없다.”
그 순간 팔각정의 기둥이 쪼개지더니 사람이 튀어나왔다. 혈검살의 성시가 내뻗은 검에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별무리가 담겼다. 그리고 그것이 한데 뭉쳐 지옥귀의 가슴을 꿰뚫었다.
꽈득!
지옥귀는 자신의 앞가슴으로 튀어나온 검끝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읊조렸다.
“크흐. 역혈구체대법이 반응하지 않다니.”
성시는 지옥귀의 몸에 꽂아 넣은 칼을 비틀며 말했다.
“사성신위 중 서위 흑천괴뢰의 망자에게 소우주가 있을 리 만무하지.”
“그건 또 무슨······.”
지옥귀는 말끝을 흐렸다.
이제야 자신이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인지한 것이다. 그리고 저들의 말처럼 자신이 마냥 강하기만 한 인형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그 제안을 거절했어야 하는가.’
상념은 이어지지 않았다.
촤악!
홍칠의 검이 지옥귀의 머리를 베어버렸다.
성시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낸 후 다가왔다.
“대형, 흑천괴뢰의 주구가 여기에 나타났다는 건······.”
마이는 침음을 흘렸다.
“남 소협 때문이겠지. 황보세가에 혈풍이 불겠구나.”
홍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님, 어쩌시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우리가 가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들이 이곳을 또 노릴 가능성도 있다. 지금이야 진법과 은신처를 활용하여 승리했지만, 다음부터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그러니 모두 가는 건 힘들겠구나.”
성시가 눈을 빛냈다.
“제가 가겠습니다.”
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 혈사가 지나가면 남 소협에게 알려주어라. 괴겁천마와 사령신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그도 이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