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현월회(弦月會).
99, 현월회(弦月會).
황보세가는 패배를 인정했다.
남천휘는 삼정(三鼎)으로 대변되던 산동강호를 손에 넣은 셈이다. 하지만 황보세가의 상황은 봉문한 신공부나 멸문한 청도문과 달랐다. 세가의 무력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 수뇌부만 전멸한 상태였다.
황보세가의 문사들은 그것을 핑계로 사마의를 압박했다.
“명분에 밀렸을 뿐 오대원로가 돌아오면 어찌될지 모릅니다. 그러니 적당한 보상 정도로 마무리 합시다. 어찌됐든 같은 정파가 아닙니까.”
사마의는 주눅이 든 것처럼 어깨를 좁힌 채 침음을 흘렸다. 그러자 황보세가의 문사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말을 이었다.
“아닌 말로 오대원로가 아직 건재하오. 제남 북쪽에 퍼져 있는 그들이 모이면 머릿수만 해도 기백이외다. 황보세가가 패배한 것을 부인하지는 않겠소. 하나 더 이상을 원한다면 피바람이 불수도 있지 않겠는가?”
“정파 간의 분쟁은 적당히 예를 차리는 것으로 무마한 전례가 많습니다. 그러니 사마 군사도 양보를 해주시오. 어찌됐든 용린협은 혈혈단신이 아닙니까? 황보세가에서도 오늘 일로 분개하는 자가 적지 않습니다.”
한참동안 떠들던 이들이 서서히 입을 닫았다.
사마의가 너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기 때문이다.
“으음.”
“군사.”
문사 중 한 명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사마의를 불렀다. 그러자 사마의는 자다가 깬 사람처럼 고개를 번쩍 들더니 눈을 끔뻑였다.
‘입가에 침이······.’
‘이 상황에서 졸다니!’
문사들의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사마의는 굳은 어깨를 풀더니 시큰둥한 어조로 한 마디를 건넸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소? 그럼 이제 내 이야기를 합시다. 나도 끊지 않고 들었으니 예를 표하는 의미로 경청해주시오.”
군사부의 수장이 노기를 드러냈다.
“크흠! 본가에 잠시 의탁했으면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까닭이 있었군. 곡부남가의 군사 정도 되는 이라면 경망스러움을 먼저 버려야 할 것이야.”
사마의는 문사의 모욕적인 언사에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울고 싶은데 뺨을 때리는 격으로 절묘하게 치고 들어온 비아냥거림이 아닌가.
쾅!
그는 탁자를 내리친 후 몸을 일으켰다.
“닥쳐라! 세가의 문사라는 작자들이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뒷방 늙은이처럼 보신만 꿈꾸고 있으니 황보세가의 미래가 훤히 보이는구나. 아니! 이미 보였나? 황보세가는 졌다. 망했어. 오늘 가주와 소가주의 몰골을 떠올려보시오. 그리고 내게 다시 한 번 지금까지 했던 말을 반복하시오. 눈동자가 떨리지 않고, 표정의 변화없이 모든 말을 반복할 수 있다면 내가 들어드리리다.”
문사들은 사마의의 갑작스런 일갈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부터 귓구멍을 열고 잘 들으시오. 경망스러운 자가 빙빙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얘기해주겠소이다. 주군은 주군께서 원하시는 모든 걸 얻을 수 있소. 이것이 황보세가의 현 주소요. 뭐라고? 오대원로?”
사마의는 박장대소하며 외쳤다.
“근래에 들은 개소리 중에서 가장 우스운 말이로구나. 황보관이 가주 자리를 지키고, 황보장천에서 세가를 물려주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이더냐? 바로 직계이면서 힘을 지닌 원로를 북방으로 밀어내지 않았던가. 하북은 황실의 힘이 미치는 지역이다. 그러니 하북과 산동의 경계는 강호인마저 꺼려하는 지역이지. 잘 짖는 개를 가져다놔도 평화로운 장소란 말이다. 그런 곳에 원로들을 보내놓고, 세가에서 후계자를 키우던 것이 황보관이다. 한데 지금 내게 오대원로로 협박을 해? 지금 보니 너희들은 무능력한 것이 아니라 사리분별 자체를 못하는 자들이로구나.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밥버러지에 똥 덩어리다. 오냐! 걱정 마라. 황보세가에서 너희들만은 건드리지 않으마. 너희들은 지금처럼 세가를 좀 먹는 것으로 임무를 다하라! 알겠느냐? 이 머저리들아! 그리고 사마 군사 아니야. 사 군사다. 사! 사! 사 군사!”
문사들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치욕스러운 상황에 입만 벙긋거렸다.
“학문을 익히는 자로서 말이 너무 험하지 않은가? 저자의 왈패처럼 뭐하는 겐가?”
수장이 호통을 쳤지만, 사마의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는 상황이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하시네. 좋소. 왈패는 이만 물러가겠소. 하나 내가 돌아가면 주군께서 직접 오실 거요. 감당할 수 있겠소?”
노기를 드러냈던 수장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얼굴만 붉혔다. 저들은 지금껏 잊고 있었던 강호의 원칙을 떠올렸으리라.
강자존(强者存).
제아무리 정파와 사마외도로 나뉘었다고 해도 강호의 근본은 강자존이다. 강자가 하는 말은 절대적인 힘을 지녔다. 그리고 저들은 지금껏 산동성에서 무소불위를 자랑했던 황보세가를 뒷배로 했기에 난관을 겪지 못했다.
한데 더 큰 뒷배를 지닌 자를 만나고서야 원칙을 떠올린 게다. 지난 수십 년 간의 평화에 젖은 건 비단 무인만의 상황이 아니었다.
“그, 그.”
그나마 눈치가 빠른 문사는 사마의의 소매를 슬쩍 잡아당겼다.
“군사의 뜻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그저 오늘의 일이 너무나 갑작스럽다보니 서로 생각하는 바가 달랐던 게지요.”
사마의는 못이기는 척 착석했다.
“크흠.”
“어차피 황보세가와 끝을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서로의 조건을 맞춰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들이 언제 칼로 싸우던가요?”
문사는 너스레를 떨며 자신의 입술을 내밀었다.
“이걸로 한 번 조건을 따져보시지요.”
사마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품에서 황보세가의 구조도를 꺼내며 말했다.
“좋소. 일단 배문각과 전당각의 양곡과 재화는 받아야겠소. 이 정도는 가지고 돌아가야 나도 주군께 면목이 서지 않겠소이까.”
배문각은 황보세가에서 두 번째로 큰 식량창고다. 그리고 배문각과 인접한 전당각 또한 외원의 살림을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 창고 중 하나였다.
“싫으면 말고.”
사마의의 말에 문사들은 침음을 흘렸다.
말로 싸우더라도 칼을 지닌 자가 있으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걸 뒤늦게 깨우친 게다. 남천휘가 승리한 이상 실무자에 불과한 저들이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좋소.”
수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마의와 문사들은 몇 가지 조건을 정했다.
그러고 나니 비처에 모인 이들의 표정이 모두 밝다.
‘그래, 세가가 망할 판국이었다. 이 정도면 잘 막았어. 최소한 무공을 빼앗기거나, 무인들을 내놓지는 않아도 되잖아.’
‘역시 근본이 없는 자라 그런 것인가? 시야가 좁군. 그나마 다행이야.’
사마의는 손을 모았다.
“좋은 대화였습니다.”
문사들은 일제히 일어나 공수했다.
“배려에 감사합니다.”
호구가 알아서 물러간다니 열 번이라도 할 수 있는 인사였다.
한데 사마의가 문을 닫기 전 말했다.
“그럼 저녁에 봅시다.”
쾅!
문사들은 눈을 끔뻑이며 서로를 바라봤다.
“저게 무슨 말이야?”
그 때 눈치가 빨랐던 문사 한 명이 사마의가 놓고 간 구조도를 펼쳤다.
“허어!”
“왜 그러는가?”
“이거 보십시오. 내원과 외원을 여덟 곳으로 분류해놓았습니다.”
문사들은 구조도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배문각과 전당각이 그려진 지도 위로 숫자 일이 적혀 있었다.
“그럼 일곱 번을 더······.”
누구도 빼앗겨야 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
사마의는 황보세가에 가졌던 묵은 원한을 해소한 듯보였다. 하나 남천휘를 마주했을 때에는 사적인 감정을 보이지 않았다.
“주군.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군사가 정리해서 보고를 해야지.”
사마의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상관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마냥 힘으로만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었어. 역시 제왕학의 기본을 따르시는구나.’
남천휘는 사마의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일단 저지르기는 했는데 이걸 어쩔까?’
이 생각은 청하오검은 다과를 나누면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지금껏 서산노옹이나 혈검살의를 포섭할 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초빙을 했다. 청하오검과 같은 고수들이 곡부남가에 머무른다면 어지간한 도적놈들은 얼씬도 못할 터였다.
청하오검은 흔쾌히 수락했다.
술을 몇 잔만 더 마시면 나이를 초월하여 형제의 연이라도 맺을 것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한데 한 가지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무슨 자격으로 초빙을 해야 하는 걸까?’
청하오검은 지금까지의 명사들과 달리 명확한 소속이 존재했다. 오대세가에는 속하지 못하지만, 새외의 북쪽에서는 손꼽히는 명가인 모용세가 출신이다.
그러니 몸을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남천휘가 사적으로 초대하는 것과 곡부남가의 이름으로 초대하는 것이 달랐고, 산동의 패주가 된 용린협의 이름으로 초빙하는 건 더더욱 그러했다.
‘산동에서 더 이상 나한테 반기를 들 자는 없을 텐데······.’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그 때 사마의가 생각을 끝내고 말했다.
“일단 황보세가의 처우부터 결정해주시지요. 주군께서 가주와 소가주를 무력화한 것은 세가의 무인들을 꺾은 것보다 여파가 큽니다.”
“복수는 못할 텐데.”
남천휘로서는 힘의 차이를 보였기에 그럴 것이라 믿었다. 한데 사마의는 남천휘의 간단한 속내를 달리 해석했다.
“역시 주군께서도 알고 계셨군요. 황보관에 의해 변경으로 쫓겨난 오대원로가 있는 이상 세가는 쉽게 칼을 들 수 없습니다. 원로라는 늑대들이 상처 입은 호랑이를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으니까요. 제가 판단한 황보관은 처세에 능하고, 욕심이 많은 자입니다. 분명 정신을 차리면 원로들을 억누르려고 하겠지요. 그리고 그걸 위해 주군의 힘을 빌리려 할 겁니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그랬어?’
사마의는 남천휘의 표정을 보고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설마 제가 주군께서 황보관의 칼이 되어 움직이시라고 권하겠습니까? 주군께서 예상하셨다시피 황보관의 힘이 약해진 이상 원로들과의 관계는 백중세입니다. 주군께서는 마음에 드는 쪽의 손만 들어주셔도 충분할 겁니다. 그렇기에 주군께 여쭈려 합니다.”
갑자기 진지하게 왜 이래?
그냥 뒀다가는 천하정복이라도 권할 기세가 아닌가.
“말해봐.”
“주군께서는 패도와 정도 중 어느 쪽을 걷고자 하십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혓바닥이 긴 걸까.
남천휘는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다. 나는 무적자다! 적이 없으니 어디든 갈 수 있고, 어디와도 어울릴 수 있다. 내가 가는 길이 곧 내 길이다.”
사마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더니 갑자기 넙죽 엎드리는 것이 아닌가.
“대단하십니다! 장수가 정벌을 논하고, 군주가 통일을 내세울 때보다 훨씬 더 대단합니다. 주군께서는 공맹의 도리로 정해진 길이 아닌 스스로 쟁취하신 길을 걷고자 하시는군요.”
어, 그래. 그런 가봐.
사마의는 한 숨을 내쉬었다.
“후우, 부끄럽습니다. 저는 패도를 선택하면 힘을 빨리 기를 수 있지만, 적을 늘리게 된다. 반면 정도를 선택하면 잠시 통쾌함은 없을지언정 안정적으로 세력을 넓힐 수 있다고 봤습니다. 한데 주군께서 무적을 천명하셨으니 저 또한 근본 없는 계책을 고하고자 합니다.”
남천휘의 눈동자가 슬쩍 허공을 향했다.
‘야! 무적자보고 근본이 없단다. 기분이 어때? 근본 없는 재이야.’
◎ ‘특급강호인승급체계’는 천재라고 추앙받는 이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지고의 원리입니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지금 사마의가 천재라고 한 거냐? 네가 인정을 했을 정도면 진짜 대단한 사람이겠네. 그런 사람을 내가 얻었구나. 후훗, 황보세가보다 이쪽이 더 횡재였구나. 그나저나 너는 업데이트를 한 후부터 조금씩 감정을 보이는구나. 좋았어. 점점 네가 더 가깝게 여겨지는구나. 앞으로도 잦은 실수 부탁한다.’
재이는 남천휘의 장난기 섞인 말에도 대꾸하지 못했다. 무료로 정보를 전한 것에 대한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말이다.
◎ VIP등급으로 인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결국 포인트를 소모해서 등급을 올리라는 재촉이 아닌가.
‘클클, 기다려봐. 내일 날이 밝으면 황보세가의 성소를 찾아낼 거다. 그리고 성소를 얻어서 황보세가 전체를 먹으면 숨겨진 보물도 얻고, 포인트도 잔뜩 모을 수 있겠지.’
그러던 중 사마의의 한 마디가 그를 현실로 불러냈다.
“하여 주군께 제의합니다.”
사마의는 눈을 빛내며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무적자인 주군과 어울리는 무적집단을 만드시지요.”
무적(無敵)이 아니라 무적(無籍)인데.
‘설마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니지?’
하나 남천휘의 생각과 달리 사마의는 잘못 알고 있지 않았다.
“충성, 이권, 원한. 뭐든 좋습니다. 각자의 신념을 지닌 자들을 품에 안으시고, 종횡강호하는 조직을 만드소서!”
누가 쫓아오냐?
갑자기 왜 이렇게 판을 크게 벌리는 건데.
남천휘가 눈을 끔뻑이는 사이 사마의의 열정 가득한 한 마디가 꽂혔다.
“현월회의 주인이 되소서!”
허, 추진력 보소.
벌써 네 마음대로 이름까지 정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