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산동성의 주인이 정해졌다. (3)
검과 도가 충돌할 때마다 불똥이 튀었다.
한데 어우러지는 모양새가 괴이했다.
공방의 맞물림은 절묘함을 넘어 마치 대련처럼 보였다.
대련으로 보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양측의 표정이 극명하게 갈렸다.
한쪽은 시간이 흐를수록 여유로웠고, 다른 한쪽은 다급함이 가득했다.
“내뻗을 때는 올곧게! 거둬들일 때에는 삼 푼의 힘으로 비틀면서!”
남천휘의 외침에 황보황은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현기증을 느꼈다. 게다가 연이어 듣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아니야! 아니야! 도를 놓칠 셈이오? 그게 아니라면 알맞은 힘의 분배는 필수!”
“놈! 닥쳐라!”
황보황은 이를 악 물고 유엽도를 꽂아넣었다.
쇄애액!
공간을 가른 유엽도를 거둘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힘을 줄였다. 한데 그것만으로도 평소보다 유엽도의 움직임이 가벼웠다. 여력이 충분했기에 재차 도를 찔러 넣었다.
그 순간 남천휘의 일갈이 울렸다.
“손목을 감방으로 비틀면서!”
황보황은 자신도 모르게 감방(坎方)으로 손목을 비틀었다. 그 순간 초식의 투로가 두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나는 것이 아닌가.
‘엇! 이럴 수가!’
뇌전진천도의 막혔던 구결이 저절로 해석됐다.
자신에게 도법을 가르쳐준 아비도 알지 못했던 것을 남천휘가 어찌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지! 좋군. 좋아!”
남천휘는 진심으로 기쁜 것처럼 외쳤다.
그리고는 능수능란하게 유엽도를 받아넘기는 것이 아닌가. 이건 누가 봐도 생사를 건 혈투처럼 보이지 않았다.
“크흑! 닥쳐라!”
황보황의 짜증 섞인 외침이다.
그의 안색은 온 몸의 피가 머리에 쏠린 것처럼 새빨갛다. 그러나 살기 가득한 눈빛과 달리 비굴한 몸뚱이는 남천휘의 말을 따라 움직였다. 말만 들어도 성취가 올라가는 기현상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다.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어째서 남 소협의 무공을 황보세가에서 쓰는 거지?”
청하오검에서 시작된 의문은 서서히 퍼져나갔다.
외원을 포위하고 있던 오대(五隊)의 무인들을 비롯해, 쾌활십이장조차 눈을 끔뻑였다.
그럴 만도 하다.
남천휘가 VR에서 봤던 황보세가의 조상은 칠야와 창월을 소중히 여겼다. 백파도 남추의 도법을 경외했기에 부러진 도마저 주워왔던 것이다. 그렇게 소중한 것을 아무에게나 가르쳤을 리 만무했다.
가문의 비전처럼 직계에게만 전했겠지.
반면 백파도 남추는 비천무상도의 기본 무리만 떼내어 남겼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껍데기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만큼 삼류 도법이었다.
‘아! 내가 말하고도 창피하네.’
중양칠도를 대성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날뛰었다. 특히 마지막 절초인 칠도격을 완성했을 때 환호성을 내지르지 않았던가.
이게 다 할아버지 탓이다.
‘그렇게 못된 할아버지를 챙기는 건 나뿐이니······.’
완전 효자인 듯.
어찌됐든 분위기는 충분히 무르익었다.
남천휘는 처음보다 훨씬 강렬해진 황보황의 유엽도를 연이어 쳐냈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휘두른 탓에 황보황은 비틀거리며 네 걸음이나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그가 재차 자세를 취하기 전 세인의 이목을 끄는 일갈이 터져나왔다.
“그런데 황보 장로는 어떻게 본가의 도법을 익힌 건가?‘
어불성설이란 이런 경우일까.
불과 반 년 전만 해도 곡부남가는 곡부 남부에서나 유명했다. 심지어 무위가 아니라 인심으로 신망을 얻었을 뿐이다.
한데 그런 곳의 막내 아들이 오대세가에 속하는 황보세가를 향해 준엄함 일갈을 날렸다. 그것도 무공을 도둑질한 파렴치한 문파 취급을 하면서 말이다.
“그러게 말이야. 도대체 어찌 된 일이지?”
청하오검은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분노해야 할 황보세가의 무인들조차 가주와 황보황을 번갈아봤다.
“너, 너, 너.”
황보황으로서는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울화는 치미는데 반박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가주가 나서야 했다.
“네 이 놈! 어디서 본가의 도법을 의심해! 네 놈이 어깨 너머로 훔쳐배운 것은 아니고?”
남천휘는 대꾸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그런 분위기가 있다.
바로 지금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당금의 강호는 수십 년 간 평화로웠다. 몇몇 산적과 길 잃은 사마외도의 잡졸이 아니라면 후기지수들은 명성을 쌓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안정된 세월이었다. 그러니 뇌전진천도를 어디서 펼쳤으며, 어린 남천휘가 어디서 훔쳐 배울 수 있었겠는가.
무엇보다 남천휘와 황보황의 대결 자체가 답이었다.
청하오검의 수장인 모용청이 침음을 내뱉은 후 질문했다.
“가주. 아무리 봐도 황보 장로보다 남 소협의 성취가 높은 듯하오.”
다른 소리 말고 변명이라도 하라는 뜻이다.
남천휘는 모용청을 돌아보며 슬쩍 목례를 했다.
아이고, 어쩌면 저리 기특한 말만 골라서 하실까.
노인공경에 대한 욕구가 무럭무럭 샘솟는 순간이었다.
반면 황보관에게는 치욕스런 상황이다.
“그게 무슨 소리요? 본가의 뇌전진천도는 강호의 일절이외다. 저 놈이 한 짓은 흉내내기에 불과하오. 황보 장로의 성취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외다. 안 그런가?”
마지막 질문은 황보황을 향했다.
황보황은 얼굴을 붉혔다.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도 수치스럽거늘 자신의 부족함을 자인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하나 가주의 명령은 지엄했다.
“그, 그렇습니다.”
개미가 기어들어가도 저 소리보다는 시끄럽겠다.
‘에잇! 저 멍청한 놈.’
황보관으로서는 귓가에 앉은 딱지를 떼어 내려다 안쪽으로 파고든 것처럼 짜증이 치밀 터였다.
자! 그럼 이제 슬슬 마무리 준비하시고!
변설의 활용으로 거짓말도 진짜처럼 보이게 만들 자신이 있다. 한데 이번 일은 진짜를 진짜로 증명하는 손쉬운 일이 아니던가. 칼자루를 쥔 것은 물론이고, 상대는 사지가 결박된 상태였다.
“황보세가의 가주께 묻겠소.”
일단 예의는 좀 차려주시고.
트집거리는 애초부터 제거하는 편이 좋다.
“닥쳐라! 이 놈. 어디서 사술을 배워 와서 본가를 능욕하려 하느냐?”
남천휘는 헛웃음을 지었다.
정파의 가주 정도 되면 단체로 학관에 등록해야 하는 법이라도 있는 걸까. 어째서 본인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첫 반응은 늘 사술인지 모르겠다.
쯧쯧, 진짜 사술이 뭔지나 알고 있는지.
‘그냥 확! 눈 덮인 가지에 꽃이라도 피게 해줘야 정신을 차리려나?’
그래도 오늘은 사술보다 진실로 승부한다.
“본가의 비천무상도를 사술이라고 칭하다니. 하면 사술에 미치지 못하는 뇌전진천도는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할 말이 없겠지.
황보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하는 사이 잽싸게 말을 덧붙였다.
“곡부남가의 시조인 백파도 남추 대협은 신마대전 당시 정천칠공을 도운 영웅이셨소!”
산적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 정도 강했으면 겉으로는 대협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싶다. 심지어 녹림채 중 관부도 꺼려하는 곳의 채주들은 대왕이라고 부르지 않던가.
그렇다고 산적 출신이라는 걸 인정하는 건 아니다.
“크하하하! 백파도? 남추? 대협이라 칭할 정도면 내가 알아야 할 터, 한데 내 견식이 부족한 건가? 아님 네 허풍이 심한 게냐?”
이럴 때를 대비해서 인맥이 필요한 게다.
“제룡장주! 천응검후! 무진철원주께서도 백파도를 추억하셨소!”
황보관은 예기치 못한 명사를 거론하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설마 내가 그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요.”
“흥! 뭔가 잘 못 알았겠지.”
“당신이야 말로 잘못 알았습니다. 용봉쟁투 당시 부상으로 내세웠던 기보를 기억하시오?”
남천휘의 일갈에 황보관은 코웃음을 쳤다.
“후훗, 부러진 칼을 줬다고 원망이라도 하려는 게냐?”
“그렇지 않소! 그것이야 말로 백파도께서 강호를 종횡하실 때 독문병기로 삼았던 창월과 칠야였소. 그리고 그것은 무진철원주의 도움을 받아 수리에 성공했소이다!”
강 건너 불구경만큼이나 시선을 사로잡기 좋은 것이 보물 구경이다.
촹!
용린쌍도를 꺼내는 순간 도명이 울렸다.
남천휘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바닥에 깊숙이 묻혀 있던 청석이 튕기듯 솟아올랐다. 범인이 선보일 수 없는 정순한 내력에 고명한 심법을 익혔을 때에나 가능한 신위였다.
“대단하군!”
청하오검의 추임새를 양념삼아 칼을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르는 순간 손가락 마디만큼 두툼한 청석이 반으로 잘렸다. 그리고 반대편 흑린도를 휘두르는 순간 두 개는 네 개가 되어 연무장 위를 나뒹굴었다. 땅에 떨어지며 흙먼지를 일으키니 청석에는 문제가 없음이 증명됐다.
“허허! 저런 보도가 있다니.”
“강호오대기검에 더해 일도오검이라 해야겠군요.”
할아버지들, 추임새가 너무 심한데.
황보관의 시뻘건 얼굴 사이로 묘한 눈빛이 흘러나왔다. 비록 외형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매일 같이 끼고 살았던 병장기가 아니던가.
고철 덩어리가 보도로 변했으니 탐욕스런 눈빛을 내비치는 건 당연했다.
“흥! 설령 그 보도가 그렇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느냐? 보도에 무공의 구결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지 않더냐.”
그럴 것이다.
황보관의 조상은 백파도 남추의 시동을 자처하며 쫓아다니지 않았던가. 어깨 너머로 몇 수 배운 것을 입맛대로 해석한 후 남겼겠지.
“본 가의 비천무상도는 백파도께서 남기셨소. 하면 뇌전진천도의 연원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구결을 묻는 것도 아니고 단지 창안자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이것만 해도 평소였다면 충분한 시빗거리였으리라. 하나 황보관이 이것마저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스스로 궁지에 몰리는 형국일 터였다.
“흥! 본가의 뇌전진천도는 황보 소에 우자를 쓰시던 조상께서 이름 모를 고인과 교분을 나눈 후······.”
“그게 백 년 전이었을 테고.”
황보관이 흠칫했다.
“그분과 헤어진 후 눈 덮인 산을 헤매다가······.”
“절벽까지 내려갔겠지.”
남천휘의 추임새에 황보관은 눈을 부릅떴다.
“너, 너.”
“그리고 거기서 부러진 도를 얻지 않았던가? 본가의 선조께서 강호의 덧없음을 설파한 후 스스로 부러트린 도를 욕심냈기에 죽음을 무릅쓰고 눈 덮인 절벽을 기어 내려간 것이잖소!”
황보관은 황망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실기를 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VR로 봤지만, 자연스럽게 허풍을 더해서.
“백파도께서는 황보소우를 좋게 보셨소. 그러니까 몇 년 동안 데리고 다녔겠지. 하나 그의 눈에 담긴 탐욕을 알아차리시고, 몰래 지켜보셨소. 그가 만약 백파도의 뜻을 알아주었다면 차후에 나머지 구결을 전했을 게요. 하나 그는 보도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했고, 백파도께서는 그것을 안타까워하시며 돌아오셨소. 본가에 전해지는 일지에 소상히 적혀 있소이다. 다만 황보소우의 명예를 위해 이름은 거론하지 않으셨지. 한데 작금에 이르러 당신들의 작태를 보아하니 하늘에 계실 백파도께서 반쪽이나마 전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실 것이 분명하오!”
하아, 지금 엄청 대협 같았다.
그 증거로 재이가 찬양의 한 마디를 울렸다.
◎ 변설의 등급이 극에 달했습니다.
- B급 특기와 합성하여 상위 특기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황보관은 눈 뜨고 코 베인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홉의 거짓에 하나의 진실을 섞어도 위력이 대단하지 않던가. 한데 이번에는 여덟의 진실에 두 개의 거짓을 섞었다.
그러니 황보관으로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아비가 궁지에 몰리니 자식이 나섰다.
한참 부족한 자식이 나선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했더니 더 유리해졌다.
“닥쳐! 이 새끼야. 그렇게 대단한 도법을 왜 지금까지 숨기고 있었냐? 어디선가 주워듣고 본가를 능욕하려는 게 아니더냐?”
잘한다! 황보장천!
열 대 때릴 걸 아홉 대로 줄여주마.
남천휘는 속내와 달리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백파도께서 강호에 뜻을 두지 않으셨거늘 후손인 내가 함부로 무공을 드러낼 수 있겠느냐. 본가는 선조의 뜻을 따라 만민을 널리 이로울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돈을 벌어 난민을 구하고, 유민을 정착시켰다. 오죽했으면 내 형들의 이름을 홍익에서 따왔겠느냐.”
진심 어린 표정에 청하오검은 연방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러다가 남천휘 추종대라도 만들어서 가입하실 것처럼 감정에 동조한 상태였다.
“하나! 당금 강호는 오랜 평화를 지켜내는 대신 안주하여 썩어가는 것을 택했다. 신공부는 유가의 교리를 뒤로 한 채 명성을 탐했고, 청도문은 약자를 등쳐 탐욕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한데 믿었던 황보세가마저 혼란한 와중에 이권을 노리고 있으니 어찌 도를 들고 나서지 않을 수가 있으랴!”
크하! 배경음악으로 남아당자강 좀 깔아주라.
이 정도면 거의 제갈량의 출사표 급 아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