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17화 (217/305)

96, 오! 나의 주인님. (2)

학사는 웃었다.

사내의 입담은 나쁘지 않았고, 음식은 좋았다.

그리고 술은 최고였다.

두 사람은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저녁을 보냈다. 그리고 숙소로 향하던 중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되었다.

“형장, 오늘 즐거웠습니다.”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으니 제 쪽에서 할 말이지요.”

사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인연이 되어 만나게 된다면 학사께서 한 턱 내시오.”

누가 봐도 평범한 인사치레였다.

한데 학사는 난색을 표했다.

“글쎄요. 그 때 제가 그럴 능력이 있을까 모르겠군요. 제 신세가 어디 하루아침에 달라지겠습니까.”

농담이 진담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사내는 묘한 눈초리로 대꾸했다.

“좋소. 그럼 다음에도 내가 사겠소. 인연이 닿는다면.”

그제야 학사도 빙긋 웃었다.

“인연이 닿는다면.”

학사는 쫓기는 사람처럼 이른 아침에 객잔을 나섰다. 낭인에게 목적지가 있을 리 없으니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 날 밤 인연이 참 빨리도 닿았다.

학사가 간이 주루에 자리를 잡는 순간 천막이 걷히며 사내가 들어섰다.

그도 웃었고, 사내도 헛웃음을 흘렸다.

“인연이로군요.”

사내는 말했다.

“합석?”

“약속이니까요.”

“그럼 내가 사야겠군.”

두 사람이 마주한 것과 수많은 요리는 어제와 같다.

그저 자리만 달라졌을 뿐이다.

그리고 어제와 같은 담소가 이어졌다.

화제를 가리지 않고 온갖 대화가 이어질 때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두 사람은 해박한 것은 기본이고, 모르는 것을 인정하는 여유까지 지녔다.

“이쪽은 포인트 소모 때문에 죽어나는데 학사께서는 여유롭군요.”

이처럼 간혹 영문 모를 소리를 할 때만 제외하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주엽문이라는 곳이 있었지요. 제법 큰 규모의 상단을 끼고 인근을 호령하던 문파였습니다. 그곳의 문주는 얼굴만 봐도 탐욕스러움이 느껴질 만큼 매섭게 생겼답니다.”

“그래요? 얼마나 못됐기에······.”

“잔소리가 극에 달했답니다. 그리고 누가 철전 한 개라도 훔쳐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요.”

“이런, 좀생이 같은 사람이군요.”

학사는 소리를 낮춰 웃었다.

“모두 그렇게 생각했지요. 한데 이 자의 사고는 범인과 달랐습니다. 낮에 게으름을 피우는 건 밤에 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밤에 더 푹 쉬게 해주자. 그렇다면 낮에 더 열심히 일하지 않겠는가? 하여 일하는 시간을 정한 후 그 외에는 자유롭게 두었지요.”

사내는 미간을 좁혔다.

“호오.”

“또한 집안이 평안하고, 가족이 배불리 먹는다면 일에만 집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여 집을 만들어주고, 음식을 내어줬답니다.”

“허어.”

“놀랍게도 그의 생각처럼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일터를 집처럼 여기며 매진했고, 그 결과 문주는 더 큰 부를 쌓았지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지요? 그는 수하들을 최대한 쥐어짰음에도 능률이 오르지 않자, 밖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공짜로 기본적인 무공을 가르쳤고, 무인으로서 본분을 지키게 했지요. 문파에 대한 칭송이 자자할수록 입문하는 제자의 숫자가 늘었습니다. 그는 탐욕스럽습니다. 하나 그가 아직도 좀생이처럼 여겨지십니까?”

사내는 박장대소를 했다.

“좀생이는 나였소. 사물의 겉만 보고 판단을 했으니 아직 수양이 부족하오. 사죄의 의미로 석 잔의 술을 마시겠소.”

그렇게 술을 마셨고, 학사는 목이 마르다며 잔을 기울였다. 술자리가 흥겹게 이어졌지만, 두 사람은 서로의 신상을 묻지 않았다.

마치 그러지 않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밤이 늦었군요.”

학사가 운을 떼는 순간 사내도 고개를 끄덕였다.

“즐거웠습니다.”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랬으니 내일도 인연이 이어지겠소?”

어제와 같았던 헤어짐에 작은 파장이 일었다.

학사는 사내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니 이미 공자와 저는 삼생의 연을 맺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렇게 되나요.”

학사는 공수를 하며 말을 이었다.

“삼생의 연답게 세 번의 만남이 이뤄진다면 제가 공자께 좋은 술을 사겠습니다.”

“좋군요.”

그렇게 두 번째 만남이 끝났다.

*

학사는 삼층 누각 앞에서 멈춰 섰다.

인근에서 가장 값 비싼 주루였다.

평소였다면 문전박대를 받았으리라.

하나 학사는 아끼는 책을 팔아 번 돈으로 새 옷을 마련했다.

신수가 훤해지니 점소이의 대접이 달라졌다.

“무엇을 드릴까요?”

“이 집에서 제일 비싼 술과 요리를 준비하게.”

점소이는 우물쭈물했다.

“비싼 술은 선금을 주셔야······.”

자칫 치도곤이라도 당할까 걱정하는 것이리라.

학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오게. 값은 그 때 치르지.”

잠시 후 붉은 종이로 밀봉한 항아리가 놓였다.

주인은 봉인을 뜯기 전 대금을 요구했다.

학사는 소매를 뒤적였다.

“어허, 돈이 없구나. 이거 큰 망신을 당하게 생겼군.”

주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돈이 없는 사람의 표정이 너무 느긋하지 않은가.

그 때 주렴이 걷히며 사내가 등장했다.

“엇!”

그러자 학사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공자, 다시 만났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합석?”

“삼생의 연이라면 말은 필요치 않겠지요.”

사내는 폭소를 터트리며 학사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오늘은 가장 비싼 술을 얻어먹을 수 있는 건가요?”

“약속은 지키겠습니다.”

“좋군요!”

객잔의 주인은 항아리를 슬쩍 당기며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아직 셈을 치르지 않으셨는데요.”

사내는 학사를 바라봤다.

학사는 사내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빙긋 웃었다.

“약속은 지킵니다.”

사내는 머뭇거림 없이 품에서 금원보를 내려놓았다.

“오늘 좋은 술을 얻어먹을 수 있겠군요.”

주인은 소매로 금원보를 쓸어 담으면서도 미심쩍은 눈빛을 지우지 못했다.

‘멀쩡한 사내 두 놈이 백주대낮에 뭐하는 짓이지?’

타인의 돈으로 술을 사야 하는 상황이 즐거웠다.

자신의 돈으로 술을 얻어 마셔도 즐거웠다.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나눴다.

“주향이 좋군요.”

사내의 말에 학사는 빙긋 웃었다.

“근방에서 가장 좋은 술입니다. 어렵게 골랐지요.”

“형장의 안목을 알 수 있는 좋은 술입니다. 오늘 이렇게 좋은 술을 대접받으니 앞으로 좋은 일이라도 생기려나봅니다.”

그 때 안주를 내오던 주인이 참다못해 한숨을 흘렸다.

“후우, 답답해서 못 참겠네. 내가 이 안주를 그냥 드릴 터이니 도대체 뭐하는 짓거리인지 이야기 좀 해주시오. 경극이라도 하는 게요? 아니면 사기를 치기 위해 말을 맞추는 거요?”

사내는 술잔을 들어 학사에게 예를 표했다.

“저 분이 이 술을 사셨소.”

“하나 공자께서 돈을 내셨지 않소?”

학사는 사내가 술을 들이키자, 뒤이어 술잔을 들어올렸다.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저 분이 나를 사셨소.”

주인은 영문 모를 소리에 한 숨만 연거푸 내쉬다가 계산대로 향했다. 그리고 술 취한 놈들의 말에는 호기심을 보이지 말라는 격언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사고나 치지 말고 가라. 이 놈들아.’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사내의 말에 학사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처음부터 알았습니다. 저를 사려 하신다는 것을요.”

“초빙이라는 좋은 단어도 있지 않습니까?”

“세 번이나 찾아와주셨으니 삼고초려가 부럽지 않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용건을 말씀하셨어도 통했을 테지만요.”

사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누군지 아시는군요.”

학사는 대답 대신 사내의 술잔을 가리켰다.

“저는 이미 주인이 예약된 몸입니다. 그러니 제 재주는 주인의 허락 없이 펼쳐 보일 수가 없지요.”

사내는 술잔을 내려다봤다.

값 비싼 술병에서 따라낸 마지막 잔이다.

그는 술잔을 꺾은 후 침음을 흘리는 대신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당신은 제 것입니다.”

그러자 학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손을 모으자, 흰 비단 옷이 살랑거렸다.

공수를 한 두 손이 눈썹까지 올라왔고, 한 쪽 무릎을 살짝 꿇은 상태로 담담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비신(卑臣) 사마의가 용린협 남 대협께 인사드립니다. 부족한 재주나마 용력을 다해 주군의 포부를 이루는 초석이 되겠나이다.”

먹물의 양을 자랑하듯 미사여구가 쏟아졌다.

사마의의 말처럼 공자의 정체는 남천휘가 맞다.

그는 낯선 예법에 뒤통수를 긁적였다.

‘내가 손을 잡아서 일으켜줘야 하나? 아니면 헛기침을 해야 하나?’

지금껏 사내들의 땀과 우정으로 관계를 지속시키지 않았던가. 때로는 독소조항이 잔뜩 들어있는 계약서로 묶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나 학사를 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게 다 개구리 때문이야.’

소혜의 하소연 때문에 군사를 찾기 시작했다.

한데 하늘이 점지한 것처럼 황보세가의 영역 근처에서 재야인사가 등록된 것이다.

남천휘는 당시 재야인사의 능력을 확인하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지금도 사마의 능력 수치는 눈에 선했다.

이름 : 사마의

- 거리 : 38691m

- 성장이 진행 중입니다.(만능 형)

- 지식 8, 야망 7, 충성 9, 신산 8.

- 황보세가에서 축출된 후 실의에 빠졌습니다.

-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저렴한 가격에 등용이 가능합니다.

저런 건 인재라고 하면 안 되는 게다.

잠룡(潛龍)이다.

아니, 여의주라고 하자.

그것도 주인 없는 여의주(如意珠)였다.

지식 8의 위용도 놀라웠지만, 신산 8을 보는 순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천휘가 지금껏 보았던 재야인사 중에서 신산의 수치가 가장 높았던 사람은 6이었다. 그것도 제갈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기제일가(神機第一家)라 불리는 제갈세가의 핏줄일 터였다.

한데 사마의는 제갈세가가 아님에도 신산 8에 이르렀다.

이 놈도 천재다.

신산(神算)은 곧 귀계(鬼計)를 뜻했다.

머릿속에 품은 지식을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펼쳐내는 신기한 계략이었다. 강호방파의 머리를 담당하려는 필수인 능력치였다.

실제로 소혜는 지혜로웠지만, 귀계에 뜻이 없었다.

그렇기에 군사의 자리를 벅차했다.

한데 사마의는 군사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그러니 격에 맞게 대우해주고 싶었다.

‘아! 남위기로 검색해야지.’

지난 밤 사마의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건 화제마다 포인트를 소모하여 검색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닌가.

잠시 후 남천휘는 손바닥을 보인 채 사마의의 팔목 부근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사마의가 몸을 일으키며 웃었다.

“역시 놀랍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저는 사실 예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았다.

신산이 높은 자는 예법이나 도의에 얽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사마의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주군 역시 예법에 뜻이 없으시지요. 한데 제 억지에 맞춰주셨으니 참으로 놀라운 재주를 지니셨습니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예의범절을 갖춘 것이 아니라 놀라운 재주를 지녔단다. 마치 자신이 모르던 것을 금세 깨우쳤다고 여기는 듯하지 않은가.

“나에 대해서 많이 아는군요.”

사마의는 이번에도 대답 대신 찻잔에 새끼손가락을 담갔다. 그러더니 탁자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대충 휘적거리는 듯 했으나, 완성된 그림은 범상치 않았다.

“나네.”

“저는 황보세가의 미관말직도 아닌 허드렛일을 담당했습니다. 출세를 하고 싶었기에 중요한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신공부가 무너졌을 때였습니다. 제가 책임자였다면 총력을 기울여 주군의 행적과 습성, 그리고 약점을 찾으려 했을 겁니다.”

그는 쓴웃음을 흘렸다.

“한데 누구도 주군을 신경쓰지 않더군요. 하여 저는 주군을 조사했습니다. 사재를 털어 주군의 모든 것을 알아내려 했지요. 주군과 한 번이라도 마주친 자가 있으면 누구라도 찾아가 용모파기를 받아냈습니다. 그렇게 수백 장의 용모파기가 모이니 주군의 진짜 얼굴이 나오더이다.”

남천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외모를 파악하기 위해 저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면, 다른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터였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 많은 일을 짧은 시간에 홀로 해냈다는 점이다.

내 사람이어서 마냥 기특하기만 했다.

“그렇군요. 그렇게 저를 잘 아신다니 하나 묻겠습니다. 제가 지금 가장 염려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황보세가겠지요.”

“어째서요?”

사마의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었다.

“주군은 병적일 만큼 가문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마치 사명이나 숙명이 있는 것처럼요.”

“제가 그랬나요?”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랬습니다. 그러니 지척에 위치한 황보세가가 마음에 걸리시는 건 당연합니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고 칩시다. 그럼 제 근심을 덜어낼 방법도 찾아내셨나요?”

사마의는 대답 대신 반문을 했다.

“먼저 여쭙겠습니다. 주군은 빨리 가는 길과 돌아서 가는 길 중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지름길은 위험할 것이고, 돌아가는 길은 안전하지 않겠는가.

남천휘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

하나 사마의와의 대화가 너무나 즐거웠다.

“뭐가 다릅니까?”

“지름길을 택하시면 술을 한 병 더 시킬 것이고, 돌아가는 길을 원하시면 장소를 옮길 겁니다.”

남천휘는 손을 들어 주인을 불렀다.

“같은 걸로 한 병 더.”

그리고 두 사람이 새로 뜯은 술을 두어 잔 정도 나눴을 때였다.

쾅!

황보소천이 주루의 문을 부수며 등장했다.

“너 이 새끼! 여기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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