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216화 (216/305)

96, 오! 나의 주인님.

95, 오! 나의 주인님.

강호칠대금문은 공공의 적이다.

그러니 봉황곡의 멸문을 두고 근심의 눈초리를 보낼 곳은 없을 터였다. 오히려 오랜 세월 고여 있던 강호에 신성이 등장한 것을 환영했다. 무림맹이 장로를 보내 축하하고, 남궁세가의 가주가 혼인을 생각할만큼 경사가 아닌가.

한데 정파에 속했으면서도 웃을 수 없는 방파가 존재했다.

황보세가(皇甫世家)였다.

삼정이라는 공고한 지배 세력으로 수십 년을 버텨왔다. 한데 하루아침에 삼정 중 두 곳이 사라졌고, 홀로 남은 셈이다.

어쩌면 황보세가가 꿈꾸던 세상이었으리라.

산동의 풍부한 물산을 홀로 독차지 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곡부남가만 없었다면.

아니, 남천휘가 없었다면 그들은 산동성 전체를 장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리라.

하나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남천휘가 산동을 일통했고, 곡부남가가 새로운 패주라는 소문이 무성했음에도 무거운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아니, 뗄 수 없었다.

황보세가의 가전 회의는 예전과 달리 소규모로 진행됐다. 가주와 원로, 그리고 허락받은 장로 몇 명과 직계가 전부였다.

“크흠.”

지난 한 해 동안 한 일이 없으니 할 말이 없고, 올 한 해 동안 할 것이 마땅치 않으니 계획조차 세우기 어려웠다.

결국 황보세가의 가주인 황보관은 근심 가득한 표정을 한 마디를 내뱉었다.

“당분간 자중하면서 강호정세를 지켜보세.”

새해의 첫 가전회의였음에도 배석한 자들의 표정을 보면 황보세가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황보관은 미간을 좁혔다.

‘이대로 끝내면 사기를 끌어올리기 쉽지 않아.’

세가의 지난 행적을 돌이켜보면 저들의 분위기는 당연했다. 용봉쟁투를 통해 삼정 중 으뜸이 되려 했던 계획은 초장부터 어그러졌다.

남천휘와 천수련 때문이다.

그러던 중 신공부주가 악도로 몰리며 정세가 뒤바뀌었다. 황보세가는 용봉쟁투의 실기를 만회하기 위해 무인들을 모았다. 삼정 중 한 곳의 주인을 바꾸는 일이라면 빨라도 반년은 걸릴 것이라 여겼다.

그렇기에 한 걸음 떨어져서 신공부를 지켜봤다.

한데 어느 날 아침 갑작스레 신공부의 주인이 바뀌어버린 게다.

황보세가는 닭 쫓던 개가 되었다.

원인을 따져보니 이 또한 남천휘가 원흉이더라.

그 즈음부터 황보세가는 거금을 투자하여 정보망을 일원화했다. 하오문과 긴밀하게 협조하던 중 덩어리가 큰 정보를 얻었다.

청도문이 비밀리에 독을 뿌린다는 정보였다.

하늘이 준 기회라 여기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기에 황보관은 청도문을 병탄하기 위해 소가주인 황보장천을 내세웠다. 연이어 실패한 소가주에게 다시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하나 그가 거지꼴이 되어 청도문에 도착했을 때 확인한 건 신공부의 깃발이 전부였다.

결국 남천휘 한 명에게 내내 휘둘린 꼴이다.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았어.’

그러던 중 차남인 황보소천이 눈에 들어왔다.

황보소천은 장남인 황보장천처럼 무골은 아니지만, 지금껏 별 다른 실패 없이 세가의 일을 처리해왔다.

‘그렇지. 그게 있었지.’

황보관은 헛기침을 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난 번 본가는 신공부가 봉문한 사이 천불산을 확보할 수 있었소.”

황보세가의 영역인 제남의 남쪽에 천불산이 있다. 곡부와 중간지대였던 천불산은 대대로 신공부의 영역이었다. 한데 그것을 황보세가의 품으로 끌어들였으니 쾌거라고 하기에 충분했다.

군사가 가주의 속내를 눈치채고, 맞장구를 쳤다.

“천불산은 인근에 위치한 중소방파만 해도 십여 곳이고, 객잔과 주루를 비롯한 상가의 보호비만 해도 수천 냥씩 걷히는 요처가 아닙니까. 한데 그것을 거론하시는 이유가 있는지요?”

가주는 군사에게 눈짓을 한 후 빙긋 웃으며 말했다.

“청도문의 일로 본가의 분위기가 가라앉았기에 딱히 알릴 방도가 없었소. 그 일을 도맡아한 것이 바로 소천이외다.”

원로와 장로들은 탄성을 흘렸다.

그들 역시 분위기의 전환이 필요함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소 과한 칭찬이 황보소천을 향해 쏟아졌다.

“당시 소천이 내게 말했소. 남천휘는 뒤를 돌아보는 성격이 아니니 신공부의 모든 것을 챙길 수 없다. 게다가 역마살이 낀 것처럼 한 시도 자리에 있지 않으니 곧 사달이 날 것이다. 그 때를 노린다면 천불산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 했소.”

“오오!”

장로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조금 전의 의례적인 감탄이 아니라 진심으로 놀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황보소천의 식견은 마치 남천휘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처럼 정확했기 때문이다.

‘쳇.’

오직 황보장천만이 쓸개를 씹은 것처럼 인상을 썼다. 지금껏 공고했던 후계자 자리가 흔들리는 것처럼 여겨졌으리라.

황보소천이 맞은편에 앉은 소가주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흥! 지금껏 몇 번이나 기회를 얻은 주제에.’

한껏 고조된 마음은 마치 소가주의 자리가 코앞까지 다가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기에 본래 하지 않으려 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

“세가원이 합심하여 효율적으로 움직였기에 가능했습니다. 모든 것은 세가의 저력 때문이지요. 저는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황보장천만 인상을 썼다.

마치 세가의 자원을 마음껏 가져다 쓴 자신을 비웃는 듯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이었겠지. 향후 네 입지를 조금은 넓혀주마. 그러니 본가를 위에 노력하라.”

황보소천은 가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대꾸했다.

“이 기회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이야기 해 보렴.”

“오늘 가전회의가 지지부진 했던 이유는 남천휘를 상대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저기서 불편함을 드러내듯 헛기침이 들려왔다.

하나 지금껏 세가의 작은 일을 맡아하던 황보소천은 그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다.

“적대하지 않고, 포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이미 남궁세가의 이검은 물론이고, 남궁소와도 교분을 맺었다고 합니다. 본가 또한 오대세가에 속하니 남궁세가에 이어 남천휘와 손을 잡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는 황보장천을 힐끔 쳐다본 후 입꼬리를 올렸다.

“구원은 잊고 새롭게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그 때 준엄한 일갈이 들려왔다.

“그만!”

황보소천은 눈을 끔뻑였다.

형이 아닌 아버지의 외침이었다.

‘왜?’

가주는 방금 전까지 보였던 따스한 눈빛을 거둔 채 침음을 흘렸다.

“크흠.”

군사가 눈치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슬슬 회의를 끝낼 시간입니다.”

“그리 하게.”

가주는 찬바람이 일정도로 재빨리 자리를 떴고, 장로들은 혀를 차며 황보소천을 흘겨봤다.

‘아니, 나한테 왜 이래?’

황보장천은 그를 지나치다가 멈칫했다.

잔뜩 일그러졌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으로 가득했다.

“고맙다. 운 좋게 무대에 올라오더니 알아서 퇴장해주는구나.”

“그, 그게 무슨 뜻이야?”

“본래 구파오가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 그러니 남궁세가는 곡부남가와 친하게 지내도 된다. 천 리 밖의 문파와 얼굴을 붉힐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우리는 아니지. 하나의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공존할 수는 없잖아. 설마 가주께서 수백 년 간 쌓아온 명성을 버려둔 채 남천휘에게 고개라도 조아릴 거라고 생각한 거냐?‘

황보소천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은 합리적이라고 내뱉은 말이 황보세가를 욕되게 하는 짓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게다.

황보장천은 동생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을 본 후 입꼬리를 올렸다.

“크큭, 시키는 일이나 잘해라. 괜히 오르지 못할 나무를 쳐다보지 말고. 크하하하!”

*

쫙! 쫙! 쫙!

따귀를 올려붙인 횟수만 십여 회다.

황보소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콧김을 뿜었다.

“빌어먹을! 네 놈 때문에 내가 무슨 개망신을 당했는 줄 아느냐?”

따귀를 맞은 학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게 순리입니다. 이미 남천휘는 만월이 될 것처럼 차오르는 상태입니다. 크헉!”

황보소천의 발길질에 학사가 나뒹굴었다.

“닥쳐! 이 새끼야. 너 같은 하급 학사의 말을 믿은 내가 어리석었다. 꺼져. 당분간 내 눈 앞에 보이지 마라!”

학사는 황보소천의 처소를 나서자마자 비틀거렸다.

그는 퉁퉁 부은 얼굴을 매만지는 대신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라도 올 것처럼 먹구름이 가득했다. 하나 반대편을 보면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가 아닌가.

‘자리를 잘못 잡아도 한참을 잘못 잡았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주변을 오가는 하인과 시비들의 수군거림으로 인해 뒤통수가 따가웠다.

누구도 그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직위는 매우 낮았고,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보세가의 군사는 직계에게 자신의 제자를 붙여놓았다. 그리고 군사의 제자는 각기 몇 명의 수하를 거느렸다.

학사는 그런 수하의 빈객이다.

아무도 의견을 내지 못할 때 천불산에 대한 계획을 세운 것이 그였다. 황보소천은 천불산을 얻었을 때만 해도 학사를 정식으로 고용할 것처럼 찬양했다.

하나 그것도 이제 끝이다.

‘황보소천은 아둔하고, 원한을 잊지 않으니 출세길은 막혔다고 봐도 무방하구나.’

그는 처소에 돌아오자마자, 짐을 챙겼다.

어차피 반 년 전만 해도 낭인처럼 떠돌지 않았던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기에 표정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하나 강호는 그리 녹록치 않았다.

황보세가는 강호의 방파이면서도 관부와 긴밀한 연을 맺었다. 관부의 힘과 강호의 힘을 적재적소에 사용했고, 넘칠 정도의 부를 쌓았다.

말단 학사였던 그에게 매일 같이 고기와 술이 하사됐을 정도였다.

“쩝.”

학사는 젓가락으로 볶은 소채를 뒤적거리며 혀를 찼다. 풀뿌리를 캐고, 이슬을 받아먹었던 시절이 꿈이었던 것처럼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그는 싸구려 백주가 담긴 잔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끄으으.”

뱃속은 불이 난 것처럼 요동을 쳤다.

그 때 점소이가 걸레로 탁자를 훔치는 척하며 물었다.

“죄송한데 합석을 해도 될까요?”

객잔에 자리가 부족하면 합석을 하는 건 특별할 것이 없다. 한데 객잔 내에는 빈자리가 드문드문 존재하지 않던가.

학사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점소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저쪽의 공자께서 합석을 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얼굴은 희고, 이목구비는 뚜렷하다.

악의는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좋은 옷을 입었고, 신발에는 먼지가 없으니 돈 많은 공자가 분명했다.

“좋소.”

학사는 상대가 맞은편에 앉자 물었다.

“어째서 많은 자리 중에 이곳을 택하셨소?”

공자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른 탁자에 앉은 자들은 그래도 사람의 음식을 먹고 있는데 학사께서만 똥을 씹는 것처럼 보여서요.”

학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비루함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는데 부끄럽군요.”

“하하! 사해는 동도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좋은 걸 나눠 봅시다. 제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돈이 좀 있거든요.”

잠시 후 공자는 재력을 자랑하듯 값 비싼 요리로 탁자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싸구려 백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향긋한 즉묵노주도 등장했다.

“하아, 두 사람이 먹기에는 과한데······.”

공자는 눈을 찡긋거렸다.

“제가 아는 분이 그러는데요. 맛있게 먹으면 배가 부르지 않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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