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호랑이는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85, 호랑이는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
하남성은 황하의 남쪽에 위치했다.
고도(古都) 낙양과 강호의 태산북두인 소림은 누대에 걸쳐 빛을 잃지 않았다. 특히 소림은 강호의 어떤 방파도 따를 수 없는 경외의 존재였다. 제아무리 화산의 검이 자유롭고, 무당의 검이 진중해도 소림의 이름값을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다.
한데 근래에 이르러 소림과 비견되는 곳이 있다.
하남성 남쪽에 위치한 대별산.
그곳에 무림맹(武林盟)이 있다.
구파를 기둥으로 삼고, 오가를 벽으로 세웠다.
그리고 천여 곳에 이르는 중견 방파가 추앙하는 조직이 바로 무림맹이다.
비경각은 무림맹 내원 중에서도 대별산 아래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장소였다. 몇 겹의 경계망을 지나서야 발을 들일 수 있는 비경각에 인중용(人中龍)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외원의 책임자인 당주와 대주들이 한 자리씩 차지했다.
상석에는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 같이 위태로운 의자가 놓여 있을 뿐이다.
초로의 노인이 엉덩이를 붙이며 정례회의 시작을 알렸다.
“모두 살아서 보니 좋구려.”
당주와 대주들은 일제히 손을 모았다.
“올해도 군사의 무사강녕을 기원합니다.”
그렇다.
방금 전까지 밭이라도 갈고 온 것처럼 추레한 몰골의 노인이 바로 무림맹의 군사였다.
광목진인(廣目眞人).
무당파 장문인의 사형인 그가 군사의 역할을 다한 세월만 벌써 삼십 년이다. 그러니 외원에서 떵떵거리는 당주와 대주라고 해도 경외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클클, 갈 때가 되면 가는 게지. 시작하게.”
광목진인의 말에 우측에 앉은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여인처럼 하얀 살결에 눈초리는 검게 드리워졌고, 입술은 분이라도 바른 것처럼 홍조가 가득했다.
그는 지난 날 십여 명의 수석을 모아놓고 일장훈시를 했던 백결공(白潔公)이다.
일원의 수뇌부인 그가 무림맹의 심처에서 미소를 보였다.
“진위대주.”
삼십 대 초반이나 될까 한 백결공의 말에 장년인은 화들짝 놀라며 눈치를 봤다.
“하명하십시오. 문상.”
참석자들의 상하관계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무림맹의 주인은 맹주이고, 군사를 보좌로 삼았다.
하나 넓디넓은 강호의 일을 군사가 홀로 도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문무에 걸쳐 책임자를 뽑았다.
그것이 바로 문상(文相)과 무상(武相)이다.
이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였다.
그런 자리를 이립(而立)을 갓 넘긴 백결공이 차지한 것이다. 하나 이곳에 모인 자들은 누구도 백결공을 우습게 보지 못했다.
그는 천문나진법을 통달한 천재였다.
천문나진법(天文羅陳法)은 제갈세가의 만들어낸 재지의 총화로 천문과 지리, 역학과 진법은 물론이고, 병법과 귀계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학문이다.
천문나진법만 제대로 익히면 문으로는 삼공이나 대학사의 자리를 노릴 수 있었고, 무로서는 대장군도 꿈이 아닐 터였다.
백결공은 약관의 나이에 천문나진법의 열여덟 단계를 돌파했다. 칠급을 넘어서면 대과를 노려볼만 하고, 십급에 이르면 명가의 군사로 대우받지 않던가.
그러니 그의 한 마디에 당주와 대주가 긴장하는 것도 이상한 광경은 아니었다.
“진위대 삼조에 작은 문제가 있는 것 같더군요. 대주께서 신경을 써주셔야 할 듯합니다.”
분명 장부상의 문제나, 조원의 범죄에 대한 문제이리라.
진위대주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백결공은 외원 정례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장단점을 꼽았다.
한데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군사, 광목진인의 좌측에 앉은 장년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군사의 옆자리를 차지했으니 그가 바로 무림맹의 무상이리라.
검존(劍尊) 하후태경.
화산과 무당, 남궁세가가 인정한 초절정의 고수였다.
항간에는 초절정을 지나 화경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신위를 자랑했다.
그런 그가 백결공 앞에서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백결공이 맹 내의 사무와 맹 외의 정보를 총괄한다면 하후태경은 무림맹의 무력을 총괄했다.
한데 수하들의 비위가 끊임없이 쏟아지니 불편할 수밖에 없으리라.
‘거슬려. 아주 거슬려.’
하후태경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백결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백결공은 차기 무림맹주로 거론될 만큼 승승장구하던 그의 앞길을 막아선 유일한 존재가 아닌가.
‘약점이라도 하나 잡으면 좋겠는데.’
하나 백결공은 청백(淸白)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제 놈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은 이상 계속 조사하면 뭐라도 나오겠지. 그나저나 저 새끼들은 적당히 해먹었어야지. 아니면 걸리지를 말든가.’
조만간 수하들을 모아놓고 푸닥거리를 해야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불만이 차오르니 백결공의 공손한 어법조차 거슬렸다.
‘사내놈의 얼굴이 저렇게 허여멀건 해서야. 계집이나 내관같지 않은가. 흐음, 벗겨놓고 확인할 수도 없고 말이야. 존재 자체가 거슬리는 놈이로다.’
하후태경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한참 구겨진 후였다.
마침내 백결공이 서론을 끝냈다.
“오늘의 중요 안건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을 논하고, 평소 관리하던 사안에 관하여 논의해봅시다. 첫 째는 모두 아시다시피 검후가 맹으로 오고 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불편한 듯 침음을 흘렸다.
검후의 내방 목적은 뻔했다.
몰락한 보타암의 재건을 무림맹의 이름으로 도와달라고 찾아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무슨 보타암이란 말인가?’
모든 것은 백 년 전 신마대전에서 비롯됐다.
괴겁천마와 사령신은 강호를 제 장난감처럼 쥐락펴락했고, 그 와중에 정파는 지리멸렬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구파오가는 분루를 흘리며 봉문했다.
그리고 수많은 중소방파가 멸문하거나, 혈겁에 휩쓸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면 정파는 뿌리가 뽑혔으리라.
다행히 정천칠공이 막았다.
괴겁천마와 사령신은 사라졌다.
그러니 괴겁천마를 따르던 마교는 천산으로 돌아갔고, 사령신을 따르던 천사련은 강호라는 거대한 그늘 아래 자취를 감췄다.
다시 정파의 세상이 됐다.
정파는 모든 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고, 사파는 기꺼이 정파의 가면을 썼다. 절강성 대부분에 퍼져 있던 보타암의 그림자도 그렇게 지워졌다.
“이미 절강성은 천목십이회가 분할하여 세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지금 와서 보타암을 무문으로 되살린다면 누가 도우려 하겠습니까.”
산동에 삼정이 있고, 강소성에 칠계가 있다.
절강성에는 천목십이회(天目十二會)가 존재했다.
구파오가가 아닌 이상 모든 지역은 비등비등한 방파끼리 갈라 먹은 지 오래였다.
먹을 게 많은 곳은 갈라먹는 자도 많았다.
그러니 절강성의 재화가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으리라.
“보타암은 아직도 불문의 성지로 향화객들이 끊이지 않는답니다. 그 정도면 되지 않겠습니까?”
정천칠공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는 않았으리라.
하나 먹고 사는 문제에는 정파라고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자신의 세력에 대한 집착은 사마외도보다 강렬할 터였다. 그러니 사마외도가 정파를 가리켜 위군자라고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던가.
“보타암의 부흥을 돕는다면 신마대전 당시 몰락한 명가의 후손들이 모두 몰려올 겁니다.”
백결공은 부정적인 의견이 늘어날수록 진득한 미소를 보였다.
‘이제 와서 보타암과 같은 망령을 중심으로 집결하게 둘 수는 없지.’
일원의 원대한 목적을 위해서라도 상징적인 방파와 인물은 제거되는 쪽이 나았다.
“그런데 말이야.”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광목진인이 지나가는 어투로 물었다.
“검후가 몇 번이나 왔었더라?”
“세 번입니다.”
“연초에 한 번씩이니 올해가 사년째로군.”
“그렇습니다.”
“내가 시간을 낼 터이니 자리를 만들어 보게.”
백결공은 귀를 의심했다.
무림맹의 군사는 광목진인이지만, 반쯤 손을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맹의 대소사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한 것만 벌써 수년 째가 아니던가.
“군사.”
광목진인은 떼를 쓰듯 말했다.
“삼 년이나 시간을 끌어줬으면 천목십이회에도 할 말이 있지 않겠는가. 보타암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면 그들도 자리를 내어줄 게야.”
백결공은 다급한 어조로 의견을 덧붙였다.
“하나 천목십이회가 분기 별로 맹에 보내는 지원금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만약 그들과 반목을 한다면······.”
“문상.”
광목진인은 구부정한 허리를 두드리며 자연스럽게 백결공의 말을 끊었다.
“하명하시지요.”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면 내가 간다고 이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결공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크흑.’
무당파 장문인의 사형인 광목진인의 배분은 하늘과 같았다. 당금 강호에서 배분만으로 광목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무인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으리라.
그러니 군사가 움직인다는 건 곧 무당의 움직임을 뜻했다. 그리고 무당의 움직임은 당연히 구파 전체의 행동을 의미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구파의 무서운 점이다.
하나를 건드리면 아홉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구파.’
하나 잠시 후 고개를 든 백결공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은하검후의 은공을 누가 잊겠습니까? 군사께서 원행을 무릅쓰지 않도록 제 선에서 정리하겠습니다.”
“클클, 좋아. 듬직하군. 자네가 있기에 내가 텃밭을 가꿀 시간도 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조만간 모든 걸 넘겨주고 떠나야겠어.”
광목진인의 너스레에 백결공은 겸양어린 대꾸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흥! 칠 년 째 손을 놓지 못하는 욕심쟁이 도사 놈.’
광목진인의 흐릿한 눈빛과 백결공의 맑은 눈빛이 몇 차례나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두 사람의 진득한 미소로 인해 장내가 화기애애했다.
“피곤하군.”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라는 뜻이다.
백결공은 여전히 군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하며 이를 갈았다.
하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옥구슬이 쟁반 위를 구르듯 청아하기만 했다.
“요즘 강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광동에서는 백화교라는 사교집단이 낭인 세력과 섞여서 혈사를 벌였습니다. 강서성에는 사부라는 괴인이 정사마를 거리지 않고 분란을 일으켰지요. 섬서성에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비무행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달 말에는 화산파를 방문한다고 하더군요. 한데 이번에는 강소성에서 장보도가 나타났습니다. 아니, 산동, 강서, 안휘, 절강에 걸쳐 수천 장의 장보도가 퍼졌지요. 누군가 사령신의 창고인 만병보고를미끼리 혈겁을 꾸미는 듯합니다.”
이 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백화교와 만병보고였다.
하나 광동성은 중원의 변경 밖이라고 할 만큼 외지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강소성의 만병보고의 위급함이 훨씬 더 피부에 와 닿았다.
“남궁세가의 창궁검이 발견됐다지요?”
백결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광목진인 역시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구파오가 중 사령신의 수집욕에 당하지 않은 곳이 없지. 하나 이번 일에서 구파오가는 관망하기로 했네. 그러니 강소 지부에 인원을 더 충원하고, 전서응을 통해 저간의 사정을 알리는 것이 좋겠어.”
“따르겠습니다.”
백결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슬쩍 창밖을 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지금쯤 입구의 문이 열렸겠군.’
만병보고가 함정이라면 들어가는 문만 열었을 게다.
하나 입구와 출구가 동시에 열린 상황이다.
그러니 목숨이 아까운 자는 만병보고의 내부로 향하지 못하고, 밖으로 도망쳤으리라. 그들은 만병보고 안에서 보고 들은 것을 외부에 전할 터였다.
‘그리고 남궁세가와 강소지부가 몰살당하면 만병보고의 사건은 만천하에 퍼지리라.’
그렇게 된다면 엉덩이가 무거운 무림맹도 지금처럼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으리라.
‘지금쯤이면 모두 모였겠어. 내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구나.’
백결공은 속내와 달리 침중한 표정으로 정례회의를 이어갔다.
만병보고는 십수 년 간 검토했던 함정이 아닌가.
그리고 이미 일원의 힘으로 만병보고의 기물은 모두 회수한 상태였다. 그러니 한 번 들어간 자는 결코 살아서 빛을 볼 수 없으리라.
“만병보고는 외원의 진위대와 백룡대가 맡도록 하지요.”
맹에서 이백 명의 무인이 차출됐다.
하나 저들이 강소성에 도착했을 때 볼 수 있는 건 시산혈해가 전부이리라.
*
남천휘와 소용녀는 희미하게 흘러들어오는 빛을 길잡이 삼아 나아갔다. 그리고 미로와 같이 복잡한 동굴을 한참동안 헤맨 후에야 햇빛처럼 밝은 빛을 마주할 수 있었다.
“햇빛이네.”
“그러게. 홍택호 근처에 있는 산이 분지일 줄 누가 알았겠어.”
두 사람은 광활한 평지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몽산의 대두동처럼 산세가 병풍처럼 사방을 둘렀다. 그리고 곳곳에 두 사람이 나온 것과 같은 동혈의 입구가 보였다.
“엇! 사람이 있어.”
이미 선객이 상당했다.
수십 명이 저마다 무리를 지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던 중 눈에 띄는 행색이 노인이 보였다.
주변의 기류마저 피할 만큼 묘한 분위기의 노인이다. 본능적으로 신공부주나 천위검호보다 훨씬 윗줄의 고수임을 직감했다.
남천휘와 노인의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어디선가 탄성이 터져나왔다.
“아!”
노인의 곁에 있던 묘령의 여인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은 십여 보 남짓을 걸었음에도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맞아. 맞네.”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어디서 본 듯한 여인인데 안개 속에 있는 것처럼 가물가물했다. 여인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수줍은 어투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용봉쟁투 잘 봤어요.”
“아!”
남천휘가 탄성을 흘리자, 여인은 배시시 웃으며 검지를 펼쳤다.
“투표도 했어요. 남 소협을 일등으로 만든 사람 중에 저도 있답니다.”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축하드립니다.
- 1호 팬이 생겼습니다.
- 특별 보상으로 자수정 1000개가 지급됩니다.
- 미연시의 보상인 세안, 교골, 청혈이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남천휘는 넋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 독무가 난무하던 이곳에 도홧빛 기류가 웬 말이더냐. 그 사이 재이가 역린을 노리는 날카로운 일격을 날렸다.
◎ 현재 주인님의 외모 서열은 상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