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무인무명무대(武人無名舞臺). (3)
입이 방정이라고 했던가.
기연 대신 재이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 천혜의 인공던전이 발동했습니다.
- 특정 지역에 자기장이 활성화됩니다.
자기장(紫氣場)이라고?
자색 기운의 장소라면.
남천휘는 공동 내부를 살폈다.
하나 어느 곳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입구와 출구를 제외하면 그저 평범한 동굴이다.
그리고 그 평범했던 동굴이 화라도 난 듯 콧김을 내뿜었다.
취이이이이익-
자색의 운무가 낮게 깔렸다.
이제야 자기장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남천휘는 황급히 뒤로 물러서며 외쳤다.
“독이다!”
자색 연기는 느릿하게 퍼져나갔다.
남천휘의 목소리에 반응했다면 늦지 않게 피할 수 있었으리라.
하나 강호는 음모와 귀계가 판치는 장소였다.
누군가의 외침에 일일이 반응했다가는 제일 먼저 눈 먼 칼에 맞기 싶상이다.
그렇기에 강호인들은 섣불리 움직이기 보다 눈으로 확인하려 했다.
하나 안개는 발바닥 근처를 맴돌 뿐이다. 게다가 동굴 안은 희미한 빛으로 인해 인영만 겨우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어두웠다.
“앗! 따가워.”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다섯을 헤아리기도 전에 풀썩 꼬꾸라졌다.
“주, 죽었어.”
본래 독(毒)이란 흡입을 통해 효용을 드러내는 법이다. 한데 공동의 안개는 어찌나 지독한지 피부에 닿기만 해도 중독이 되었다. 그것도 발진이나 염증이 아니라 혈맥에 타격을 줬다.
“독이다! 피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비명과 경고.
하나 살 놈은 뭐가 되도 살았고, 죽을 놈은 뭐가 되도 죽더라. 재수 없게 자기장의 영역에 있던 자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경계에 있던 자들은 황급히 거리를 벌렸지만, 자색 연기에 조금이라도 닿은 자는 너나 할 것 없이 주저앉았다.
“내공으로 밀어내!”
외가기공을 익힌 듯한 근육질의 사내가 외쳤다.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독무에 슬쩍 닿았음에도 황급히 거리를 벌린 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암습에 취약한 상태였다.
하나 그대로 있었다가는 절명할 것이 분명하니 경계를 할 여력도 없었다.
삽시간에 십여 명이 절명했다.
백을 헤아릴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독무가 잦아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바닥에 깔린 채 자취를 감췄다.
남천휘는 인상을 쓰며 읊조렸다.
‘네 짓이냐?’
◎ 저는 아닙니다.
그럼 누군데?
이 놈의 자식, 또 딴청 피우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던전의 발동을 알릴 때 유독 신바람이 난 것처럼 보이더라.
남천휘는 혀를 차며 남위기를 켰다.
VIP포인트를 사용하여 온갖 단어를 검색했다.
하나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뿐이다. 명확한 용어가 아니라면 남위기는 빨래터의 아낙들이 떠드는 잡담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빌어먹을! 무기 고치러 왔을 뿐이라고. 그런데 왜 규모는 제2막 중원행이 시작한 것 같지?’
재이 녀석은 대답이 없다.
대답이 없을 것을 예상하면서 묻는 것도 싫고.
대답이 없어도 그러려니 이해하는 자신은 더욱 싫었다.
뭔가 녀석에게 적응하는 것 같잖아.
그 때 남천휘의 앞에서 뒷걸음질 치던 자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어?”
자신도 의아한 듯 탄성을 흘리더니 이내 헛구역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면부지의 사내지만,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다.
남천휘는 살짝 거리를 둔 채 해독제인 녹선단을 활용하려 했다.
◎ 협의지심의 발현인가요?
녀석의 물음이 의미심장했다.
대뜸 협객의 특기를 던져주고, 제약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일었다.
하지만 걱정 없다.
남천휘는 재의의 예상처럼 순수한 의도로 접근한 것이 아니었다.
‘녹선단이 먹히는지 확인해봐야지.’
가뜩이나 시스템이 2.0으로 업그레이드 되면서 많은 것이 변화하지 않았던가. 체력 회복의 적선단과 내공 회복의 벽선단은 아예 다른 물약처럼 변했다.
그러니 기회가 왔을 때 녹선단도 어떻게 변했는지 시험해 보면 좋지 않겠는가.
하나 녹선단이 사용됐다는 알림이 무색할 만큼 사내는 피를 토하며 고개를 떨궜다.
‘녹선단이 안 통해?’
이야! 강호는 넓고, 독은 많구나.
‘가 아니지! 빌어먹을, 녹선단을 어떻게 바꾼 거야?’
◎ 녹선단에 관한 변경 사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응? 그럼 그냥 해독제가 안 통했다는 거네.
남천휘는 다시 남위기를 켰다.
극독 중 보라색 맛이 나는 것을 찾았고, 그것들의 재배처를 검색했다.
그 결과 세 가지 독을 찾아냈다.
‘이걸 만든 게 사령신이고, 청염진군은 여기서 마봉파를 만들었으니······.’
두 사람의 이름을 적고 교차 검색했다.
그 결과 하나의 절독을 찾아낼 수 있었다.
칠보자령초(七步紫靈草).
이름부터가 일곱 걸음 안에 죽는단다.
그래서 해독법은?
없다.
온갖 정보를 검색했음에도 변죽만 울릴 뿐 마무리를 같았다. 퍼지는 속도가 느리니 가까이 하지 말란다.
‘내 돈 먹고 하는 말이 겨우 이거냐?’
그렇게 자료를 아래로 내리던 중 논문(論文)에서 칠보자령초의 해독법을 찾을 수 있었다.
《칠보자령초에 대한 표본실험을 통한 해법.》
딱 봐도 여기 해독법이 있다고 외치는 듯하지 않은가. 가격도 VIP 300포인트면 논문을 펼쳐볼 수 있단다.
하나 왠지 찜찜했다.
‘사령신과 만병보고, 청염진군, 마봉파까지 거미줄처럼 얽힌 정보가 고작 300이라고?’
결제를 하는 순간 ‘일곱 걸음에 죽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아홉 걸음.’이라는 되도 않는 글귀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조금 전 외가기공을 익힌 자의 외침처럼 ‘일 갑자의 내공을 지닌 자는 운기조식을 통해 해독할 수 있다.’고 지껄이겠지.
보지 말자.
잔여 VIP 포인트가 630밖에 없기 때문이 아니야.
‘그래, 저건 똥일 거야. 똥이야. 똥.’
그 때 낭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대화가 들려왔다.
철문이 닫혔을 때 가장 먼저 분위기를 휘어잡으려던 청양쌍귀와 홍련사웅이다.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거야? 벽에 적힌 걸 보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문이 열리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이 일을 꾸민 자가 있다는 거야?”
“그럼 없겠냐?”
“어차피 아는 놈도 없잖아. 적당히 정리하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는 건 어때?”
“조금 전에 무흔사의 머리통이 폭발하는 것 못 봤어? 그 꼴이 되고 싶어?”
저들끼리 붙어 앉아서 구시렁거리는 모양새가 조만간 칼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그나저나 이걸 어쩌지?’
협객의 삶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허무하게 죽어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한 번 뿜어진 독기가 다시 솟구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입이 방정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구나.
남천휘가 궁리를 하려는 순간 자기장이 다시 펼쳐졌다.
한데 이번에는 입구 쪽이 아니라 좌측이다.
“도, 독이야!”
벌써 서너 명이 독기에 휘말렸다.
남천휘는 혀를 차며 자기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로 무인들의 뒷목을 잡아 던졌다.
“어어!”
있는 힘껏 집어던졌기에 철문에 부딪치는 자가 속출했다. 그래도 머리가 깨지는 게 머릿속이 녹아내리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리고 남천휘는 독기에 휘말렸다
‘운기조식을 하면 된다고 했지.’
이럴 때에는 동공을 익힌 것이 참으로 감사했다.
할아버지! 고마워요.
하늘에 한 번, 땅에 한 번 감사를 전했다.
어디에 있을지는 모르잖아?
그 때 재이의 알림이 들려왔다.
◎ ‘오늘의 조언’은 한 시진 이후 재설정됩니다.
그래, 그게 있었지.
시스템이 업그레이드 된 후 상태창의 변화는 하락 쪽에 무게를 뒀다. 반면 상태창 외적인 부분은 많은 것이 추가됐다.
아직도 모두 파악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 중 한 가지가 ‘오늘의 조언’이다.
오늘의 조언은 일일임무와 연계됐다.
매일 아침 묘시, 즉 해가 뜰 시간이 되면 열 가지 임무가 만들어졌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인사하기, 운기조식을 하기, 철투 3회 승리하기, 남위기를 통한 검색 3회, 회회회판 연속돌리기 1회와 같은 단순한 임무였다.
그 중 세 가지를 하게 되면 ‘오늘의 조언’이라는 명령어가 활성화됐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남천휘가 묻고, 재이가 대답하는 방식이었다. 참고로 백룡암을 발견한 날 흑린곡은 어떤 곳일까라고 질문했다.
답은 ‘흑린처럼 생겼겠지요.’였다.
놀림 당하는 것 같아서 안 쓰려고 했는데.
남천휘는 벽선단을 소모하며 내공을 휘돌렸다.
그러면서 물었다.
‘빌어먹을! 자기장을 어떻게 좀 해봐.’
◎ 오늘의 조언을 먼저 외쳐주세요.
추적 표시인 ‘낙인’을 찍을 때에는 빵이라고 외쳐야 하지 않던가. 한데 이제는 오늘의 조언이라고 외쳐야 한단다.
이거 아무리 봐도 그냥 낚이는 것 같은데?
하나 목 마른 놈이 우물을 판다더라.
“오늘의 조언.”
입술을 꽉 다문 채 복화술처럼 읊조렸다.
◎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음과 양이 어우러지듯, 독과 해독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지요.
남천휘는 뻔한 소리를 한다고 호통을 치려다 눈을 가늘게 떴다.
‘어, 그럴 수도 있겠네.’
칠보자령초를 태워서 만드는 자기장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곳 어딘가에 원형의 풀이 존재할 터였다. 그러니 해독제가 근처에 있다는 말도 허황되지 않았다.
남천휘는 안력을 돋웠다.
신안까지 동원해서 시야를 밝게 만드는 순간 바닥에 깔려 있는 이끼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 색깔이었기에 일부러 찾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상태였다.
검은 이끼를 쓰다듬으며 확인 주문서를 사용했다.
띠링-
《붕초를 얻었습니다.》
- 특정 지역의 특정 독을 해독합니다.
이거다!
남천휘는 이끼를 잡아뜯었다.
넝쿨처럼 기다란 녀석이 뽑혔다.
남천휘는 붕초를 발 근처에 감았다.
그 순간 마비가 풀렸고, 따끔하던 고통이 잦아들었다.
“살고 싶으면 발아래 붕초를 뽑아서 감아!”
자기장에서 떨어진 자들이야 멀뚱히 눈만 끔뻑였다.
하나 자기장에 조금이라도 노출이 된 자들은 황급히 남천휘를 따라 붕초를 뜯었다.
그리고 열심히 감았다.
감고, 걷고, 또 감고, 또 걸었다.
그렇게 자기장 밖으로 벗어난 자들은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탁!
소용녀가 남천휘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너, 멋있네. 너 때문에 저 사람들이 다 살았어.”
“협객은 안 해.”
“협행은 협객의 전유물이 아니야. 그냥 하는 거지. 후훗, 그리고 내가 쭉 지켜봤더니 너는 꽤 잘하는 것 같아.”
남천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쭉 지켜본다면서 어디에 있었냐?”
벽에 찰싹 붙어 있던 소용녀가 딴청을 피웠다.
“보시다시피 내가 면적이 좀 넓어. 그래서 중독되면 여기 약초를 다 내가 써야 할 수도 있어.”
자기 비하까지 해가며 변명을 하니 더 몰아붙일 수도 없었다. 어차피 소용녀의 역할은 무기 수리가 아니던가.
그래! 흰 소면 어떻고, 검은 소면 어떻겠는가.
밭만 잘 갈면 되는 거지.
“다들 약초 챙겨. 어디서 또 튀어나올지 몰라.”
강호인들은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붕초를 채집했다.
남천휘의 얼굴은 모르지만, 목소리만으로도 이미 신뢰를 얻은 상태였다.
잠시 후 자기장을 통해 칠보자령초가 다시 한 번 독무를 뿜었다.
하나 사상자는 전무했다.
그렇게 총 열 번의 독무가 솟구친 후였다.
◎ ‘인공던전’의 내부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 던전의 명칭은 ‘만병보고’입니다.
- B 등급 던전으로 100레벨 이하의 대상자는 사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재이의 알림과 더불어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이이익-
입구와 출구가 동시에 열렸다.
무인들은 불과 반 시진 만에 마주한 빛을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하나 이내 고개를 돌려 만병보고의 내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저갱처럼 시커먼 공간이 끝없이 펼쳐졌다.
하나 두려움과 탐욕이 뒤섞인 눈빛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나도······.’
그 때 남천휘가 내부로 향하는 입구를 막아섰다.
“저, 어린놈은 뭐야?”
남천휘는 수십 명의 탐욕 가득한 눈빛을 한 몸에 받았다.
“나갈 수 있을 때 나가라.”
“놈! 보물을 혼자 차지할 생각이냐?”
청양쌍귀가 물었다.
대답은 남천휘가 아니라 홍련사웅에게서 나왔다.
“흥! 욕심이 많은 놈은 일찍 죽는 법이지!”
홍련사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비명을 지르며 튕겨나갔다.
퍼퍼퍼퍽!
어찌나 대차게 얻어맞았는지 철문 밖까지 굴러가는 것이 아닌가.
철컥.
남천휘가 손을 쥐었다 펴는 순간 질풍뇌격궁이 손에 들렸다.
“여기서 무흔사보다 강한 사람?”
잠시 후 공동에는 남천휘와 소용녀만 남았다.
소용녀가 물었다.
“저들이 들어갔다가 개죽음을 당할까봐 그냥 내보낸 거지?”
남천휘가 코웃음을 쳤다.
“흥! 걸리적거려서 쫓아낸 거야.”
소용녀는 소리 죽여 웃었다.
“좋은 사람.”
짜증이 났다.
◎ 좋은 사람.
짜증은 배가 됐다.
“젠장! 나 휴가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