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70일 간의 산동일주. (2)
평범한 기녀가 하는 말이었다면 하룻밤 잠자리의 허풍으로 끝났으리라.
하나 황보장천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곳은 단순한 기루가 아니다.
정화루(情話樓)의 루주가 하오문의 산동지부장임은 몇몇 명사들에게만 알려진 사실이었다.
고혹적인 미소가 싸구려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산동에 존재하는 하오문 지부 여덟 곳과 수천 명의 하오문도가 움직일 터였다.
그러니 황보장천은 정화루주와 마주 앉은 이 순간 진짜로 산동성을 손에 넣은 듯했다.
“루주께서 이처럼 황보 모를 찾아주실 줄은 몰랐소이다.”
“영웅의 풍모를 지니신 황보 소협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지요.”
루주가 웃으며 내뱉은 한 마디에 가슴이 활짝 열리는 듯했다. 한데 그 순간 황보장천의 옆에 앉은 중년인이 헛기침을 흘렸다.
“크흠.”
그는 황보장천을 따라 용봉쟁투의 실무자로 참가했던 황이다. 본명은 황보황이며 세가의 내원에서 일대를 책임지는 존재였다.
황보장천은 자신의 후견인이나 다름없는 황보황의 경고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산동지부장의 초빙에 응했으니 이제 공적인 일을 논해볼까요?”
루주는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용봉쟁투의 주인공으로 참가했다가 별 볼일 없는 신세가 되었다기에 내심 무시한 것이 사실이다.
‘최소한 뭐가 중요한지는 알고 있는 자로구나.’
그녀는 영업용 미소를 지운 채 말을 이었다.
“강호가 평온하듯 지금껏 산동도 별 일 없었지요. 한데 요즘 큰 변화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소가주도 알고 계시겠지요.”
황보장천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일문의 후계자답게 듣는 것에 익숙한 것이리라.
“신공부는 재정비를 하고, 청도문은 내부의 일로 경황이 없어요. 지금이야 말로 황보세가가 세력을 넓힐 절호의 기회겠지요.”
그 순간 황보황이 입술을 달싹였다.
전음으로 황보장천에게 할 말을 일러주는 것이리라.
“강호가 평온하니 무엇보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세상이 되었소. 한데 신공부가 멸문도 아니고 재정비를 한다고 해서 황보세가가 칼을 휘두를 수는 없지.”
루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인즉슨 명분만 있다면 기꺼이 칼을 휘두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니던가.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자연스럽게 황보장천은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자 여인의 체취가 폭발적으로 퍼져 나왔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루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신공부의 무력은 신공부주와 천라쌍익, 천위검호에게서 비롯됐어요. 세 명 모두 죽었습니다. 그러니 신공부가 재정비를 한다고 해도 근시일 내에 예전처럼 활개를 치지는 못할 겁니다.”
“······.”
미끼가 충분치 않다.
“신공부주와 청도문주의 은밀한 관계를 아시나요?”
황보장천은 잠시 눈을 끔뻑였다.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비록 황보황의 헛기침으로 이내 표정을 수습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신공부주가 청도문주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어요. 청도문주는 신공부주를 위해 자금을 만들고, 신공부주는 그 돈으로 흑도를 운용했지요.”
“인내심의 한계가 느껴지는군요.”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신공부와 청도문은 현재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그래서?”
루주는 빙긋 웃더니 소매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혈무단이라는 녀석이에요. 요즘 흑도에 돌고 있는 독탄이지요. 한데 이게 없으면 흑도 취급을 받지 못한다고 할 만큼 퍼진 상태랍니다.”
“독성은?”
“산공독에 폐혈독이 섞인 거예요. 조제는 어렵지만, 해독은 쉽지요. 황보세가 같은 명문이라면.”
황보장천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렇다면 신종이 아닌가. 누군지 몰라도 무림맹 모르게 이런 것을 유포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려.”
“이 정도면 황보세가가 칼을 휘두를 명분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그녀의 말이 옳다.
삼정은 무림맹에 속했고, 무림맹은 그들 모르게 벌어지는 일에 민감했다. 그러니 독을 없애기 위해 출진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리라.
그리고 함께 나서야 할 신공부와 청도문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니 모든 공은 황보세가의 것이 될 터였다.
‘그 와중에 태산의 공백지를 모두 세가의 영역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리라.’
황보장천은 명문의 후계답게 찰나의 순간 더 큰 그림을 만들었다. 신공부와 청도문이 약한 틈을 노린다면 그들의 영역 또한 거둬들일 수 있을 터였다.
그제야 루주의 말이 이해가 갔다.
‘황보세가가 산동을 먹을 수 있어!’
그 때 황보황이 제동을 걸었다.
“신공부의 문제는 알고 있소만, 청도문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처음 듣는군?”
“황보세가도 모를 만큼 중요한 정보인데요?”
돈을 내라는 뜻이다.
하나 닳고 닳은 황보황이 루주에게 끌려다닐 이유가 없다.
“내가 청도문의 문제는 몰라도 지부장이 그와 가까웠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지. 황보세가라는 칼을 휘두르고 싶으면 더 많은 것을 투자해야 할 게요.”
루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좋아요. 청도문주는 신공부주라는 뒷배를 잃었어요. 그래서 급히 다른 뒷배를 구했는데······.”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게 바로 봉황곡이지요.”
황보황은 예기치 못한 방파의 등장에 잠시 말을 아꼈다. 강호칠대금지 중 한 곳인 봉황곡은 강소성 북부의 운태산에 터를 잡았다. 그 말인즉슨 그들이 산동성에 들어오려면 신공부의 영역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설마 청도문주가 봉황곡과 손을 잡고 신공부를?”
“가능성은 있지요.”
“그렇지. 가능성만 있지. 하나 봉황곡은 곡주가 바뀐 후 내실을 다지느라 강호의 출입을 금하지 않았던가. 한데 그들이 뜬금없이 신공부를 적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일전에 돌았던 소문을 떠올려보세요.”
황보황은 미간을 좁혔다.
“설마 전대 곡주의 딸이 복수를 한다던?”
루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복수를 하러 왔다가 패배했어요. 그리고 현재 도주 중이지요. 청도문주는 그녀의 목을 선물하기로 했고······.”
“봉황곡주의 야심이야 익히 알려져 있지. 그 대가로 청도문과 함께 움직인다는 말이군.”
황보장천은 방관자로 밀려난 상황이 불쾌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을 건넸다.
“청도문의 영역에서 퍼졌으니 하부 방파들도 동조했겠군요. 그러니 황보세가가 독탄을 억제하면 청도문이 나설 것이고, 본가는 청도문을 쓸어버리겠지. 그렇게만 된다면 산동성의 칠 할이 황보 세가의 손에 떨어지는 셈이오. 한데 그 좋은 일을 황보 세가에게 그냥 넘기는 이유가 뭐요?”
“버림 받은 여인의 한이라고 해두지요.”
황보황은 눈을 가늘게 떴다.
루주는 딴청을 피우며 작은 책자를 탁자에 올렸다.
“태산 동부에서 혈무단을 파는 자들이랍니다. 삼분지 일은 청도문과 얽혀 있을 거예요. 사용 유무는 황보세가에 맡기지요.”
황보장천은 탐욕스런 눈빛으로 책자를 노려봤다.
“원하는 것은?”
“일이 끝난 후에 논의해도 되지 않을까요?”
루주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황보장천에게 눈짓을 했다. 황보황은 그녀의 시선을 막으며 책자를 챙긴 후 한 마디를 남겼다.
“검토해보겠소.”
두 사람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책자의 진위 여부를 파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으리라.
루주는 그제야 산동수석으로 돌아갔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지.”
철괴 파파가 그녀에게 겉옷을 덮어주며 말했다.
“황보세가는 좋은 괴뢰가 될 겁니다.”
“그래, 그렇게 하나가 되는 거야.”
*
남천휘는 술잔을 높이 들어올렸다.
“먹고 죽자!”
그 순간 주루를 가득 채운 장한들이 술잔과 술병을 흔들었다.
“죽자!”
동시에 은자 한 냥이 술로 변하며 주객들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한 잔은 두 잔이 되고, 이내 열 잔을 넘기는 순간 그들은 모두 하나가 되었다.
“하하하! 남 형은 산동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오! 내가 아주 감복했소. 내 술 한 잔 받으시오.”
“아니지. 백 형은 얼룩 하나 없는 백마를 가졌잖아. 산동강호에서 그런 명마를 지닌 건 백형뿐일 게요.”
“흥! 백 가의 말은 계집이나 타는 말이지. 내 흑마야 말로 천리를 달리는 준마이자, 명마라오!”
“얼씨구? 내 말 엉덩이나 보고 달리던 놈이 술을 마셨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어진 게냐?”
누군가 주정꾼들의 말다툼을 단박에 해결했다.
“흑마든, 백마든 무슨 상관이야? 잘 달리기만 하면 되지!”
“그렇지. 주인이 떠들면 뭐해. 달리는 건 말이잖아?”
잠시 후 은자 열 냥짜리 내기가 성사됐다.
“달려라!”
흑마와 백마가 각기 주인을 태우고 내달렸다.
남천휘를 비롯한 취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내기를 구경했다. 잠시 후 의미 없는 승자와 패자가 결정됐고, 그걸 화젯거리로 삼은 주당들은 다시 술잔을 꺾었다.
남천휘는 누구의 자리인지도 모를 곳에 앉아서 입꼬리를 올렸다.
‘즐겁기는 한데······.’
곡부를 떠나고 삼일이 지났다.
이미 칠십 일의 여유 시간을 얻지 않았던가.
하여 남천휘는 그 시간을 착실하게 즐기고자 했다.
그러나 퀘스트가 없는 삶은 그리 즐겁지 않았다.
회회회판이라도 돌렸으면 이처럼 심심하지는 않았으리라.
“남 형, 정녕 동쪽으로 가시려는 게요?”
대장간 양 씨가 걱정스런 어투로 물었다.
남천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갈 곳이 있어요.”
“흐우, 저 산 넘어가면 무법천지야. 청도문의 이름만 내걸면 안 되는 것이 없지. 아무리 자네라고 해도 녹록치 않을 걸세. 그러니 조심하시게.”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하나 속으로는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생각뿐이다.
청도문이 신공부주의 하부조직일 수도 있지만, 일부러 찾아가서 무너트릴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먼저 건드리지 않는 이상 유선관에서 철장경의 흔적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거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요. 별 일 있겠어요?”
있었다.
그것도 아주 조촐한 환영식이 있더라.
“어이, 공자. 이 길은 어떤 길인지 알아?”
남천휘는 십여 명의 산적들이 앞뒤를 막아서는 꼴을 지켜봤다.
“이 길에는 말이야. 슬픈 전설이 있어.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관노였거든? 십 년 동안 노역을 하셨어. 이 길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유산인 거지.”
“야! 그냥 다 내놓으라고 해. 매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역사를 잊은 산적의 미래는 없어!”
놈은 어깨를 활짝 펴고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남천휘는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아, 산적이다.”
퍽!
“이제 아홉 산적이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를 팔아먹던 녀석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고수다!”
그래서 뭘 하려나 했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더라. 역사를 기억하는 만큼이나 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녀석이다.
남천휘는 한순간 정적이 감도는 산길 한 가운데에서 눈을 끔뻑였다.
“이제야 남의 땅에 온 기분이 나네.”
며칠 동안 그를 만난 모든 사람들이 반겨주었다.
기꺼이 숙소를 내어주고, 밥을 먹었으며, 술 잔을 나누지 않았던가. 하나 태산을 넘는 순간 환경은 같았으나, 사람들의 성향은 정반대였다.
성급한 결정이라고 하지 말자.
“아! 그만 좀 나와라!”
남천휘는 일곱 번째 산적 무리를 만나는 순간 울분을 토해냈다. 놈들은 남천휘의 일갈에 겁을 집어먹고 개미떼처럼 흩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개똥이라도 데리고 올 걸.”
그가 곡부를 떠나려 할 때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수십 명이 뒤따르려 했다.
하나 혜소는 여전히 신공부와 곡부남가의 연락을 책임졌고, 천수련은 스승을 따라 언제 무림맹으로 떠날지 모르는 상태였다.
결국 남은 건 소혜였는데.
“그래도 한 사람 정도는 신교대의 살림을 맡아야 하니까······.”
그래, 그런 거다.
데리고 올 수 있는데 그냥 두고 온 게다.
“확! 매일 같이 비나 내려라.”
남천휘의 저주는 그 날 부로 현실이 됐다.
다만 곡부남가가 아니라 그가 향하는 모든 곳이라는 점이 예상 외였을 뿐이다.
그리고 칠십일 간의 산동 여행 중 열흘 째 되던 날 유선관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아, 진짜 다 때려 치고 싶다.”
남천휘는 흐느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우산을 쓰거나 옷을 갈아입어도 소용이 없을 만큼 폭우가 계속됐다.
결국 비에 젖은 채 유선관에 발을 들였다.
“어머, 거지인가 봐.”
“얼굴은 멀끔하게 생겼네. 내가 데려다 키울까?”
“호호, 이 년이 못하는 소리가 없네.”
여인들의 수위 높은 농담에 노인들은 혀를 찼다.
한데 왜 여인이 아니라 자신에게 욕을 한단 말인가?
“요즘 젊은이들은 겉이 멀쩡할수록 속이 썩었어. 강호가 너무 평화로웠던 게지.”
원단의 여파가 남았던 것일까.
그리 크지 않은 유선관은 참배객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래서야 유선관 내부를 제대로 살필 수나 있을까 싶다.
‘별거 없어 보이니까.’
남천휘는 망설임 없이 발길을 돌렸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해 따뜻한 술 한 잔과 객잔의 방이 필요했다.
“어쨌든 유선관에 왔으니 오늘은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술을······.”
남천휘는 객잔과 기루가 즐비한 골목 쪽으로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반대편에 위치한 작고, 초라한 장소 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덩그러니 자리한 상점의 가판에는 주방이나 밭에서 쓸 법한 기구가 즐비했다.
“철가철방.”
남천휘는 미간을 좁혔다.
아니지? 아닐 거야.
철장경은 칠야와 창월을 만들어준 희대의 명장이 아니던가. 아직 칠야와 창월의 진가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만든 수련용 직도만 봐도 솜씨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런 사람의 후예가 다 무너져가는 철방에서 식칼이나 팔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저기.”
남천휘는 거적을 밀치며 철가철방(鐵家鐵房)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화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아.”
여자다.
사내 부럽지 않은 우람한 상체를 자랑하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칼 사러 왔습니까?”
지난 밤 술을 거나하게 드신 듯한 걸걸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불현 듯 ‘VR’에서 봤던 철장경의 얼굴을 생각했다. 상상 속에서 흰 머리를 검게 칠하고, 수염을 깔끔하게 밀어버렸다.
그러자 눈앞의 여인이 되었다.
남천휘는 여인을 가리키며 경악어린 외침을 내뱉었다.
“철장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