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70일 간의 산동일주. (3)
여인은 입꼬리를 올렸다.
“맞아요. 이곳이 철신이라 불린 철장경이 처음으로 불을 다루던 곳입니다.”
남천휘는 여인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한 마디에 말을 잇지 못했다. 철장경의 흔적을 발견하면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한데 푸줏간에 고기를 사러 온 사람 대하 듯하니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그 때 자그마한 체구의 시동이 다가왔다.
“물건을 사러 오셨나요?”
“아니.”
시동은 남천휘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그럼 이쪽에 관람비를 내시고 천천히 구경하세요.”
이건 또 무슨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지?
여기 관광지였냐?
남천휘가 머뭇거리는 사이 장년인이 끼어들었다.
“크흠, 나부터 넣겠소.”
멀리서 온 듯한 장년인이 통에 돈을 넣고, 아들로 보이는 소년에게 철가철방의 역사를 전했다.
남천휘는 그제야 철가철방의 내부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철방 안이 왜 이리 분주한가했더니 구경을 하는 사람들로 즐비했다. 그들은 철방 곳곳의 흔적을 보며 대화를 나눴고, 벽에 걸린 족자의 글귀와 그림을 눈에 담았다.
‘대명 칠년에 섬서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히던 검호가 검을 주문했고, 그 후 화산의 매화검수와 싸워 승리하며 철가철방의 검을 자랑했다고?’
남천휘는 수많은 일화가 적힌 족자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심지어 족자의 하단에는 무기를 사간 사람으로 보이는 명사들의 낙관도 찍혀 있지 않은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족자들을 모조리 살폈지만, 백파도 남추에 대한 기록은 없다.
‘쯧.’
마치 급이 안 돼서 기록하지 않은 듯한 찝찝함.
남천휘는 족자를 뒤로 한 채 돌아서다가 눈을 끔뻑였다. 시동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관람을 하시려면 돈을 내셔야 해요.”
“나는 관람을 하러 온 것이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관람을 해버렸다.
남천휘는 입맛을 다시며 돈 통에 철전 몇 개를 넣어야 했다. 상인의 자질이 보이는 꼬맹이에게 눈을 흘겨준 후 다시 화로 앞에 섰다.
“크흠.”
여인은 망치를 두드리면서도 주변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나 보다.
“물건을 사러 온 것도 아니고, 구경을 하러 온 것도 아니면 수리가 목적인가요?”
“그렇소.”
남천휘의 말에 여인은 한쪽 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몇몇 사람이 줄을 선 채로 남천휘를 경계하고 있었다. 남천휘가 줄의 말미에 서는 순간 경계의 눈빛이 사라졌다.
‘레벨이 보이지 않으니 조금 답답하기는 하네.’
대격변 패치가 진행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존재하던 레벨이 자취를 감췄다. 며칠 사이에 익숙해졌다 했거늘 막상 궁금한 상대를 앞두니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하나 재이의 격려처럼 그 동안의 강호행이 헛되지는 않았다. 일견하기에도 여인에게서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텅!
여인이 망치를 모루에 내리치며 수많은 불똥을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남천휘는 뭐에 홀린 것처럼 소리 없는 탄성을 흘렸다.
‘보고 있나. 대안아.’
자네를 능가하는 팔뚝이 여기 있네.
‘그것도 여인이야.’
그러니까 소혜에게 찝쩍대지 마라.
별 것도 아닌 게 거슬리고 있어.
‘확! 신교대에 집어넣어 버릴라!’
여인이 망치를 내리칠 때마다 여러 갈래로 쪼개진 상박근과 전완근이 꿈틀거렸다. 여인의 몸으로 소매가 없는 홑옷을 걸쳤음에도 속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장인의 풍모가 여실히 느껴졌다.
‘하긴 여기서 체통 운운하다가는······.’
살아서 나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하나 좋은 것도 한두 번이다.
망치질만 보고 있자니 정신이 멍해지는 듯했다.
결국 남천휘는 상태창을 열고, 무공총람과 퀘스트 목록을 살폈다.
‘어디 보자?’
《비천무상도》《오행군림보》《환마소혼검법》
《천성혈법》《혈인도》
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조상의 섬영검을 대신하여 환혼검이 등록됐다는 사실이다.
하나 환마소혼검법을 열어도 내용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아마 봉인된 항아리 ‘마봉파’의 비밀을 풀어야 자동으로 등록이 될 듯했다 단양자의 비사를 듣고 침술과 점혈법인 천성혈법과 혈인도가 등록됐던 것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남천휘는 비천무상도와 오행군림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두 가지 무공은 남천휘가 강해질 수 있었던 근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그렇기에 지금껏 시간이 날 때마다 무무혁명을 켜고 수련을 하지 않았던가.
그 결과 최상급 단계에 이르렀다.
오행군림보는 초심과 기본, 난해를 지나 대가의 경지를 앞뒀다.
하나 숙련도는 여전히 1에서 변하지 않았다.
‘무무혁명의 새로운 단계가 나와야 하지 않나?’
재이에게 물어봤지만, 답이 없다.
‘소도회서곡’과 ‘창해일성소’에 이은 연주를 기다릴 뿐이다.
‘설마 이것도 VIP등급과 관련이 있는 건가?’
잠시 뇌리를 스친 생각이지만, 가능성은 충분했다.
애초에 오행군림보 자체가 VIP 전용 보상에서 획득하지 않았던가.
남천휘는 한 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대격변 패치를 끝내는 것이 우선이리라.
현재 업데이트 진행률은 88%였다.
시간의 흐름으로 유추해봤을 때 며칠 안에 특급강호인승급체계 2.0이 발동할 것이다. 양념육포 반, 소금육포 반처럼 기대 반, 우려 반의 심경으로 기원할 뿐이다.
‘일단 소금 육포는 맛이 없지.’
뭐가 됐든 빨리 돌아와라.
◎ 재설정일 뿐 재시작이 아닙니다.
- 감정의 무의미한 소모는 지혜 수치에 영향을 줍니다.
야! 이 시스템 놈아.
남천휘는 괜히 인상을 쓰며 헛기침을 했다.
‘마봉파 퀘스트는 왜 진행이 안 돼?’
◎ 대상자는 아직 강철의 고향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남천휘는 미간을 찡그렸다.
‘강철의 뿌리를 찾아서.’ 퀘스트는 강철의 고향에서 발동한다. 한데 마봉파의 흔적이 청염진군에게서 비롯됐으니 당대 최고의 장인이었던 철장경도 관련이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아직 이라고?’
남천휘가 혀를 차던 중 차례가 됐다.
여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남천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얼굴에 가득한 땀으로 인해 생긴 버릇인 듯했다.
“그래, 뭘 고치러 오신 건가요?”
남천휘는 여인의 강렬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전에 당신이 자격을 갖췄을지 궁금하군요.”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몰라요?”
“당신도 나를 모르잖아요.”
남천휘의 반문에 여인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나를 모르는 사람이 있네? 이봐요! 여기 나를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자 철가철방 내부를 구경하던 자들이 박장대소했다.
“여기까지 와 놓고 철신의 후예인 소용녀 철 소저를 모르다니!”
소용녀(銷鎔女)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별호를 뒤로 한 채 남천휘가 한 마디를 남겼다.
“나 철귀협이오.”
그러자 소용녀를 비롯한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한 숨과 함께 한 글자를 덧붙였다.
“철귀유협이라고.”
그 순간 우레와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철귀유협!”
“대악인 공후탁을 무찌른 대영웅 남천휘다!”
이름을 그냥 부르는 건 무례하잖아.
소용녀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진짜 철귀유협입니까?”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네, 뭐 이제는 인정해야겠네.”
그 순간 소용녀는 대뜸 남천휘의 손을 맞잡았다.
“아아, 정말 존경해요. 정말 대단한 일을 하셨어요. 산동 강호가 삼정으로 인해 안전하다는 말은 완전 개소리였어요. 속은 썩어문드러진 소룡포와 다를 바가 없었지요. 철귀유협께서 타락한 공후탁을 처단한 것도 모자라 청도문까지 징치하러 몸소 찾아오시다니······.”
남천휘는 미간을 좁힌 채 인상을 썼다.
“잠깐만요. 나는 청도문과 은원관계가 없어요. 그리고 그들과 일부러 대적하지도 않을 겁니다. 나는 여기 사적인 일을 마무리하러 온 것일 뿐이에요.”
소용녀는 시원한 미소를 보였다.
“당신에 대한 소문은 모두 들었어요. 신공부주도 당신을 먼저 건드린 건 아니잖아요. 대협의 풍모가 저절로 발동한 것일 뿐. 분명 여기서도 그렇게 되실 겁니다.”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건 두고보자고요.”
“걱정 마세요. 당신의 책이 나올 때 분명 산동성 동부도 한 단락을 차지할 거예요.”
책이 나온다고?
입꼬리가 치솟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영웅호협에게만 허락된 영웅담이 만들어진다는 소리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크흠. 어쨌든 철 소저가 철신, 그러니까 철장경의 후예라는 거지요?”
소용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직계랍니다.”
네, 얼굴만 봐도 알겠어요.
당장이라도 소용녀가 화로 앞에 앉은 채 자신을 보고 말할 것 같았다. ‘자네가 돌아올 때까지 유선관 앞에서 숫돌을 갈고 있겠다.’는 그런 말이 뇌리를 스쳤다.
남천휘는 인벤토리에서 칠야와 창월을 꺼냈다.
“이걸 수리하고 싶어요.”
소용녀는 부러진 칼을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그러던 중 뭔가를 본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뜬 채 한 참 동안 응시하는 것이 아닌가.
“아.”
그녀가 탄성을 흘렸다.
그리고는 이내 서가에서 낡은 족자를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녀가 그것을 펼쳤을 때 남천휘도 덩달아 탄성을 내뱉었다.
“어!”
두 사람은 족자에 그려진 그림과 탁자 위에 놓은 부러진 도를 번갈아봤다.
소용녀는 남천휘를 가리키며 외쳤다.
“백파도!”
휴, 다행이네.
저 얼굴로 삿대질을 하는 순간 도둑이라고 외칠 줄 알았다. 어쨌든 ‘VR’에서 봤던 것처럼 남추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칠야와 창월을 선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다들 나가요.”
소용녀는 칠야와 창월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연인을 마주한 소녀처럼 얼굴을 붉혔다.
“어서! 어서!”
그녀는 시동에게 돈 통을 건넨 후 관람비를 돌려주게 했다.
“후! 정말 돌아왔구나.”
남천휘는 소용녀가 부러진 칼을 쓰다듬는 모습에 눈을 끔뻑였다. 저 모습이야 말로 선대의 유산을 마주한 후예가 보여야 할 정답이 아닐까 싶다. 또한 그녀가 보여준 야장(冶匠)에 대한 열정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겉모습과 달리 훌륭한 사람이야.’
남천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좋으신가요?”
소용녀는 새끼 강아지라도 마주한 소녀처럼 도신을 쓸어내렸다.
“칠야와 창월. 이걸 만난 자가 철신의 진정한 후예거든요.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있어요. 이 거지 같이 코딱지만한 대장간을 벗어나 화려한 내 철방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요!”
잠깐만, 뭔가 순수함이 옅어진 것 같은데?
“어디로 돌아가는데요?”
소용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무진철원. 내 것을 되찾으러 갈 수 있게 됐어요.”
무진철원이라면 남천휘도 종종 애용하던 철방이 아닌가. 중원삼대철방 중 한곳인 무진철원은 화산파의 매화검수들에게 검을 만들어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또한 지난 날 남천휘는 무진철원의 감찰단주인 유설옥과 친교가 있었다.
강하고, 아름답고, 정직한 여자였다.
‘미적 서열이 기준치 이하였지만······.’
당신도 모르게 차버려서 미안해요. 유 소저.
그나저나 그가 알기로 무진철원의 원주는 유 씨가 아니던가.
‘설마 철장경이 만든 무진철원을 빼앗긴 건가?’
소용녀는 남천휘의 걱정스런 눈빛에 손사래를 쳤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말 그대로 맡겨 놓았으니까. 금방 찾아올 수 있어요. 그나저나 그림으로만 보던 기물을 눈으로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별 일 아니면 다행이고.
하나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만약 대격변 패치가 진행 중이지 않았다면 분명 퀘스트 알림이 울렸으리라.
아니라니까 일부러 캐묻지는 말아야겠다.
남천휘는 화제를 돌렸다.
“아! 봐줬으면 하는 물건이 하나 더 있는데······.”
마봉파를 꺼내려 했다.
하나 소용녀는 칠야와 창월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지금은 이것에만 집중하고 싶네요. 그래야만 하고요. 칠야와 창월은 낙야묵철이라는 특수한 물질로 이뤄졌어요. 부러진 것을 이으려면 같은 무게의 철이 더 필요합니다. 그리고 예상하셨다시피 낙야묵철은······.”
옛 인연으로 인한 공짜는 없는 듯했다.
“같은 무게의 금?”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요.”
그녀는 칠야와 창월을 가리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은 먼저 고치고요.”
그리고 남천휘도 쫓겨났다.
잠시 후 철가철방의 문이 닫혔고, 당분간 객을 받지 않는다는 봉문패가 내걸렸다.
“그럼 삼일 동안 뭘 하면서 돈을 벌지?”
그런 남천휘의 눈에 유선관이 들어왔다.
*
중년 여인의 손을 맞잡은 아이가 유선관의 구석을 가리켰다.
“어머니, 저 사람은 뭐하는 거예요?”
“글쎄다.”
유선관 내부를 구경하던 노인에게는 익숙한 광경인 듯했다.
“아마 의원이겠지. 이곳은 백 년 전 단양자께서 말년을 보내신 곳이란다. 그래서 의생들이 몇날며칠이고 기원을 올리지. 단양자의 혼백을 마중한다나?”
노인의 곁에 있던 노파가 혀를 찼다.
“쯧쯧, 사람을 구하는 의원이 되려고 하면서 귀신이나 찾고 있으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심하네요.”
“녀석, 모르는 사람한테 함부로 그런 말을 하는 건 실례야.”
그러더니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듯 아들을 이끌고 황급히 자취를 감췄다.
남천휘에게는 그들의 기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니야! 아니라고!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발 아래 그려진 예(乂)자 표식을 바라봤다.
유선관은 C등급 공백지였고, 이 자리가 바로 성소를 등록할 수 있는 장소였다.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지.’
일전에 재이는 성소마다 특색이 있다고 했다.
당시에는 그저 성소마다 포인트를 활용할 수 있는 제약이 있는 정도로 여겼다.
하나 유선관의 특징은 달랐다.
◎ 단양자에 대한 고결한 경외심을 품은 상태로 동조화 작업이 진행중입니다.
그렇다.
한 번 손을 대면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 결과 남천휘는 이틀 째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유선관을 포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남천휘가 아는 한 성소의 주인이 된 후 유지의 특기를 발휘하여 보물창고를 찾는 것이 부자가 되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나저나 덜 창피한 방법은 없는 거냐?’
◎ 일전에 공유한 정보대로 유선관은 단양자의 손이 닿은 장소입니다. 그렇기에 천성혈법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행위로 동조화의 잔여 시간을 줄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닥쳐! 갑자기 죽어가는 사람을 어디서 구하는데?
그 순간 유선관의 입구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 사람이 쓰러졌다.”
“숨을 쉬지 않아요!”
“의원을 불러. 혹시 이곳에 의원이 없습니까?”
그 순간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담담한 한 마디가 울렸다.
“의원, 여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