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70일 간의 산동일주.
76, 70일 간의 산동일주.
‘고급? 고오급?’
남천휘는 가뭄 끝에 몰려온 먹구름이 똥비를 뿌린 듯한 기분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 고급은 문제가 아니지.
◎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자수정이 지급됐습니다.
◎ 비책 포인트가 지급됐습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알람의 홍수 속에서 멍하니 눈앞에 떠 있는 선택지를 바라볼 뿐이다.
‘하아. 하급 모드라니.’
불현 듯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가 시작됐던 첫 날이 떠올랐다. 지금이야 익숙해졌지만, 추궁과혈을 받는 것처럼 황홀한 경험과 함께 튜토리얼을 완료하지 않았던가.
그 후로 파란만장한 모험이 계속됐다.
미녀와 인연을 맺고, 보물을 발견하거나, 악인을 징치하는 대협이 되기도 했다.
‘라고 거창하게 포장해봤자······.’
산동 강호에서 뛰어놀았다.
같은 것을 먹고,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익숙한 강호였다. 그러니 ‘남천휘, 너는 아무 것도 몰라.’ 라고 타박을 해도 수긍할 수 있으리라.
‘그래도 그렇지. 내가 꽃길만 걸은 것도 아닌데 너무 심하지 않냐?’
지금껏 하수(下手)와 동의어일 것이 뻔한 하급(下級)으로 살아왔다는 말이 아닌가. 마치 지금까지의 강호행이 부정당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후, 일단 들어나 보자.”
◎ 특급 강호인 승급 체계는 단계적 성장을 기반으로 진행됩니다. 튜토리얼을 시작으로 초심자와 전문가 단계가 존재합니다.
초심자라는 말에 한 번 명치를 얻어맞은 듯했다.
이 녀석은 일부러 상처를 헤집는 단어만 골라서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흥! 나는 무적자잖아. 안 해도 그만이겠지?’
그러니까 선택지를 줬겠지.
남천휘가 지금껏 겪어온 시스템은 가부의 결정이 애매모호했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일을 처리하는 건지 궁금할 정도였다.
만약 무적자가 되지 않았다면.
‘홧병이 나서 뒷목 잡고 쓰러졌을 지도······.’
일단 들어보고 결정하자.
하나 남천휘의 결심은 재이의 첫 마디에 산산조각이 났다.
◎ 하급 모드는 대상자의 편의를 위해 다양한 부가 기능을 제공합니다. 반면 고급 모드는 복잡한 정보 제공을 일원화하여 간략화 합니다. 고급 모드 선택 시 편의 기능이 대부분 삭제되며 전문가 용으로 재설정됩니다.
“삭제된다고?”
◎ 신안으로 인해 적의 레벨을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또한 스텟의 구분이 최소한도로 제한됩니다.
미친 것아!
좋은 건 다 가져가면 뭘 어쩌라는 건데?
남천휘는 나라 잃은 백성처럼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이 놈은 나라만 뺏어가는 것이 아니라 땅도 뺏고, 집도 뺏고, 다 가져가더라.
◎ 향후 퀘스트는 무작위로 제공되며, 더 이상 대상자의 보호 기능을 활성화하지 않습니다.
남천휘는 눈을 끔뻑였다.
갑작스런 정보의 홍수에 말을 잇지 못했다.
‘자세하게 설명해봐.’
재이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한 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껏 보호 받기는 했네.’
남천휘는 자신이 해결했던 수많은 퀘스트를 떠올렸다. 적재적소에 발동하던 퀘스트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경험치와 보상을 얻었던가. 한데 그것은 남천휘의 레벨에 맞춰 제공된 것에 불과했다.
일례로 산동강호가 아무리 변두리라고 해도 수많은 사람이 오갔을 터였다. 하나 지금껏 제대로 된 고수를 만난 기억이 없다.
그 이유를 재이가 알려줬다.
남천휘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게다.
구파오가를 비롯한 사마의 고인들이 오갈 때면 퀘스트 발동을 자제하고 당면 퀘스트에 집중하도록 보호했다는 것이다.
‘고급 모드가 되면?’
◎ 퀘스트 레벨 제한이 사라지고, 인맥의 범주가 중원 전역으로 확장됩니다.
죽을 위험도 커진다는 말이네.
남천휘는 재이의 상세한 설명을 들을수록 고급 모드에 대한 기대감을 접었다. 무엇보다 상대의 레벨 수치나 레벨의 색을 볼 수 없다면 원활한 강호행에 큰 변수가 될 터였다.
◎ 대상자는 지금까지 적아를 구분하고, 상대의 무위를 가늠하는 능력을 키웠습니다. 상대의 행실을 통해 선악을 판단하고, 독자적인 행동 습성으로 인해 최고와 최선의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그러더니 더 이상 편의에 물들지 말라는 충고를 남기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지금부터가 진짜라고 알려주는 듯했다.
“야! 무섭게 왜 그래? 너 같으면 하겠냐?”
남천휘는 너스레를 떨며 잠시 말을 아꼈다.
하나 재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남천휘가 먼저 말을 꺼냈다.
“고급 모드의 장점은?”
◎ 시스템에 대한 개인적인 접근이 이뤄집니다.
◎ 상위 정보의 제한이 해금됩니다.
◎ 상위 정보의 검색이 가능합니다.
◎ 비책(秘策) 목록이 활성화됩니다.
◎ VIP 등급 상승이 허용됩니다.
◎ 회회회판에서 전설 보상에 대한 보급이 추가됩니다.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결국 하급 모드를 유지하면 여전히 편하게 살 수 있지만, 상위 단계를 노릴 수 없단다. 다만 고급 모드를 선택하면 난이도가 올라가는 만큼 누리는 것이 가능해질 터였다.
지난 날 막 총관의 한탄이 떠올랐다.
술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그러더라.
자신의 꿈은 원대하나,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했다. 더 많은 걸 누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순리라 하지 않았던가. 하나 자신은 그럴 수 없었기에 상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했다.
“쯧.”
남천휘는 침음을 흘렸다.
자신의 선택에 맡긴다지만, 특급 강호인이 되기 위해서라도 거절 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후우.”
그는 호흡을 조절했다.
그리고 선언을 하듯 읊조렸다.
“고급 모드를 개방하겠어.”
그 순간 재이의 알림이 평소와 달리 기계적인 어투로 들려왔다.
《 레벨업 시스템 2.0이 실행됩니다.》
- 대규모 업데이트로 인한 인스톨이 진행됩니다.
- 회회회판이 일시적으로 비활성화 됩니다.
- 퀘스트 발동이 일시적으로 비활성화 됩니다.
업데이트라는 것은 시스템을 상위 단계로 갱신하는 것이라 했다.
그 말처럼 시야 상단에 검은 막대가 나타났다.
‘후우.’
남천휘는 검은 막대 위에 적힌 세 글자를 읊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대격변이라······.”
재이의 설명처럼 엄청난 변화가 이뤄질 터였다.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었다.
《남천휘(南天輝)》
- 소속 : 대두동(大頭洞)
- 호칭 : 새내기 지략가.
- 별호 : 철귀협.
- 등급 : 148
- VIP : 3등급(잔여 점수 : 5250)
- 성소 포인트 : 93000
근력(筋力) : 800 민첩(敏捷) : 840
체력(體力) : 850 지혜(知慧) : 920
내공(內功) : 2200.
- 미 배분 능력치(+0)
▼ 능력 ▼ 장비 ▼ 성취
▼ 특기 ▼ 비책 ▼ 인맥
토끼를 잡겠다고 눈밭을 헤맬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용봉쟁투에서 우승하고, 곤륜산인의 음모를 분쇄했다. 그리고 겨울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산동강호의 한 축이었던 신공부를 뒤집어엎었다.
남천휘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거렸다.
‘할 만큼 했네.’
이번 계절의 자신은 업데이트의 명칭처럼 대격변(大激變)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제 2막 ‘중원행’을 떠올리며 걸음을 내딛었다.
“아!”
남천휘는 성소 포인트를 사용해서 대화동의 기후를 조절했다.
대기의 흐름은 느리게, 지기의 흐름은 강렬하게.
그는 평소보다 빠르게 지칠 신교대의 무인들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너희들도 대격변해라.”
이제 동쪽으로 갈 차례였다.
그 사이 검은 막대에 새겨진 진행 상태가 2%로 증가했다.
*
두 개의 관도가 교차되는 작은 마을이다.
하나 규모에 비해 활성화된 저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무인과 학자, 상인과 표사.
그들을 통해 입에 풀칠하는 양민들이 뒤섞여 사는 동네였다.
화복을 입은 풍만한 체구의 여인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뒷골목으로 향했다. 잠시 후에는 초췌한 몰골의 아낙이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그렇게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십여 명의 여인들이 작은 차이를 두고 뒷골목에 들어섰다.
골목의 끝에는 허름한 초옥이 존재했다.
물을 끓이며 날파리를 쫓는 노파가 헛기침을 할 때마다 문이 열렸다.
“열두 명, 모두 도착했습니다.”
노파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초옥에 들어서는 걸 마지막으로 장정의 허벅지만큼 두꺼운 나무가 걸쇠에 걸렸다.
“철괴 파파가 도착했습니다.”
철괴 파파는 낡은 초옥에 발을 들이자마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수석을 배알합니다.”
좌우에 여섯 명씩 모두 열두 명의 여인이 면사를 쓴 채 앉았다. 하나 상석에 앉은 여인만은 제 얼굴을 드러낸 채 고혹적인 자태를 자랑했다.
지난 날 백결공과의 회합에 자리했던 산동수석이다.
그녀는 백결공에게 절절 맸던 것과 달리 누구보다 고혹적인 표정으로 염기를 흩뿌렸다.
“철괴 파파와 혈홍십이녀가 한 자리에 모였으니 참으로 든든하군요.”
“수석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산동수석이 빙긋 웃으며 손을 내젓자, 철괴 파파가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었다.
“자! 보고를 시작하라.”
마치 백결공이 각지의 수석들을 모아놓고 보고를 받던 것과 다를 바가 없는 회의였다.
“일홍입니다. 융소, 백지, 공령에 자리 잡은 다섯 방파에 혈무단을 뿌렸습니다. 거래 횟수는 이십오 회이며 거래 금액은 은자 팔만구천 냥입니다.”
“좋아. 역시 일홍이다. 뒤처리는?”
일홍은 득의의 미소를 지은 채 눈을 빛냈다.
“누구도 일원은 물론이고, 수석께서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산동수석의 치하를 끝으로 일홍의 보고가 끝났다. 뒤이어 혈홍십이녀의 보고가 서열대로 이뤄졌다. 한데 팔홍의 보고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거래 금액은 이만구천 냥입니다. 한데 중간 상인 역할을 맡은 홍문회가 집결지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철괴 파파의 일갈이 울렸다,.
“크흥, 버러지 흑도 놈이 도망이라도 친 게냐?”
“확인 중입니다. 하나 은자 오천 냥에 눈이 멀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산동수석은 문제가 생겼음에도 조금도 인상을 쓰지 않았다.
“독탄을 나눠주는 시기가 언제더냐?”
“황산 용두암에서 이십 일 후입니다.”
“그 때까지 흔적을 찾아보라.”
팔홍은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속하가 불민하여 수석의 대업에 누를 끼쳤습니다.”
산동수석은 나삼을 흐느적거리며 다가와 팔홍의 어깨를 감쌌다.
“괜찮아. 다른 동무들까지 문제가 생긴 건 아니지 않느냐? 네 몫은 다른 동무들이 메워 줄 것이다. 잊지 마라. 일원 앞에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해.”
팔홍은 산동수석이 백결공 앞에서 그러했듯 눈시울을 붉혔다.
“고맙습니다.”
잠시 후 혈홍십이녀는 올 때와 같은 순서로 자취를 감췄다.
산동수석은 초옥의 반대편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화려한 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주.”
“루주를 뵙습니다.”
어여쁜 여인들이 하나 같이 산동수석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산동수석은 화사한 미소를 유지한 채 가장 큰 누각으로 향했다. 잠시 후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은 철괴 파파가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말했다.
“낙현에 은거기인은 없습니다. 기껏 해야 금군의 교두 노릇을 하던 폐물이 있을 뿐이지요.”
“흐음! 거래 장소를 확보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요.”
“네. 그리고 그가 도착했습니다.”
산동수석은 몇 번이나 입매를 매만졌다.
잠시 후 그녀의 입가에는 붓으로 그린 것처럼 화사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루주께서 드십니다.”
산동수석은 시비의 말이 사라지기도 전에 귀빈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는 덩치 큰 청년이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다.
권무악 황보장천.
산동성의 삼정 중 북부를 차지했던 황보세가의 소가주가 기루에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황보장천을 유혹하듯 읊조렸다.
“산동성을 가질 준비가 되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