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내 땅은 내가 지킨다. (4)
*
혈사(血事)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즉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이를 닦기보다 회회회판을 돌려야지. 요즘은 매일 지급되는 1회 무료 실행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일상이다.
물론 자수정으로 돌리는 것보다 당첨 확률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띠링-
《숫돌 10개가 인벤토리로 지급됩니다.》
이미 모든 무기와 방어구를 새 것처럼 만들어놓은 후였다. 그렇게 소모했음에도 보급창에 남은 숫돌의 개수만 해도 수백 개에 이르렀다.
‘후훗, 특급 강호인이 못된다고 해도 특급 칼갈이는 될 수 있겠네.’
하나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무료 실행권이 무위로 돌아갔으나,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했던가.
남천휘는 보급창에 모아놓은 자수정을 보며 헤벌쭉 웃었다.
‘구천육백 개.’
수많은 유혹을 이겨내며 모아놓은 자수정이다.
이게 있는 한 무료 실행권 따위에 실망하는 치졸한 녀석이 되지 않으리라.
이미 연속 뽑기를 세 번이나 할 수 있는 물량이다.
하지만 남천휘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십 번 정도 돌리면 최소한 영웅 등급을 두어 개는 주겠지.’
이쯤이면 나올 때도 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퀘스트가 안 뜨네?’
적의 기습이 예정됐다.
게다가 무대는 자신의 집이 아닌가.
재이라면 없는 퀘스트라도 만들어서 수행하게 만들 터였다. 한데 녀석이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조용하니 오히려 불길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늦어도 습격할 때까지는 주겠지.’
남천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다행이 아니라 천우신조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퀘스트와 성소가 동시에 침입자를 알려준다면 놓치고 싶어도 놓칠 수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는 회회회판을 뒤로 한 채 책을 펼쳤다.
책을 읽을 때마다 지혜 수치가 상승하니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렇게 혈사 당일의 오전이 지나갔다.
‘나, 이렇게 느긋해도 되는 거야?’
남천휘는 스스로를 걱정할 만큼 완벽한 평정심을 유지했다. 이야기책에서는 주인공이 겪어야 할 고난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두세 수 아래의 적이 몰려올 뿐이다.
거기에 특급강호인 승급 체계의 힘을 더한다면 왕망이 무슨 수를 써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정오에 북풍대주 조상이 북풍대원 십여 명과 함께 곡부남가의 정문에 모였다. 북풍표국의 호연척과 합류하여 표행을 다녀오기 위함이다. 그는 남천휘를 향해 눈인사를 한 후 곡부남가를 떠났다.
‘좋아, 첫 단추를 꿰었으니.’
왕망의 혈사는 아직 벌어지지 않았지만, 남천휘의 계획은 이미 시작됐다.
그는 곡부남가 앞으로 펼쳐져 있는 텅 빈 들판을 바라봤다.
‘…….’
적의 의도가 어찌됐든 왕망은 곡부남가를 손에 넣고 싶어 했다. 새로운 세력을 일구는 것이 아니라 곡부남가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주대낮에 혈사를 일으킬 리 만무했다.
‘그러니 아무래도 해 질 무렵이겠지?’
그는 시야 구석의 지도를 살펴봤다.
이미 ‘문파 관리’를 상시 실행시켜놓은 상태였다.
‘문파 관리’는 성소의 상위 단계가 아니던가.
그러니 적이 나타는 순간 군사를 대신해 재이가 경고를 보낼 것이고, 지도에는 적의 규모가 표시될 터였다.
이제 슬슬 두 번째 단추를 꿰어야 했다.
“뭐가 좋을까?”
걸레질을 하고 있던 소혜가 귀를 쫑긋거리며 물었다.
“점심 드시려고요?”
“아니다! 이 개구리야!”
남천휘는 소혜의 입술을 삐죽거리게 만든 후 성소 포인트를 확인했다. 며칠 사이에 ‘23100’이었던 포인트가 ‘26000‘까지 올랐다.
멀리서 성소의 군사를 몰래 감시하는 기분이다.
‘크큭, 포인트가 안 올라가면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는 뜻이니.’
어찌됐든 포인트는 많을수록 좋았다.
군사가 열심히 모은 성소 포인트는 곡부남가의 방어 태세를 재정비하는데 요긴하게 사용되리라.
남천휘는 본격적으로 성소 포인트로 구입할 수 있는 공능의 목록을 펼쳤다.
‘일단 지난번에 효과를 톡톡히 본 풍혈하고…….’
《풍혈(風穴)》
- 곡부남가 전역에 가솔로 포함되지 않는 모든 존재의 이동속도를 10% 늦춥니다.
- 유지 시간 : 이각.
- 소모 포인트 : 3000
남천휘는 한 숨을 흘렸다.
풍혈에 대한 소모 포인트가 몇 배로 늘어났다.
심지어 유지 시간은 줄었다.
재이의 말처럼 정기가 가득한 산속에서 펼칠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하잖아. 예약!’
이내 풍혈의 발동이 예약되었다는 재이의 알림이 뒤이었다. 그는 휴가를 맞이한 가장이 계획표를 짜듯 조심스럽게 포인트를 분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목록을 확인하던 중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맙소사! 호풍환우도 가능한 거냐?’
태풍을 불러일으키고, 폭우를 내리게 만드는 건 그야말로 재해가 아니던가.
물론 소모 포인트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하나 수십만 단위의 포인트 소모보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남천휘는 혀를 내둘렀다.
‘휴우, 내가 의심한 건 아니지만, 이쯤 되면 진짜 하늘이 복을 내린 게로구나.’
잠시 후 그가 눈을 빛냈다.
호풍환우는 불가능해도 포인트로 구매가 가능한 재해(災害)가 보였다.
《무해(霧海)》
- 곡부남가 전역에 옅은 안개를 생성합니다.
- 유지 시간 : 이각
- 소모 포인트 :11000
남천휘는 대화동과 대두동의 군사를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너희들은 진짜 최고야!’
제아무리 옅은 안개라고 해도 깔리는 순간 적의 시계를 어지럽힐 것이 분명했다. 무해에 몇 가지 진법을 추가한다면 천릉곡에 펼쳐져 있던 미환비림과 같은 효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섬예검귀가 맛 갈 정도의 위력이니 이건 절대 손해가 아니지.’
남천휘는 무해까지 예약을 했다.
12000 포인트가 남았다.
이제 진법을 설치할 차례였다.
한데 심산유곡이 아니기에 자동으로 생성되지 않았다. 다행히 진법 설치에 필요한 재료는 창고나 주변에서 충분히 구할 수 있는 물품이다.
‘어디가 좋을까?’
남천휘는 특기 ‘유지’를 활성화했다.
그 순간 시계가 급격히 확장되며 곡부남가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듯했기에 주요 지점을 찾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운연각으로 통하는 통로는 두 곳이네.’
운연각(雲連閣)은 내원과 외원의 경계로 가솔들의 집합지점이다. 새로 지어진 건물로 다른 곳과 달리 삼층 누각이다.
‘통로 두 곳에 진법을 설치하자.’
애초에 적의 난입 자체를 봉쇄할 요량이다.
하나 만에 하나 적이 난입한다고 해도 대비책은 존재했다. 서산노옹과 백주검이 운연각의 입구를 지키고, 위에서 가솔들이 돌을 던진다면 적도들은 쉬이 접근할 수 없으리라.
‘진천뢰라도 던지지 않는 한.’
대응할 시간은 충분했다.
남천휘는 인벤토리에 넣어둔 돌을 떠올렸다.
어차피 진법을 설치하기 위해 운연각으로 거동을 해야 했다. 돌과 자갈은 그 때 올려두면 될 터였다.
“그럼 가 볼까!”
그가 몸을 일으키자, 소혜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강아지도 아니고 매번 저런 반응이라니.
“소가주께서 알려주신 것 기억하고 있지?”
소혜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천진난만한 녀석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그렇게 계속 웃어라.
‘내일은 절대 비가 오지 않을 테니까.’
*
남천휘는 곧장 비운고로 향했다.
본래 가주나 소가주의 허락이 없으면 출입이 불가능한 장소였다. 하나 수뇌부로 인정받은 이상 북풍대는 알아서 길을 열었다.
“홍 조장.”
“예.”
북풍대 이조장, 홍춘이의 레벨은 28이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엄청나게 성장한 셈이다.
하지만 남천휘는 이미 강호의 실상을 어느 정도 몸으로 느끼지 않았던가. 저런 레벨로는 강호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없으리라.
‘아직 멀었구나.’
저들이 하루 빨리 강해져 곡부남가를 지킬 수 있을 날을 기대할 따름이다.
“오늘은 경계에 만전을 기하세요. 술과 외출, 그리고 근무지 이탈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홍춘이는 잠시 머뭇거렸다.
남천휘의 명령을 거부하려는 것이 아니라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한 게다.
“귀협의 명대로 경계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믿습니다.”
레벨은 낮지만 충성도만은 대단했다.
남천휘는 한 마디를 남긴 후 비운고로 들어섰다.
몇 가지 약재를 챙긴 후 일반 창고로 향했다.
그곳에서 목재와 석등처럼 진법 설치에 필요한 재료를 보급창에 넣었다.
한데 한 가지만은 보이지 않았다.
‘마비분만 없네.’
문파 관리의 목록을 보면 분명 곡부남가 내에 마비분이 존재했다. 하나 비운고와 일반 창고를 뒤져봐도 마비산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천휘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마비분처럼 위험한 약재를 지녔을 만한 사람은 막대통이 유일했다.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손님을 맞이하든, 술을 마시든 집무실을 떠날 리가 없다. 아니나다를까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아, 이건.’
솔직히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아무리 두주불사라고 해도 오늘의 곡부남가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남천휘라면 몰라도 막대통은 긴장해야 마땅했다.
한데 막대통의 얼굴은 술 냄새가 진동하는 것과 달리 멀쩡하지 않은가.
“술 뿌렸다. 평소와 같아야 한다며?”
막 총관은 남천휘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본 사람처럼 반응했다. 결국 남천휘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용건을 털어놓았다.
“마비분은 많지 않아. 하나 마비초는 많다.”
남천휘는 오히려 화색을 띄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비분(痲痹粉)은 외상을 치료하는 금창약의 재료였다. 하여 마비분을 석등에 넣고 태워서 연기를 낼 생각이었다. 한데 마비초는 마비분의 원료이니 효과는 배가될 터였다.
막 총관은 마비초가 든 상제를 내밀며 물었다.
“천홍과 얘기를 끝냈다. 한데 정녕 너 홀로 감당할 수 있겠느냐?”
“무슨 뜻인가요?”
“적의 숫자를 가늠할 수 없고, 섣불리 도주했다가는 큰 화를 입을 수 있다며.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신공부에 도움을 청하는 것은 어떻겠느냐?”
남천휘는 왕망과 진조문의 관계를 짧게 설명했다.
“외조부의 노국장마저 따돌리는 자들입니다. 곡부남가를 위해 무인들을 보낼 리가 없어요.”
막대통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아, 일평생 장사치 노릇만 했더니 강호의 음험함을 깡그리 잊었구나. 쓸모없는 자가 되어버렸어.”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어르신이 돈을 제일 잘 버십니다. 그거면 됐잖아요.”
남천휘의 위로에도 막대통의 표정은 쉬이 밝아지지 않았다.
“내가 할 일이 있느냐?”
없다.
하나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부탁했다.
“가솔들이 모두 모이는 걸 확인해주세요. 총관이 아니면 가솔들의 이름과 얼굴을 일일이 대조하는 게 불가능할 테니까요.”
막대통은 그제야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알았다. 내가 모두 챙기마.”
*
남천휘는 틈틈이 인명록을 펼치며 가솔들의 상황을 살폈다. 내외(內外)의 구분이 가능했기에 혹시 모를 배신자의 존재도 파악이 가능했다.
하나 해가 서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는 순간에도 가솔들은 곡부남가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저녁을 준비하느라 분주해 보였다.
“뭐해요?”
천수련의 일침에 남천휘는 고개를 들었다.
인명록에 집중하다보니 탈각진체법을 수련하던 것도 잊은 게다.
남천휘는 자신의 턱 끝에 닿은 천수련의 검을 슬쩍 밀어냈다.
“미안해.”
“벌써 어두워졌잖아요. 수련을 왜 이 시간에 하자고 하는 건지. 그나저나 졸았어요?”
그렇다고 치자.
건물 세 채 너머에서 오락가락 하고 있는 하인을 관찰했다고 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은 평소와 다르네요.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요?”
역시 눈치는 천수련이다.
남천휘가 변명을 궁리하던 순간이었다.
띠링-
◎ 적이 출현했습니다.
띵! 띵! 띵! 띵! 띵! 띵! 띵!
그 순간 곡부남가의 영역으로 표시되던 지도의 경계에 붉은 점이 번쩍였다. 하나는 곧 둘로 변했고, 열로 늘었으며, 이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동시다발적으로 점멸했다.
‘왔다!’
남천휘는 지붕 위로 몸을 날렸다.
철컥!
남천휘가 팔을 뻗는 순간 질풍뇌격궁이 나타났고, 반대편 손을 오므리는 순간 철시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 들어왔다.
끼이이이익-
화살을 걸고, 시위를 당겼다.
‘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
재이의 알림이 뒤이었다.
《지금부터 ‘기습 공격’을 시작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