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17화 (117/305)

57, 내 땅은 내가 지킨다. (3)

*

거사 하루 전.

왕망은 그 어느 때보다 표정을 관리했다.

떨어지는 낙엽도 피할 만큼 조심스러웠다.

“내일 표행 준비는 잘 되어 가는가?”

총표두 호연척은 자신의 가슴을 두드리며 호언장담을 했다.

“표물을 운송할 관도까지 선별이 끝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산적이나 화적떼의 난립이 예전보다 줄어든 듯하군요. 이 또한 남 소협의 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용봉삼협의 위상은 하루가 다르게 퍼졌다.

천릉곡에서 수백 명의 화적을 섬멸했다는 소문은 꺼져가던 불씨에 풀무질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왕망은 억지웃음을 짓기 위해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곡부남가 쪽에서 연통은 왔는가?”

“네, 북풍대주가 직접 온답니다. 북풍대 십여 명과 내일 해가 지기 전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잘 됐군. 자네만 믿겠네.”

호연척은 다시 한 번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왕망 또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양측의 껄끄러운 자들을 모조리 외부로 내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늘도 나를 돕는구나.’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표국의 일을 처리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다 저녁 무렵 저자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가장 화려한 기루에 들어섰다.

아는 척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공수를 할 만큼 여유를 부렸다. 오히려 자신을 드러냄으로서 의심을 피하려는 게다.

별실에 들어서는 순간 웃음기를 지웠다.

이미 기녀들을 물리고, 귀한 손님과 독대를 한다고 주문을 해놓았다. 귀한 손님 역할은 믿을 수 있는 수하에게 맡겼다. 수하는 왕망을 마주하자 종복을 자처하며 무릎을 꿇었다.

“신룡대주가 주인을 뵙습니다.”

왕망은 지난 몇 년 간 곡부남가로 보내야 할 자금을 빼돌렸다. 그 돈을 모조리 세력을 일구는데 사용했고, 그 결실이 바로 신룡대다.

“수하들은?”

신룡대주는 공손히 대꾸했다.

“열 명 정도 근처에 대기시켰습니다.”

“혹여 수상한 자가 있을 수 있으니 경계에 만전을 기해라. 대업의 날이 다가왔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마음을 다잡아야 해.”

“신룡대라는 귀한 이름을 주셨으니 결코 방심하지 않을 겁니다. 이미 오십여 명의 정예가 모처에서 주인께서 내리실 명령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왕망은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신룡대는 곡부남가의 입김이 닿은 북풍표국과 자신의 명령이라면 살인도 불사할 자들이 아니던가.

뿌듯했다.

마치 일문의 주인이 될 준비를 마친 듯한 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별실에서 대기하라.”

“존명!”

왕망은 신룡대주가 옆방으로 이동하자, 눈을 지그시 감았다.

“하아.”

존명이라는 한 마디만으로도 사타구니에 힘이 불끈 들어가는 듯했다.

‘곡부남가를 차지하면 공격적으로 상권을 차지하는 거야. 진조문을 등에 업는다면 곡부 남부를 손에 넣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그리고 더욱더 성세를 넓힌 후에는 절강성까지…….’

왕망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렇게 강호 정복까지 염두에 두려는 순간 서늘한 기운이 전신을 옥죄었다.

“크흠. 오셨소.”

눈앞에는 어느새 혈인검이 자리했다.

“저 쪽이 신룡대인가?”

“그렇소. 제법 쓸만한 자들이외다.”

혈인검은 미간을 좁혔다.

신룡대라는 광오한 이름과 달리 신룡대주의 무위는 대단하지 않았다. 하나 거사를 앞두고 왕망의 기를 꺾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투입하시오.”

“그럴 생각이었소.”

왕망은 헛기침을 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나저나 진조문에서 보낸 자들은 어느 정도인지 물어도 되겠소이까?”

“절정 고수만 수십 명이외다. 곡부남가를 잿더미로 만드는 건 물론이고 쥐새끼 한 마리 남겨 놓지 않을 거요. 당신을 방해할 자들은 당연히 한 명도 남지 않겠지. 물론 화적떼의 노략질로 보이게 손을 써뒀소. 당신은 수다스러운 자들을 모아 소문만 내면 될 게요.”

혈인검의 말에 왕망은 호언장담을 했다.

“진조문만 믿겠소. 그리고 진조문주, 나아가 신공부주께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이 왕 모의 다짐을 전해주시오!”

“신공부가 그대와 함께 할 거요.”

왕망은 신공부주를 거론하자, 자신의 격이 올라갔다고 여겼는지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정확한 거사 시간은 언제로 정하셨소?”

“내일 술시, 일몰과 함께 진입한다.”

혈인검은 장천회주와 복면인을 보며 말했다.

“제일 목표는 남천휘. 제이 목표는 천수련. 두 연놈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곡부남가를 잿더미로 만들어도 연놈을 놓치면 실패나 다름없어.”

장천회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세가의 권법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겠군요.”

본래 공태령을 죽이고, 황보세가에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익힌 권법이다. 하나 곡부남가에 흔적을 남긴다면 신공부와 황보세가가 대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

“장천회는 모두 대기 중인가?”

“열 명 모두 모였습니다.”

혈인검의 시선이 복면인에게 꽂혔다.

“제검방도 마찬가지입니다.”

식견이 높은 자가 있었다면 대경실색을 했으리라.

제검방(諸劍幇)은 추성 외곽에 위치한 중견 방파였다.

십 년 전 외곽에 터를 잡은 이후 빠르게 성장한 방파로 유명했다. 한데 그들에게도 곤륜산인의 손길이 닿아 있었던 셈이다.

장천회주는 탄성을 흘렸다.

“휴우, 장천회와 제검방, 혈랑회만 해도 이백 명이 넘습니다. 거기에 낭인까지 더하면 삼백은 족히 되겠군요. 이거야 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가 아닙니까.”

“왕망이 비밀리에 키운 수하들도 합류한다. 오십 명이라더군. 잊지 마라. 우리는 곡부남가를 점거하려는 것이 아니야.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쓸어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때 비처 밖에서 너털웃음이 들려왔다.

“클클, 쥐새끼 한 마리 잡는다면서 개떼처럼 모여들었구나.”

황도쌍노(黃島雙老)의 등장이다.

곤륜산인이 의형으로 모신 두 노인이 나타나는 순간 비처의 무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두 노인은 쌍둥이처럼 꼭 닮았다.

머리와 수염의 모양이 비슷했고, 복장은 아예 동일했다. 그러니 얼핏 보면 쌍둥이라고 여겨질 만큼 닮아 있었다. 두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허리춤에 맨 검의 위치가 전부였다.

좌수(左手)와 우수(右手).

그렇기에 좌노와 우노라 칭했다.

“남천휘라는 애송이는 우리가 맡는다.”

“갈벽의 원한을 풀어주는 건 우리 몫이야. 너희들은 주변만 정리하여라.”

두 사람은 그 말만 남기고 비처를 떠났다.

제검방주는 침음을 흘렸다.

“황도쌍노의 위명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나 마치 유람이라도 온 것처럼 여유롭군요.”

혈인검은 단호하게 말했다.

“저들은 저래도 돼.”

그는 곤륜산인에게 황도쌍노의 비사를 전해 들었다.

‘산인이 저들에게 황도를 허락한 데에는 이유가 있지. 저들이 환혼검을 익힌 이상 남천휘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

본래 쌍노는 강호칠대금문 중 한곳인 자하림(紫霞林) 소속이다. 그들은 자하림의 비전인 환혼검의 비급을 들고 도망쳤다. 곤륜산인은 그것을 눈치 채고, 저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한 게다.

황도쌍노가 지난 십 년 간 환혼검(幻魂劍)을 익힌 이상 거사는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꽈드득.

혈인검은 비참하게 죽은 곤륜산인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제가 기필코 복수하겠습니다.’

*

남천홍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는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남천휘는 그런 형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도 그럴 것이 내일이면 정체불명의 적이 곡부남가를 침입할 것이다. 한데 남천홍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 할 일에 집중하고 있지 않은가.

‘히야, 아무리 봐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잠시 후 남천홍이 고개를 들었다.

“왔니?”

“형은 긴장도 안 돼?”

“엄청 긴장하고 있어. 그래서 오늘은 점심도 걸렀단다. 막 총관이 의심을 살 수도 있으니 거르지 말라고 권유를 해서 겨우 먹기는 했다만.”

결국 먹은 거잖아.

남천홍은 남천휘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어쨌든 내 동생이 믿으라는데 믿어야지.”

“부담스럽게 왜 이래?”

“자식, 기특해서 그런다. 그나저나 대피는 정말 안해도 되겠냐? 너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가솔들이 행여 위험할까 걱정이 되는 구나.”

남천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안 돼.”

적의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곡부남가 밖으로 가솔들을 빼낸다면 적들이 움직일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연의(演義)의 고사를 보라.

유비는 수만 명의 민초를 거느리고 탈출을 하다가 박망파에서 큰 고초를 겪지 않았던가.

‘박망파가 맞나?’

어쨌든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게 핵심이다.

그러니 가솔들은 자신의 손길이 미치는 곳에 모여 있는 것이 훨씬 안전할 터였다.

‘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사용해 버릴 테니까.’

남천홍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나저나 어디를 다녀온 게냐?”

“강에 다녀왔어.”

“한가롭게 산책을 한 건 아닌 것 같고…….”

남천휘는 히죽 웃으며 인벤토리를 살폈다.

《강에서 주워온 조약돌x130》

- 크기가 적당해 한 손으로 던지기 좋다.

- 맞으면 피가 나거나 멍이 든다.

※ 신중하게 던지세요.

그 밖에 크기 별로 수백 개의 돌멩이가 인벤토리 안에 쌓여 있었다. 하나 무게감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워올 게 있어서.”

“녀석, 머리가 굵어졌다고 영문 모를 소리만 하는 구나. 그나저나 이 시기에 나를 찾아왔으니 시킬 일이라도 있는 게냐?”

누구 형 아니랄까봐 눈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남천휘는 쪽지를 건넸다.

“어제 얘기했던 걸 해줘.”

쪽지에는 곡부남가에 속한 가솔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데 이름과 이름 사이에 줄을 쳐놓은 것이 마치 거미줄을 연상케 했다.

“점조직 같구나.”

“비슷하지. 가장 위에 적힌 다섯 명에게 대피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그 다섯 명은 또 다른 다섯 명을 데리고 이동할 거야. 그러면 혼란 없이 빠르게 모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어.”

남천홍은 침음을 흘렸다.

“흐음, 멀리 갈 필요 없이 주변의 다섯 명만 챙기면 되는구나. 언제 가문의 조직도까지 파악한 게냐? 누가 보면 네가 소가주인 줄 알겠다.”

남천휘는 멋쩍은 웃음을 지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명록에는 충성도와 더불어 업무 장소까지 기록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남천휘는 유달리 충성도가 높은 사람들을 선별한 후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 가솔들을 챙기도록 줄을 쳐놓은 것이다.

“신호는?”

“형만 눈치 챌 수 있는 신호를 보낼게.”

“알았다. 내가 할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 뭐든 도와주마.”

“당연하지!”

하나 남천휘는 더 이상의 도움을 청할 생각이 전무했다. 몇 명의 적이 몰려오든 홀로 대적하기로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가용 인력은 서산노옹과 백주검, 그리고 천수련이 전부야. 하나 두 어른은 가솔들을 지킬 테니…….’

남은 건 천수련 뿐이다.

그녀를 움직이게 만드는 건 간단했다.

불의를 보면 자다가도 뛰쳐나갈 성정이 아니던가.

그러니 내일 탈각진체법을 수련하는 시간은 적이 침입할 무렵이 되어야 할 것이다.

“놈들이 백주대낮에 쳐들어오지는 않을 거야. 산적이나 화적떼의 노략질로 꾸미고 싶을 테니까.”

“오냐, 저녁은 거르지 않으마.”

그런 의미는 아니었어.

남천휘는 웃으며 남천홍의 처소를 나섰다.

적의 기습이 두렵지는 않았으나, 부담스러웠다.

‘네 놈들이 몰살을 원한다면 나는 단 한 명도 다치지 않게 하는 걸 목표로 삼으마.’

그러던 중 남천휘는 불현 듯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놈들의 몰살도 나쁘지 않겠는 걸?’

잘만하면 혈사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곡부남가를 두어 단계는 강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할 듯했다.

“좋아, 제대로 파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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