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호만렙지존-112화 (112/305)

56, 관심법(觀心法).

56, 관심법(觀心法).

그는 한 때 혈인검(血忍劍)이라 불렸다.

피를 아무리 흘려도 혼절할지언정 표정의 변화가 없다고 해서 붙여진 별호다.

그만큼 독했고, 잔인했다.

냉혈한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눈시울을 붉힌 채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북쪽 하늘을 보며 그저 숨을 몰아쉴 뿐이다.

“후우.”

잠시 후 중년인이 관제묘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회주.”

“보고하라.”

서늘한 한 마디에 중년인은 고개를 조아렸다.

“장천회주와 제검방주가 도착했습니다.”

혈인검은 말없이 관제묘를 나섰다.

관제묘 밖에는 건장한 체구의 사내와 복면을 쓴 자가 자리했다.

혈인검은 건장한 체구의 사내를 보며 읊조렸다.

“장천회는 무사했군.”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죄송합니다. 원후봉 중턱에서 대기하던 중 혈사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 뒤로 아홉 명의 사내가 나타나 고개를 숙였다.

비슷한 체구에 비슷한 눈빛을 번뜩이는 자들이다.

바로 황보세가의 무공을 흉내 내어 공태령을 죽이기로 약속이 되어 있던 장천회(長天會)였다.

곤륜산인의 숨겨둔 한 수가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혈인검은 복면을 쓴 자를 응시했다.

“벗지 마라. 어차피 얼굴을 보려고 만난 것이 아니잖아.”

복면을 쓴 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건넸다.

“산인께서 이룩하신 삼회, 삼방, 사당 중 우리 셋만 남았소. 혈인검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오.”

관제묘에 있던 중년인이 다가와 혈인검의 어깨에 붉은 피풍의를 걸쳐주었다. 혈랑회의 상징인 피풍의가 오늘 따라 묘하게 번들거리는 듯했다.

혈인검은 며칠 전 만났던 곤륜산인을 떠올렸다.

대업이 성사 직전이라며 아이처럼 기뻐하던 모습이 뒤이었다.

“청도문은 산인과의 관계를 부정했다지.”

장천회주와 복면인은 침묵했다.

“산인은 어린 것들에게 유린당하여 처참하게 생을 마감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청도문을 입에 담지 않으셨지.”

혈인검은 검을 뽑아 땅에 꽂았다.

“산인이 없으면 우리는 한낱 마적떼에 불과해. 이대로 뿔뿔이 흩어질 것이 아니라면…….”

장천회주와 복면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리고 그들이 예상하는 대답이 뒤이었다.

“복수해야지.”

“목표는?”

하나 이번에는 그들이 예상하는 대답과 달랐다.

장천회주가 미간을 좁힌 채 되물었다.

“뭐라 하셨소?”

“곡부남가를 불태운다.”

“신공부가 아니라 곡부남가를 불태운다고요?”

혈인검은 결정을 내린 듯 흔들림 없이 말했다.

“산인께서 내게 내린 마지막 명령은 곡부남가의 삼남, 남천휘의 행적을 조사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놈은 산인을 죽인 셋 중 한 놈이다.”

그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던 눈매는 역팔자로 치솟았고, 부들부들 떨리던 입매가 한껏 치솟았다.

“한데 천수련이라는 계집도 함께 있다더군.”

장천회주와 복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같아서는 신공부를 치고 싶었다.

하나 그것이야 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아니던가. 곡부남가라면 명분에도 맞고, 현실적으로도 실현이 가능한 목표였다.

“우리끼리면 충분하겠군요.”

혈인검은 장천회주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확실히 해야 해. 곡부남가의 주춧돌까지 모조리 갈아버린 후에야 복수가 끝나는 거다.”

부회주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남천휘와 천수련은 후기지수라고 해서 만만히 여길 실력이 아닙니다. 게다가 서산노옹과 백주검까지 합류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태산에 나타났었던 의문의 궁귀 또한 남천휘와 이어져 있습니다.”

장천회주와 복면인은 인상을 썼다.

간언 치고는 너무 수비적인 보고가 아닌가.

하지만 혈인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지. 그래서 그분들을 모셨다.”

“설마 황도쌍노께서 오시는 겁니까?”

청도문의 근거지인 청도 반대편에 황도가 존재했다.

일찍이 곤륜산인이 의형으로 삼은 황도쌍노(黃島雙老)는 황도의 터줏대감이었다.

“그분들에게 황도를 내어준 것이 산인이었다. 그러니 그분들이 어찌 산인의 죽음을 알고 그냥 있을 수 있겠느냐?”

장천회주와 복면인은 한결 자신감이 생긴 듯 눈을 빛냈다.

“거사일은 언제로 잡으실 거요?”

혈인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산 아래 위치한 표국의 깃발이 찢어질 것처럼 펄럭였다. 그는 북풍(北風)이라 수놓인 깃발을 보며 말을 건넸다.

“그건 저 자에게 물어봐야지.”

북풍표국주 왕망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가 신공부의 공문십철 중 진조문(秦朝門)에 줄을 댄 것이 벌써 수 년 전이다. 영세한 곡부남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거대한 신공부의 품으로 들어가고자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곡부남가의 가주인 남운군의 눈을 속이고, 소가주인 남천홍의 귀를 피했다. 막 총관의 귀신같은 후각까지 뒤로 한 채 참아온 세월이었다.

한데 불과 두어 달 사이 상황이 묘하게 꼬였다.

북풍표국과 진조문을 이어주던 사내는 점점 요구하는 것이 늘었고, 불민한 아들 녀석은 남천휘에게 진조문의 검법을 자랑하기까지 했다. 진조문과의 밀약을 숨기기 위해 아들의 팔까지 직접 부러트렸다. 오늘도 부목을 댄 채 끙끙 앓는 왕풍을 보며 얼마나 속이 탔던가.

“빌어먹을! 내가 참고 산 세월이 몇 년이거늘!”

지난 며칠 간 남천휘에 대한 소문이 근방에 자자했다. 삼정을 와해하려는 음모를 막고 용봉삼협에 속했다는 소리에 울화가 치밀었다.

“분명 나 모르게 돈을 빼돌린 것이 분명해.”

그렇지 않다면 한낱 한량에 불과하던 녀석을 하루아침에 고수로 만들 수 없었으리라.

‘먼저 배신한 건 남운군, 네 놈이다.’

그 때 가주전 밖에서 총표두인 삼람도 호연척의 외침이 들려왔다.

“국주, 이각 후에는 출발해야 합니다.”

왕망의 얼굴이 한 번 더 일그러졌다.

자신의 아들은 팔이 부러져서 병신이 됐거늘 남천휘의 귀환을 축하하러 가야 한다는 사실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생각 같아서는 술이나 진탕 들이켜고 싶다.

하나 이제 와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가는 덜미를 잡힐 수도 있는 노릇이다.

“쯧쯧! 진조문의 사자는 어째서 이렇게 내방이 뜸한 게야.”

그 순간 예기치 못한 대꾸가 들려왔다.

“때가 되었다.”

왕망은 화들짝 놀라며 돌아섰다.

방갓을 쓴 혈인검이 기척도 없이 나타난 게다.

“어찌 이리 소식이 없으셨소?”

“말 그대로 때를 기다렸을 뿐이다.”

“혹시 이번 흉사로 인해 우리 쪽 일이 뒤로 밀린 건 아닌지…….”

왕망의 원망어린 한 마디에 혈인검은 방갓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러자 서늘한 눈빛이 비수처럼 왕망에게 꽂혀들었다.

“후기지수 몇몇이 해결했을 만큼 작은 일이었어. 그대는 신공부가 그런 조잡한 수작질에 휘둘릴 것이라고 여기는 건가?”

“그렇지 않소.”

“이번 일은 약속대로 진조문이 나설 거요.”

혈인검은 신공부의 핵심 방파인 진조문에서 파견 나온 사절인양 위장을 했다.

하나 왕망은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혈인검이 전해준 열왕대전검은 분명 진조문의 독문검법이 아니던가.

왕망은 입맛을 다셨다.

“하면 곡부남가는?”

“마적 떼가 난입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낸 불운한 방파로 기억되겠지.”

혈인검의 확답을 듣고 난 후에야 왕망은 느긋하게 수염을 쓰다듬었다.

“하면 거사일은 언제가 좋으시겠소?”

“표국주는 곡부남가의 연회에 참석하시오. 그리고 삼 일 안에 다시 날을 잡아 두 번째 연회를 개최하시오. 그대가 비용을 내고, 음식을 장만한다면 곡부남가도 의심치 않을 게요.”

왕망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인해 번들거렸다.

“내가 할 일은?”

“약속 시간에 맞춰 문을 여시오. 그것만으로도 그대는 신공부의 남쪽 상행을 담당하는 대표 표국의 주인이 될 게요.”

혈인검은 그 말을 끝으로 자취를 감췄다.

왕망은 긴 숨을 흘리며 호피 의자에 몸을 묻었다.

“묵은 체증이 벌써 내려가는 것 같구나.”

때마침 총표두 호연척이 다시 찾아왔다.

“표국주, 준비가 끝나셨는지요?”

왕망은 기분 좋게 외쳤다.

“하하! 가자. 가. 조카가 무사히 돌아왔다는데 숙부인 내가 축하를 해줘야지.”

*

천수련은 뒷짐을 진 채 남천휘의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따라붙더니 물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탈각이야.”

“아니야!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고요. 내가 그거 하려고 이 년 동안…….”

천수련은 한 숨을 흘렸다.

말을 하면 할수록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기분이다

“어쩜 그렇게 완벽할 수가 있지. 그렇게 짧은 시간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른 것도 놀라운데 인체의 기를 자연의 파동과 맞춘 듯 보였어요.”

남천휘는 앞만 보고 걸었다.

‘요 녀석아! 이것이 집중과 심상의 힘이란다.’

그는 특기를 활용할 때마다 뼈저리게 느꼈다.

제아무리 등급이 낮은 특기라고 해도 자연의 흐름과 일맥상통함을 말이다. 어쩌면 도가의 상승 공부를 공짜로 체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에 귀식까지 활성화시켰지.’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심상 수련을 하면 효과가 더욱 극대화되지 않을까 싶다.

몽산의 대두동에 가면 꼭 해봐야겠다.

결국 천수련이 입술을 삐죽이며 항복 선언을 했다.

“좋아요. 제가 졌어요. 남 소협의 성정과 달리 내외일체의 경지가 뛰어남을 인정할게요. 남 소협은 제가 이 년 동안 이룩한 경지를 일순간 넘어섰네요. 축하합니다.”

박수까지 치는 걸로 봐서 진심은 아니로구나.

속 좁은 것 같으니라고.

“그래서 소원이 뭐예요?”

“나중에.”

“지금 말 안하면 무효!”

“그래도 나중에 하자.”

남천휘는 일부러 천수련을 쳐다보지 않았다.

탈각을 흉내 냈을 뿐인데 어째서 천수련의 호감도가 상승했단 말이냐.

이제 75였다.

여차하면 지옥문, 아니 미연시가 열리게 생겼다.

“다 왔다!”

남천휘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에 이르자, 안도한 듯 크게 한 숨을 내쉬었다.

한데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곡부남가의 가솔은 물론이고, 상인과 북풍대원들까지 모두 모였다.

그 숫자가 무려 이백여 명에 이르렀다.

“삼공자! 강녕하셨습니까?”

“남 소협! 건승을 축하드립니다.”

“위명이 자자한 귀협의 존안을 이렇게 뵙는군요.”

축하와 동경, 놀림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천수련은 시비나 하인들이 격의 없이 어울리는 걸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남천휘는 그 모습에 곡부남가의 실상을 알려줬다.

“본가에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월봉을 받고 고용된 관계야. 북풍상단도, 북풍표국도 마찬가지지. 노비는 단 한 명도 없어.”

천수련은 뒤늦게 탄성을 흘렸다.

그제야 가솔들의 맑은 눈빛과 뽀얀 피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저들에게 곡부남가는 주인의 집이 아니라 자신의 집이로구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쩌면 만인이 웃으며, 그리고 편히 지낼 수 있는 도원경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남천휘의 등이 여느 때보다 넓어 보였다.

마치 큰 사람처럼 듬직했다.

‘그래서 저 사람은 그렇게 자유분방한 걸까?’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린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강아지풀을 귓가에 흔드는 것처럼 말이다.

천수련은 몸을 웅크린 채 진저리를 치다가 어색한 미소를 보였다.

‘저 사람이라면…….’

그 때 남천휘가 혀를 빼물며 눈을 뒤집었다.

“으어어어어!”

도홧빛 정취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뭐, 뭐예요?”

남천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이러다가 늦어. 귀협과 개똥이! 우리가 주인공이라고.”

“으으, 그 놈의 개똥이! 진짜!”

천수련은 씩씩거리며 남천휘를 지나쳤다.

남천휘는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휴, 위험했어.”

그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사람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러던 중 예기치 못한 알림으로 인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띠링-

◎ 가솔들과 진심을 담아 교류했습니다.

◎ 팔 할 이상의 가솔이 당신을 환영합니다.

◎ 곡부남가에 대한 영향력이 증가합니다.

◎ 곡부남가의 관리자 모드가 대기 중입니다.

◎ 두 번째 조건을 통과했습니다. (2/3)

칠야와 창월을 바쳤을 때 들려온 알림이다.

‘세 번째 조건까지 통과하면 어떻게 되는데?’

대답보다 큰형의 외침이 빨랐다.

“저기 주인공이 오는 군요!”

남천홍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남천휘를 가리키며 외쳤다.

“오늘 부로 곡부남가의 삼남이자, 용봉삼협 중 귀협인 남천휘에게 가문의 일을 맡기려 하오.”

남천휘는 입을 벌린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업을 제외한 타격대와 곡부남가의 경비를 책임질 게요. 그러니 귀협을 믿고, 모두 편히 주무시오! 앞으로 곡부남가는 귀협이 지켜줄 거외다!”

“와아아아아!”

가솔들의 환호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 알림이 울렸다.

◎ 가주 대리에게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 곡부남가에 대한 영향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 곡부남가의 관리자 모드가 대기 중입니다.

◎ 세 번째 조건을 통과했습니다. (3/3)

남천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울린다. 울려.

히든 모드를 알리는 경고음이 울린다.

《삐이이이이이이》

《성소 급 방파의 관리자 모드를 생성 합니다.》

《보조 설정에 대한 접속 권한을 부여합니다.》

《한시적으로 히든 모드 ‘문파 관리’가 해금됩니다.》

그 순간 남천휘의 눈에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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